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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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었군.”
사방으로 흩어진 탐사선들이 첫 번째 위성들을 내려놓으며 수집한 정보가 스틱스로 전해졌다. 하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본래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는지 균열 근처 0.1 광년 거리에서는 아무런 천체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분석 결과입니다.”
“어디…”
균열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과 더불어, 형진이 가장 먼저 파악한 것은 새로 발견한 이 우주가 과연 본래 자신들이 살던 우주와 얼마나 유사한지에 대한 것이었다.
과학이든 마법이든 현재 사용하고 있는 기술들의 대부분은 본래 속해 있던 우주의 여러 가지 법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만약 이쪽 우주가 본래 형진이 속해 있던 우주와 여러 가지 부분에서 다른 법칙 하에 움직이는 곳이라면, 단순하게는 사용하고 있는 장비나 무기는 물론이고 생명체의 생존까지도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형진도 어느 정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그 정도로 다른 법칙 하에 존재하는 곳이라면 극단적으로는 아스트라페는 물론이고 티폰이나 스틱스도 제대로 기능을 다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서의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새로운 우주에 적용되는 여러 가지 법칙이 기존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이곳이 다른 우주가 아니라 아직 내 인지 범위에 들어오지 않은 영역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겠지.”
물론 이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이다. 적어도 앞서의 전투에 등장했던 애벌레들의 존재를 감안해 보면, 그 정도 숫자의 생명체들이 번성하는 곳을 은염랑들이 발견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성이 아무리 작더라도 일단은 염두에 두고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만 하는 것이 가장 위에 선 자의 역할이다. 굳이 머피의 법칙 같은 말을 쓰지 않더라도, 최악의 상황이란 건 언제 어느 때에 닥쳐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관측 결과는?”
“여기 있습니다.”
일단 이 우주에 적용되는 법칙들이 본래 살던 곳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 다음은 그 법칙에 기반한 관측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다.
항성계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장기간 관측을 요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바로 결과를 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다소 부정확하기는 해도 빠른 관측 결과를 내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분광 시차나 주계열성 도표를 활용한 방법이 그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같은 수준의 밝기를 지닌 별이라도 가까울수록 더 밝아 보이게 마련이다. 이 방법들은 이와 같은 점을 이용한다.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 별이 가진 절대 밝기를 계산한 다음 실제로 눈에 보이는 밝기 수준과 비교해 대략적인 거리를 파악하는 식이다.
“가장 가까운 항성계는… 일단 3광년 정도인가.”
“그렇습니다. 그 외에 10광년 내의 거리에 있는 항성계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봤습니다.”
“좋아. 훌륭하군.”
처음에는 상당히 버벅거렸지만, 규설과 힐리에타도 이제는 제법 비서 같은 느낌이다. 아직 제랄딘이나 요안나 만큼 숙련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경험의 영역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보호와 균형은 그렇게 형진이 비서들과 대화를 나누며 일을 하고 있는 중에도 그의 무릎에 올라앉은 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모습으로 일을 하는 것이 형진에게도 비서들에게도 영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이것도 나름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과연. 인간은 적응하기 마련인건가. 물론 형진은 이미 인간을 벗어나 신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저기요.”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보호와 균형은, 비서들이 결재를 마친 서류를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가만히 형진에게 말을 걸었다.
“응? 왜?”
이제 그만 무릎에서 내려오려는 건가 싶어 친근하게 물어보았으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외의 것이었다.
“저도 비서 할래요!”
“뭐?”
“푸흡!”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집무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희망과 생명은 보호와 균형의 폭탄 발언에 마시고 있던 차를 뿜어내고 말았다.
“아니, 저기… 그러니까…”
형진은 난처해하며 웃음을 지었지만, 보호와 균형은 의외로 완강했다.
“저도 할 거에요. 본신이 안 된다면 저도 새로 비서 아바타를 만들게요. 네?”
“…”
따로 물어 보지 않더라도 보호와 균형의 사고방식은 너무나도 뻔했다.
형진은 바쁘다. 그래서 그의 일을 보조할 비서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도 일손이 부족하다. 게다가 이제는 다른 우주와의 전쟁도 시작되었다. 전쟁이 지속되면 더욱더 일이 많아질 것이다. 일이 많아진다는 건 비서도 더 많이 필요하게 된다는 뜻. 그렇다면 자신 역시 비서가 되자. 그러면 더 많이 형진과 함께 있을 수 있을 테고. 만만세!
“아무리 그래도 여신이 직접 비서 역할을 맡는 건… 신도나 추종자들의 이목도 있고.”
비록 주신이 되기는 했다지만 그것이 신들 간에 어떤 식으로든 계급을 공식화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엘리시온에 속한 신들의 대표자라는 느낌일 뿐이니까.
물론 명목상의 일이고, 실제로는 이미 자본주의 사회처럼 신들의 사회에도 교단의 크기라든가 지닌 바 공헌도의 양으로 인해 암묵적인 계급이 만들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암묵적으로 그런 것이 통용되는 것과 공식적으로 계급을 구분 짓는 건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런데 주신의 비서로 여신이 떡하니 들어서게 된다면? 본인들은 어떨지 몰라도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이것을 수직적인 관계로 이해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만에 하나 엘리시온의 신들 가운데 불만을 지닌 자가 나와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면서 여러 가지 복지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중인데, 이런 식으로 빌미를 만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보호와 균형도 나름의 논리는 있었다.
“왜요? 공포와 죽음님도 비서 일 하고 있잖아요.”
“풉!”
희망과 생명의 추태를 보면서 빙긋 웃고 있던 공포와 죽음은 갑작스러운 그 말에 마찬가지로 마시던 차를 뿜어내고 말았다.
“그거야… 원래는 제랄딘이 공포와 죽음의 아바타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은 업무를 이들에게 인계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그럼. 당신 모르게 새 아바타를 만들어서 유혹하면 받아주신다는 뜻인가요?”
“…”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지 모를 일이긴 하지만, 된다고 하면 바로 얼씨구나 하면서 새로운 아바타를 만들 것 같은 기세다. 예전 같으면야 아바타 만들 공헌도도 없어서 쩔쩔 매는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보호와 균형도 제법 교단이 커져서 새 아바타를 만들 비용 정도는 쉽게 지불할 수 있다.
“흠…”
보호와 균형은 별로 떼를 쓰는 일이 없지만, 한번 마음을 먹으면 좀처럼 생각을 돌리지 않는 고집도 있다. 형진을 곤란하게 만들었다가 괜히 미움이라도 받으면 어쩔까 싶어 꾹꾹 억누르다가 이번처럼 한계 상황에 도달하게 되면 눌러 참았던 것들까지 왈칵 쏟아져 나오는 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되돌릴 마음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에 형진은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는 믿고 맡길 만한 이가 하나라도 더 늘어나면 좋은 일이다. 당장 교두보만 확보한 상태지만, 이대로 점령지가 확대되면 현재의 상태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적어도 왕성에 남아서 그의 일을 돕고 있는 제랄딘과 미엘, 하엘과 비슷한 수준의 역할 분담이 점령지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형진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좋아.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해.”
“정말요? 고마워요!”
단숨에 허락해 버리자 보호와 균형은 기뻐하며 그의 목에 와락 매달렸고,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던 희망과 생명은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무슨 생각이야! 그걸 그렇게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
하지만 형진은 자신의 품에 안겨서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엉엉 울기까지 하는 보호와 균형을 다독이며 대답했다.
“뭐… 안 된다고 했다가 정말로 엉뚱하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연기하기라도 하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이고, 기왕 할 바에야 확실하게 옆에 두고 지켜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거야… 그렇지만.”
확실히 여기서 안 된다고 했다간 보호와 균형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 부분은 분명 이해 못할 일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물론 나도 조건이 있어. 본신은 엘리시온이나 왕성에 있을 것. 일을 돕는 건 아바타만으로. 그리고 아바타로 비서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여신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아야 하고, 또한 개인적 친분을 이유로 업무에 태만하지 않을 것. 이렇게 네 가지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해.”
“할게요! 그 정도 조건 전 얼마든지 지킬 수 있어요!”
형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보호와 균형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필요하면 계약이라도 하자는 말까지 덧붙였다.
“뭐… 계약까지 맺기는 그렇고. 아무튼 약속해줄 수 있겠지?”
“네! 물론이죠!”
“됐어. 그럼 뚝.”
“뚝!.”
형진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방긋 미소를 짓는 보호와 균형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바보 같이. 그 정도 일에 이렇게 울어버릴 건 뭔지.
하지만 예상 외의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커흠. 그런 거라면… 나도…”
“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희망과 생명마저 비서를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당신도?”
“왜? 뭔가 문제라도? 나도 그 정도 조건은 지킬 수 있거든?”
“…”
형진을 둘러싼 채 주신의 옆자리를 노리며 알게 모르게 암투를 벌이고 있는 여신은 모두 셋. 그 중 둘이 비서라는 직책으로 그의 옆자리를 또다시 꿰차게 되면, 남은 것은 오직 그녀 뿐이다. 제랄딘이야 원래 그랬다고 치고 넘어갔지만, 이제 보호와 균형까지 그런 위치를 손에 넣는 걸 뻔히 앉아서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다.
“괜찮겠어? 일이 많을 텐데.”
“이래봬도 나 역시 교단과 재단 양쪽을 다 살피고 있는 중이라고.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요즘 네가 대리자 역할을 소홀히 하고 있는 동안 그걸 다 보살피고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해?”
“그거야 뭐…”
따지고 보면 희망과 생명은 여신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지구에서 최정상의 여배우로 군림한 바 있다. 단순히 여배우로서 연기에만 전념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주위에 모여든 이들을 이끄는 일까지 했고, 최근에는 희망과 생명의 재단을 만들어서 미라지 코어가 직접 나설 수 없는 일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책임감이 부족해서 그렇지, 단순히 업무 능력만이라면 그녀 역시 결코 떨어지지 않는 능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뭐… 할 수 없지. 마음대로 해.”
“그럼 잘 부탁해. 흠흠. 그럼 새 아바타는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야 하나.”
한쪽에서 업무에 전념하고 있어야 할 규설과 힐리에타의 얼굴은 그들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제랄딘과 요안나라는 상사가 없는 곳에서, 위험한 전쟁터이긴 해도 이제야 겨우 기회를 잡는 건가 싶었는데 난데없이 여신들이 난입해 버린 것이다. 이래서야 과연 언제 형진과 핑크빛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그야말로 암담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겨진 시련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나도.”
역시나 한쪽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공포와 죽음 역시 그렇게 나선 것이다.
“무슨 소리야! 넌 이미 제랄딘으로서 비서 일을 하고 있잖아. 설마 새로운 아바타를 또 만들겠다고?”
희망과 생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공포와 죽음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럴 리가. 이미 있는 아바타를 활용하기만 해도 되는데.”
“뭐?”
“아란.”
“하, 하지만 그녀는 시녀장으로서의 일도 있고 아이들도 돌봐야…”
“그거라면 포트니아 테론이 왕성에 머물기로 했으니까 믿고 맡길 수 있겠지.”
공포와 죽음은 그렇게 희망과 생명의 말에 답하고는 형진을 바라보았다.
“허락해 줄 거지?”
“…”
달리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안 된다고 했다간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 게다가 아란이라면 방금 전에 내건 조건에도 딱 들어맞는다. 무엇보다도 죄다 비서로서는 신참인 마당에 중심을 잡아줄 인원 하나 정도는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
결국 형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마음대로 하라고 답할 수 밖에 없었고, 설마 싶은 마음으로 대화를 듣고 있고 규설과 힐리에타는 그대로 책상에 얼굴을 처박아 버렸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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