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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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토너먼트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장비를 착용한 형진은 은신과 잠행으로 몸을 숨긴 뒤 별채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잠시 기다리자, 차례로 제랄딘과 미엘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찍 나오셨네요.”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요.”
“그래요?”
“일단 오늘 만든 분량을 먼저 넘겨 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미엘이 의뢰를 등록하자 형진은 그것을 선택했고, 그와 동시에 인벤토리에 담겨져 있던 신형 전투식량이 그녀에게로 넘어간다.
“수고하셨어요. 만만치 않은 양이었는데, 정말 대단하세요.”
“림 녀석이 합류한 덕분이죠. 역시 가사의 요정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더군요.”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제랄딘과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뒤늦게서야 크루그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의뢰 수행에 참여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카트린이 잠을 설쳐서요. 요즘은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곁을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내막을 모르는 형진은 그런가보다 했지만, 그렇지 않은 제랄딘과 미엘은 혹시 자신들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오늘 있었던 오찬 덕분에 낯을 가리는 것이 좀 나아진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낯선 이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일 자체가 부담이 아니라고 확신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크루그는 그런 제랄딘과 미엘의 기색에 쓴웃음을 지었다.
“누나들 때문은 아닐 거에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고질병 같은 거니까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아저씨나 누나들을 만나면서 많이 나아진 것만은 분명하니까.”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인해 크루그가 빠지고 형진 혼자 아리따운 아가씨 둘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럼 이번엔 크루그님 대신 제가 의뢰를 확인할게요.”
“부탁드립니다.”
미엘이 곧바로 의뢰를 확인했지만, 그제처럼 바로바로 의뢰를 선점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까운 곳의 수배 의뢰 등은 이미 그제 싹쓸이를 하다시피 했고, 그렇게 의뢰 자체의 수가 줄어들자 경쟁이 심해지면서 수도 라야에 속한 집행자들에게 수행이야 어찌되든 일단 선점해두고 보자는 식의 분위기가 생긴 것도 문제였다.
“간단한 의뢰들은 이미 선점이 된 것 같네요. 그래서 남은 건 좀 귀찮은 의뢰들 뿐인데, 이건 어떨까 싶어요.”
미엘이 고민 끝에 골라낸 의뢰는 다름 아닌 탐색 의뢰였다.
탐색 의뢰는 크게 인물 탐색과 물품 탐색으로 나뉜다. 어느 쪽이든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 목적인데, 의뢰 내용에 따라 찾아낸 인물의 위치 정보만을 확인하는 것으로 의뢰가 끝나는 경우도 있고, 해당 물품을 습득해야만 끝나는 경우도 있다.
수배자들의 위치 확인 같은 것도 이런 식의 의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물 탐색의 경우엔 아직 전문적으로 수배자를 상대하기 어려운 하급 성도들이 많이 수행하는 의뢰다.
그러나 물품 탐색의 경우엔 난이도가 상당히 높아진다. 인물 탐색도 결코 쉬운 의뢰는 아니지만, 물품 탐색은 작은 단서로부터 시작해 해당 물품을 찾아내야 하는데, 단순히 잃어버린 물건 찾기 정도가 아니라 던전에서 죽은 동료의 유품 같은 것을 찾아서 꺼내 와야 하는 경우도 있어서 단순히 누군가를 죽이면 끝나는 의뢰보다 훨씬 과정도 복잡하고 중간에 마주쳐야 할 위험의 수준도 높은 편에 속한다.
“저도 탐색 의뢰는 별로 해본 적이 없어요. 난이도도 있고, 오래 의뢰에 집중할 수도 없다보니. 하지만 이번엔 진님이 있으니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그렇다. 미엘이 굳이 이 귀찮고 어려운 의뢰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할만한 의뢰가 없어서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겐 귀찮고 짜증나는 의뢰일 수도 있지만, 거의 신기에 가까운 탐색 능력을 지닌 형진에게는 오히려 적격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일단 의뢰 내용을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군요.”
[물품 탐색] -시민으로부터 물품 탐색의 의뢰가 들어왔다.-대상: 홍염의 인장 반지
-설명: 대장장이 길드의 신물로 알려진 반지이다. 붉은 빛을 발하며, 이름처럼 불의 기운을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수도 북쪽 야산에 위치한 동굴곰의 집이라 불리는 거대 동굴 안에서 잃어버린 것으로 추정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제한계급: 일반성도
-보수: 바이겔 기념 금화 10개, 팩션 공헌도 2000. 블리츠소드.
(주의) 동굴 내에서 간혹 동굴곰이나 후크웜이 출몰합니다. 돌발적인 전투상황에 대비하십시오.
“얼…”
탐색 의뢰라고 하길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어지간한 수배 의뢰 몇십 개를 합친 것 이상의 보상이 주어져 있다. 금화 열 개에 팩션 공헌도 이천이라니.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물품 보상까지. 정말 눈이 튀어나올 정도다.
형진이 탄성을 터뜨리자, 제랄딘이 설명을 보충했다.
“이 의뢰… 수도 인근에서는 꽤 유명한 의뢰에요. 벌써 잃어버린 것이 오십년도 전의 일이고, 많은 모험가들이 도전했지만 결국 실패해서 집행자에게까지 의뢰가 넘어오게 되었죠. 처음에는 보상이 이 정도로 많지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실패가 거듭되다보니 점점 액수가 늘어나서 지금처럼 되었어요.”
“그럼 쉽지 않겠는데요.”
수도 인근이니 어지간한 괴물 같은 건 대부분 토벌이 되어 있는 상황. 동굴곰이나 후크웜의 출몰 가능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경우엔 그런 위험요소보다 탐색 자체의 난이도가 너무 높은 탓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게다가 오십년 동안 그렇게 찾아 헤맸는데도 못 찾았다면, 차라리 이미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어딘가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확실히 공헌도 이천은 절로 군침이 도는 보상이다. 두 배 보너스가 적용되면 무려 사천. 그제 그렇게 많은 의뢰를 수행했어도 이백 정도 밖에 벌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그런 식으로 이십일 동안 꼬박 의뢰에 매진해야 얻을 수 있는 보상인 셈이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강렬한 불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 사항은 이 반지를 찾기 위해 동굴을 뒤졌던 자들도 모두 염두에 두었을 터. 그렇다면 역시 불의 기운이 제대로 발산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한다.
“으음… 고민이군요.”
어차피 다른 의뢰를 선점하기 힘든 상황이니, 하룻밤 정도 투자해 본다 치고 대박을 노릴 것인가. 아니면 그냥 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차라리 다른 지역의 의뢰를 받아보는 것이 나을까.
잠시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세 사람의 시야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특별 의뢰 ‘토너먼트’가 도착했습니다. 참가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응?”
“이건?”
특별 의뢰라니. 뜬금없이 나타난 메시지에 형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이게 뭐죠? 특별 의뢰 토너먼트?”
“진님에게도 떴어요?”
“네.”
형진의 대답에 제랄딘과 미엘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무래도 어제 일 때문인 것 같네요.”
“어제 일이라면?”
“폭력배 놈들과 싸운 일이요.”
미엘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간단하게 토너먼트라는 이름의 특별 의뢰에 대해 설명했다.
토너먼트라는 말 자체는 그 이름대로 승자전을 뜻한다. 이번에 수도에서 열리는 어전 토너먼트처럼, 승자가 다음 경기로 나아가 결승까지 이르는 경기 방식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의뢰 이름으로 쓰이게 되면, 이것은 신들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그 추종자들이 겨루는 대리전을 뜻하게 된다. 지금은 그런 경우가 적지만, 과거에는 여러 신들이 한 가지 문제를 놓고 의견 충돌이 있을 경우 추종자들을 내세워 승자의 뜻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토너먼트라는 이름은 이때의 경기 방식이 아예 그 과정 전체를 이르는 단어로 변질된 경우다.
“뒤끝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폭력배 놈들이야 그렇지만, 그들이 모시는 신이라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문제니까요. 자신의 추종자가 지키는 왕궁이 뚫린 것도 모자라 패배까지 했으니. 아니면 일대 다수로 싸운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끙.”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일대 다수라고는 해도 형진은 싸움 자체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미엘은 결계를 여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전투에 참여했던 건 크루그와 제랄딘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제랄딘 혼자 싸웠다고 봐도 무방하다.
“혹시 거부할 수도 있는 겁니까?”
그 말에 제랄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능하긴 하지만, 그 경우엔 공포와 죽음께서 별로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네요. 이건 엄연히 신들의 상호 동의하에 적용되는 시합이거든요.”
예를 들어 얼마 전에 강림을 저지한 미친놈이 그 일에 불만을 품고 토너먼트를 제의해도 공포와 죽음께서 거절하면 이런 시합은 성사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건 곤란하군요.”
공포와 죽음께서는 분명 세심하게 추종자를 보살피는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그 이름이 지닌 무게를 생각하면 분노했을 때의 파급효과도 상당하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자칫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호감도가 단숨에 날아갈 수도 있다. 어떤 직장이건 간에 사장한테 찍혀서 좋을 일은 없는 법.
“오히려 진님에게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어요. 패배하더라도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니, 다른 신의 추종자들과 전투 경험을 쌓기에도 좋거든요. 토너먼트가 열리는 장소는 우리가 사는 곳과는 다른 세계라서 현실 시간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좋은 점이죠. 게다가 이기면 공포와 죽음께서 그에 걸맞은 포상을 해주실 테고.”
듣고 보니 제법 그럴 듯 하다. 다른 이들은 지닌바 실력이나 명성이 있으니 심적으로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형진의 경우엔 누가 봐도 초짜이니 지더라도 큰 부담이 없다. 목숨을 건 싸움이라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다면 강자들과의 실전은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형진에게는 싸울수록 강해지게 만들어주는 라이언하트라는 스킬도 갖춰져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참여하도록 하죠.”
“잘 생각하셨어요.”
형진은 곧바로 의뢰를 수락했다. 그러자, 일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과 함께 그의 모습은 한줄기 빛으로 화해 어디론가 이동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온통 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텅빈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눈이 부시거나 한 것은 아니고, 단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고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그런 식의 공간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저씨랑 누나들도 오셨네요.”
도착하기가 무섭게 크루그 역시 그들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까지 온 걸 보니 역시 어젯밤의 일이 원인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뒤이어 반대편에도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상하다. 흐릿한 것이 상대의 외모나 성별 같은 것을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모습이다. 그렇게 나타난 인원수는 모두 다섯 명.
[모든 참가자가 도착했습니다. 공포와 죽음 측의 인원이 적은 관계로, 신뢰와 헌신 측에서는 참가할 인원을 선별해 주십시오.]다시 메시지가 나타났다. 형진은 그것을 보며 미엘에게 물었다.
“원래 저렇게 보이는 건가요?”
“네. 우리 쪽의 모습을 보고 거기에 맞는 사람을 고른다거나 하는 식의 꼼수를 막기 위해서죠.”
“아하.”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다시 메시지가 나타났다.
[경기 방식은 다음과 같이 합의되었습니다. 각각의 인원이 상대와 한 번의 전투를 벌이고, 모든 인원의 전투 결과를 합산하여 승자가 많은 쪽이 승리하게 됩니다. 잠시 뒤, 전투가 시작됩니다. 참가자 여러분들은 준비해주십시오.]한 사람씩 나가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단숨에 모든 인원이 각자의 상대와 전투를 벌이는 방식인 모양이다.
메시지를 확인한 형진은 급히 인벤토리에서 음식을 꺼내 나누어 주었다. 미엘은 다시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이들과는 달리 자신에게는 특제 요리가 건네지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감사의 뜻을 표하며 얼른 그것을 섭취했다.
“진님, 져도 괜찮으니 마음껏 싸워보세요.”
“걱정 마세요. 저희들이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무리하진 마시고요. 아저씨.”
“알겠습니다. 여러분도 건투를 빕니다. 그리고, 형이라니깐!”
그렇게 서로를 격려하고 나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형진은 다시 한줄기 빛과 함께 한 번 더 어디론가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