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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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진에게서 허락이 떨어지자 보호와 균형은 새로운 아바타의 모습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느라 머리를 싸맨 채 끙끙 대기 시작했다. 형진으로서는 그냥 본래의 모습과 같게 만들면 되지 않나 싶긴 해도 아바타의 모습을 결정하는 건 본인의 자유이니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색다른 아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이니 슬그머니 기대가 동하는 것도 사실이고.
보호와 균형만큼 티를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희망과 생명도 새로운 아바타의 모습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 신혼을 두 번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에 유아로부터 본신을 해방 시키는 시기까지 늦췄던 것이 누구이던가. 당연히 그녀 역시 갑자기 굴러들어온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음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녀들의 고민이 끝을 맺은 건 아란이 포트니아 테론에게 이런 저런 당부를 남기고 근무처를 왕성으로부터 스틱스로 옮겨온 직후의 일이었다. 설정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완벽한 또 하나의 부인인 아란이 모습을 드러내자 두 여신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정했어요!”
아란이 도착할 때까지도 형진의 무릎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던 보호와 균형은 마침내 그렇게 외치고 나서야 그에게서 떨어졌다.
“금방 다녀올게요. 어디로 가지 말고 기다려요.”
“알았어.”
보호와 균형이 그렇게 말하고 후다닥 어딘가로 향하자, 혼자 끙끙대며 고민하던 희망과 생명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이만. 좀 있다 봐.”
“그래.”
두 여신이 그렇게 모습을 감추자, 그제서야 느긋하게 앉아 있던 공포와 죽음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도 이만 엘리시온으로 가볼게. 뭔가 좀 상황이 이상하긴 하지만.”
“후후. 그렇긴 하지.”
공포와 죽음은 그렇게 스틱스로부터 떠나갔지만, 그 자리에는 눈웃음이 매력적인 아란이 대신 남았다. 이제는 그녀가 공포와 죽음의 또 다른 아바타임을 알고 있는 규설이나 힐리에타로서는 이 새로운 상사의 등장에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잘 부탁해요. 왕성에서 자주 봤었죠?”
“바, 반갑습니다. 아하하하…”
늦은 시간에 특유의 눈웃음을 지은 채 저녁을 챙겨주던 그녀가 냉랭하고 무표정한 모습을 지닌 공포와 죽음의 또다른 아바타라니. 어지간한 사람은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기야 그녀와 오랜 인연을 이어가다가 마침내 부부의 연을 맺게 된 형진조차도 본인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듣기 전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일이니 차라리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기다. 저렇게 완벽하게 다른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니. 이건 이미 코스프레니 뭐니 하는 수준을 까마득하게 넘어서지 않았는가. 어떻게든 눈에 좀 들어보려고 매일 야근에 철야에 별 짓을 다하고 있는 누군가의 눈에는 참으로 불합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말로 규설과 힐리에타를 기함하게 만드는 일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아란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공간을 넘어 새로운 인물이 스틱스로 넘어왔다.
“이건…”
새로운 인물의 모습은, 딱 보는 순간 비서구나 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전형적인 외모라 할 수 있었다. 긴 머리는 정갈하게 말아올리고, 눈에는 날카로운 이미지의 안경을 착용했다. 안에는 흰색 블라우스를 착용하고 겉에는 검은색 투피스를 입었는데, 미니스커트의 슬릿 사이로 슬쩍 슬쩍 보이는 검은 색 망사 스타킹과 연결된 가터벨트의 모습이 너무 치명적이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다가선 그녀의 모습에 잠시 얼이 빠져 있던 형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엘피스?”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아닌데요. 전 노미아인데요.”
“뭐?”
엘피스는 희망과 생명의 애칭이고, 노미아는 보호와 균형의 애칭이다. 즉, 지금 눈앞에서 킬힐을 신은 채 서 있는 팔등신 미녀 비서는 바로 보호와 균형의 새로운 아바타인 셈이다.
아무리 봐도 본래 그녀의 귀여우면서도 약간 철이 없는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형진은 혼란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어… 그게… 뭐랄까… 여러모로 예상 밖이네.”
“그런가요?”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니다. 평소에 하듯이 그의 옆에 바짝 달라붙고 싶어서 우물쭈물하는 기색이 뻔히 들여다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 행동을 보이기도 전에, 다시 누군가가 공간을 넘어 스틱스에 도착했다.
“진!”
“어이쿠!”
앞서 보호와 균형의 새로운 아바타가 쭉쭉 빠진 팔등신 미녀 비서의 이미지라면, 이번에 새로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아담하고 앙증맞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살짝 오동통한 느낌의 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로 형진에게 와락 달려드는 모습은 딱 봐도 이쪽이 보호와 균형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아니다. 이미 보호와 균형은 새로운 아바타를 선보인 상태. 그렇다면 남는 인물은…
“엘피스?”
혹시 엉뚱하게 다른 인물이 스틱스를 방문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떠올리며 그렇게 물었다.
“응! 나야! 바로 알아보네? 헤헤헷…”
“…”
헤헤헷이라니. 툭하면 츤데레마냥 툴툴거리기 일쑤였던 바로 그 희망과 생명이 정녕코 맞단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 갭이 큰 것 같은데.
조금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는 형진의 모습에, 그녀는 자기가 생각해도 뭔가 어색하다 싶었는지 괜히 헛기침을 해대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역시… 이상해?”
“하하하…”
이상하다. 이상하고말고! 차라리 두 여신이 서로 모습을 다시 바꾼다면 몰라도, 지금의 모습은 평소 그녀들의 이미지와는 너무 상반된 모습이다.
하지만 처음의 당황스러움이 조금 지나자 그녀들이 왜 이런 식의 과격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보호와 균형의 경우엔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의존증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새로운 아바타로 형진의 옆에 설 수 있게 된 지금의 상황은 아이같이 철없는 자신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바꿔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희망과 생명의 입장도 그리 다르지 않다. 항상 툴툴거리는 이미지의 그녀였지만, 혹시라도 형진이 이런 자신에게 정이 떨어지거나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태도를 바꾸어서 애교 같은 걸 보려볼래도 어쩐지 스스로부터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 역시 분명한 사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새로운 아바타를 만들면서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자 결심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외모가 바뀌어 봐야, 결국 알맹이는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지만.
그런 점에서 생각하면 형진조차도 동일인물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못했던 제랄딘이나 아란의 존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전혀 다른 인물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다니. 어떻게 보면 공포와 죽음이야 말로 진정한 우주 최강의 여배우인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동일인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울 정도네.”
새로운 두 비서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형진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 모습일 때는 미아라고 불러주세요.”
“나도 리페라고 불러줘. 처음 약속도 아바타일 때는 다른 사람 취급하기로 했었던 거니까. 이 모습인데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건 좀 그렇잖아.”
미아는 노미아에서 한 글자를 뺀 이름이고, 리페는 희망과 생명이 여배우로 활동할 때 쓰는 이름중 세컨드 네임에 해당된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확실히 지금의 모습에 대고 예전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도 뭔가 어색한 건 분명한 일이다.
“본인이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는 것이 맞겠지.”
형진이 선선히 승낙하자, 둘은 밝게 웃어보였다.
“고마워요.”
“나도. 음, 그럼 뭐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뭐든 말해봐.”
“하하…”
형진이야 아내들의 새로운 모습이 어차피 자신을 위한 것이기에 처음의 당황스러움이 지나자 신선한 느낌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난데없는 여신들의 난입으로 난감해 하고 있던 규설이나 힐리에타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기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게 말이 되나. 완전 사기 아닌가.
아란까지는 그렇다 쳐도, 미아와 리페의 모습은 그녀들로서는 정말 부조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래서야 형진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다른 모습을 선보일 수 있을 테니, 굳이 새로운 여자를 안을 필요마저 사라져 버리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이 끼어들 틈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얘기도 된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이대로는 안 돼.”
“맞아. 이대로는 안 돼.”
지금까지 서로를 라이벌로 생각하며 알게 모르게 경쟁하고 있던 둘이었지만, 이번과 같은 예기치 못한 사태에 대해 너무나 무력하기만 한 자신들의 처지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말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한 그녀들의 머리 속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르긴 해도 지금 형진은 아내들의 새로운 모습에 푹 빠져 있을 터. 이제야 그녀들도 형진에 대해 왜 왕성의 사람들이 그렇게 수군거리는지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도대체 저 남자의 신혼이 과연 끝나기는 하는 걸까.
뭔가 빈틈이 있어야 찔러보기라도 할 것 아닌가. 자칫 하다가는 허울 좋은 비서 생활만 계속하다가 처녀로 늙어죽게 생겼다.
산군이나 노스페라투에게 있어 처녀로 늙어 죽는다는 표현은 인간과는 그 심각성에서 엄청난 차이를 지닌다. 인간에 비해 압도적인 수명을 지니는 그들이 처녀로 늙어죽는다는 건 그만큼 오랜 시간을 홀몸으로 지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잠시 휴전하고 우리끼리라도 힘을 합치는 건 어때?”
“그거야… 나도 바라는 바지만, 우리들끼리 힘을 합친다고 과연 의미가 있을까?”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상론이나 다름없는 얘기다. 지금처럼 세 여신이라는 막강한 태산들이 형진이라는 이름의 태양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그녀들의 존재는 그저 하잘 것 없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나 마찬가지. 티끌은 모여봐야 결국 티끌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를 끌어들여야 할까.
나름대로 고민을 해보긴 했지만, 답은 이미 처음부터 나와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비서의 자리로 밀어준 미엘에게 도움을 청했다. 대놓고 이런 얘기를 하기는 아무래도 꺼려질 수밖에 없는 얘기지만, 그래도 당장 믿을 만한 건 미엘 뿐이었던 것이다.
“글쎄요. 그건 곤란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예상 외로 미엘은 난색을 표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두 분을 비서로 추천한 것 까지는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님에게 두 분을 안으라고 권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에요. 그분이 누구를 안으시건 간에, 저는 그것을 강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고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그것은 오로지 두 분이 스스로 개척해야 할 일인 셈이죠.”
길게 말은 했지만 결국 요약하면 밥그릇을 쥐어 줬으니 그걸 떠먹는 건 알아서 하라는 얘기다.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얘기일 수도 있었지만 사실 그것이 합당한 얘기이기도 했다. 자칫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반려로 밀어 올리는 행위가 관례로 굳어지면, 그 자체로 왕성 내부에 세력이 나뉘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규설과 힐리에타는 자신들이 어리석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막막한 느낌에 한숨을 지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미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한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두 분이 공략해야 할 대상은 진님도 저도 아니에요.”
“그게 무슨…”
“미아와 리페, 이 두 분은 비록 여신님들의 아바타이긴 하지만, 당장은 그저 신출내기 수습 비서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단계를 직전에 경험한 선배라 할 수 있죠.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매우 효과적인 위치라 생각하는데요.”
“아…”
그렇다. 그녀들은 누구보다도 수습 비서가 맞닥뜨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입장. 희망과 생명이라면 몰라도 보호와 균형처럼 의존증이 심한 여신은 그런 식의 도움을 절대로 쉽게 외면하지 못할 터.
장수를 쓰러뜨리려면 먼저 말을 쏘라던가.
새로운 여신들의 아바타를 공략하게 되면, 당연히 형진과의 관계도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질 수 있을 터.
“대, 대단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도대체 길이 보이지 않던 암담한 미래에 한 줄기 등불이 비치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규설과 힐리에타는 미엘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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