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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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엘의 예상대로, 미아와 리페는 곤란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비서 일에 지원하기는 했지만, 그녀들에게 닥쳐온 것은 핑크빛 오피스 라이프가 아니라 뭐부터 손을 대야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업무량이었다. 현실은 그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했던 것이다.
“이건 거짓된 천국으로, 이건 미라지 코어에, 이건 허세와 망상에게 보내고, 이건… 왕성 쪽으로 가야겠네.”
“어, 그게, 그러니까…”
원래부터 이런 일에는 익숙지 않은 미아는 말할 것도 없고, 나름대로 업무에 대해서는 경험이 있다고 생각했던 리페 역시 버벅거리기는 마찬가지다. 희망과 생명이 재단의 경영이나 기타 업무에 뛰어든 것은 배우로서 성공하고 난 뒤의 일이었기 때문에,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이라면 몰라도 누군가의 지시를 수행하는 일은 별로 경험이 없었다. 결국 비서 업무에 대해서는 희망과 생명도 보호와 균형이 처한 입장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들에게 더욱 난감한 것은 바로 아란의 존재였다. 이미 제랄딘으로서 비서 업무에는 만렙을 찍어 버린 공포와 죽음이 본신이어서야 그녀들과는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가 없다. 나름 라이벌로 생각하는 이가 순식간에 저만치 앞서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니 더욱 조바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 그렇지 않아도 익숙하지 않은 일에 마음까지 조급해지면 손발이 꼬이는 건 차라리 필연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
규설과 힐리에타는 그런 미아와 리페의 모습을 보면서 미엘의 혜안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제랄딘을 실제로 키워낸 것이나 다름없다고 일컬어질 정도라고나 할까. 설령 형진과의 관계가 잘 진전되더라도 미엘만큼은 절대로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떠올릴 정도다.
“도와드릴게요.”
“네? 하지만…”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어요. 저희들도 아직 이 일에 완전히 익숙하지는 않은 상태지만, 이미 한 번 겪었던 시행착오를 알려드리는 정도는 가능해요.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일을 배운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여 주세요.”
“규설님…”
비서보다는 어쩐지 사감 선생님이 어울리는 외모였지만, 결국 알맹이는 보호와 균형 그대로였던 모양이다. 미아는 규설이 친절을 베풀자 금새 눈물마저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리페 역시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건 이렇게 하면 더 빨라요.”
“아! 이런 방법이! 정말 대단해!”
힐리에타가 서류를 간단하게 정리하는 노하우를 알려주자 리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탄성을 터트렸다. 생긴 건 영락없이 귀염둥이인데, 껄껄거리며 웃는 모습은 영락없이 아저씨 같은 느낌이다. 희망과 생명으로 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모습이 바뀌니 그 동안 숨겨져 있던 본성이 드러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따지고 보면 힐리에타도 비슷한 성격이고 보니, 둘은 금새 의기투합해서 친구처럼 어울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되려나 싶었는데, 다행이네.”
“그러게요.”
아란은 특유의 눈웃음을 지은 채 형진의 말에 답했다. 제랄딘이 규설이나 힐리에타를 가르쳤을 때와는 아무래도 상황이 좀 미묘하게 다른지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규설과 힐리에타가 의외로 미아와 리페와 반목하지 않고 먼저 다가서자 그녀로서도 조금 의외다 싶은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또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어쨌든 그녀의 입장으로서는 미아와 리페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시도하는 것 자체가 다소 곤란한 일이기 때문이다.
형진 역시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해도 안도하는 건 마찬가지. 아직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다른 우주와의 전쟁이 시작된 시점에서 그의 일을 뒷받침해야할 비서진 안에서 내홍이 생기기라도 하면 그 부담은 오롯이 형진의 몫이 되어 버린다.
어떻게 보면 보호와 균형의 갑작스런 제안을 간단히 받아들인 것도 결국 그런 이유 때문. 하지만 승낙은 했어도 그것이 어떤 식의 결과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역시 불안한 기분을 저버릴 수 없었는데, 다행히 일이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되니 그로서도 안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뭔가 이상해.”
평소라면 보호와 균형의 전용석이었어야 할 형진의 무릎 위에 지금은 리페가 자리 잡고 있다. 하기야 비서인지 사감인지 헷갈리는 모습의 미아가 이전처럼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성인용 비디오의 한 장면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사실 겉모습을 빼면 알맹이 자체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상황이지만, 이런 식으로 미묘하게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연출되는 걸 보면 외모라는 것이 단순히 무시하고 넘어갈 만한 일은 아닌 모양이다.
폭풍 같았던 업무 시간 중간에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티타임을 가지면서 리페가 던진 말에 형진은 빙긋 웃으며 물어보았다.
“뭐가 이상한데?”
리페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지금의 모습이 좀 어색했는지, 살짝 얼굴이 상기된 모습으로 대답했다.
“지금은 전쟁 중이잖아.”
“그렇지.”
“하지만 너무 평온해. 게다가 지금 우리들이 하는 일만 놓고 봐도, 칼이나 창을 휘두르거나 총을 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누가 보면 전쟁 중이 아니라 새로운 사업이라도 시작하는 줄 알겠어.”
“그런가.”
확실히 그들의 지금 모습을 보면 일반적으로 연상하는 전쟁 상황 같은 건 떠올리기 어렵다. 찬란한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지도, 그렇다고 포성 가득한 야전에서 대규모 군대를 지휘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깔끔하게 차려진 별궁 안에서 시시각각 올라오는 엄청난 양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뿐이다.
“어쩔 수 없어. 애초에 우주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흔히 생각하는 전쟁의 양상과는 다른 부분도 많은데다, 우리는 이미 선두에서 칼을 들고 앞장서서 나서기 보다는 뒤에서 전쟁이 잘 수행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쪽에 가까우니까.”
“그런가.”
리페는 그런가보다 하며 납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현재 상황이 그리 평온한 것만은 아니었다.
“탐사선 8-1. 적으로 보이는 물체를 발견했습니다.”
“적이 다급히 회피합니다!”
형진이 사방으로 쏘아낸 탐사선은 어느 순간이 지나자 적으로 판단되는 존재들과 연이어 접촉하고 있었다. 탐사선을 통제하는 잡신들로서는 그런 순간이 발생할 때마다 교전이 벌어질까 싶어 긴장했지만, 의외로 상대는 교전을 하기 보다는 기겁하고 놀라 급히 피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탐사선이 워프 버블에 휩싸여 초광속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원거리에서 관측할 경우 아스트라페가 날아드는 장면과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초전에서 아스트라페에 의해 혼쭐이 난 상대로서는 워프 버블이 관측될 때마다 화들짝 놀라 도망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후퇴한 적의 주력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묘하군. 일전의 모습으로 봐서는 아직 초광속 항해를 실현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는데.”
“아마도 게이트 비슷한 것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초광속 항해나 게이트를 만드는 것이나 모두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상대성 이론의 벽을 넘는 것과 공간의 벽을 넘어서는 것, 어느 쪽이든 상식적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신의 힘이 개입된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실제로도 형진은 초광속 항해보다 각 세계를 넘나드는 공간 이동을 먼저 경험했다. 어떤 식의 권능을 지녔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은염랑처럼 특정한 조건이 만족되었을 경우 거리를 무시한 이동이 가능한 사례는 의외로 꽤 많은 편이다.
“주변 지역의 탐사를 이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후퇴한 적 주력부대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물론입니다.”
균열 근처에 도사리고 있었던 적은 다른 우주로의 침공을 염두에 두고 조직된 것일테니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적의 세력 가운데서도 특히 정예에 해당될 것이다. 이 주력 부대를 조기에 섬멸할 수 있다면, 그만큼 적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향후 형진이 전략을 펼쳐 나가는 것에도 큰 이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은염랑들은 준비가 되었나.”
형진의 물음에 규설이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밤의 신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언제든 출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쪽 우주 역시 물리 법칙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확인한 이상, 은염랑의 능력 역시 유효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들의 능력은 생명의 불꽃이 크게 타오르는 지역을 임의로 찾아내는 것.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적의 중요 거점을 단숨에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쪽의 신도 인간을 비롯한 지성체들을 그 힘의 근본으로 삼는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생명체가 번성하는 곳은 중요한 보급 거점일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상대의 세력이 생명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기계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이상. 즉,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타격을 적에게 가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적에게 큰 혼란과 피해를 유발할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
“아직은 아니야. 그들의 등장은 일단 적의 이목을 이곳으로 완전히 끌어들여서 상대가 총력전으로 나섰을 때가 되어야 해. 배에 힘을 단단하게 주고 있을 때 얻어맞는 것과,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옆구리를 찔리는 건 같은 힘으로 때리더라도 상대가 받는 타격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다만 언제 출동 명령이 떨어지더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겠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를 전달해 두겠습니다.”
규설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아란이 보고를 이어왔다.
“일전에 수거된 적의 잔해에 대한 일차적인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 뭔가 특이한 점이라도 있나.”
“네. 우선 병기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던 크리스털이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소견이 나왔습니다.”
“그게 생명체라고?”
형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그 거대 크리스털은 일반적인 생명체의 개념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면밀한 분석이 진행되어야겠지만, 아마도 규소 생명체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규소 생명체라…”
형진이 지금까지 발견한 생명체들은 환수처럼 에너지 기반의 존재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탄소 생명체 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규소 생명체는 가능성이 지구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기는 해도, 실존할 가능성은 매우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규소로 이루어진 분자들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탄소를 기반으로 한 분자보다 월등히 높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실제로 규소 기반의 생명체들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탄소 기반의 생명체들이 발달된 기술을 통해 자신의 신체 일부를 규소 기반의 신체로 치환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런 식의 얘기들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사례가 발견되었다. 역시나 다른 우주. 하긴 이런 차이점이라도 없다면 서로 다른 우주를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아주 난리가 났겠군.”
형진의 말에 아란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잘 하면 분자 컴퓨터의 기반 기술을 획득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분자 컴퓨터라… 그건 아주 흥미로운 얘기인데.”
현재의 실리콘 기반 기술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해 있다. 더 이상 작은 규모로 반도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규소 기반의 생명체라면 그 생명 현상을 분석함으로서 한계에 다다른 컴퓨팅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아예 새로운 물질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니 기존의 기술을 접목시키는 것도 더욱 용이할 것이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한쪽에서 업무 내용을 전해 받고 있던 미아가 크게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긴급 보고입니다! 적 주력의 위치가 파악됐어요!”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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