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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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토너먼트
“오빠! 오빠!”
“알았어. 카트린.”
제랄딘과 미엘,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 온 시녀 때문에 숨죽인 듯 말문을 닫고 있던 카트린이었지만 이 상황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든지 얼른 크루그를 향해 손을 뻗으며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고, 크루그는 얼른 그녀를 안아 올려 면을 집기 쉬운 위치를 선점했다.
예상치 못한 오누이의 그같은 움직임에 제랄딘과 미엘은 씩 웃고는 오누이 주위에 자리했고, 권력서열에서 밀려난 시녀들은 아래쪽에 자리를 잡을 수 밖에 없었다.
“림, 면 준비 끝났으면 가지고 오고, 유아 너도 그거 넘겨주고 끼어들어. 면은 내가 내려 보낼테니.”
“네? 하지만…”
“얼른.”
“알겠습니다.”
곧바로 면 삶는 일을 끝낸 림이 후다닥 허공을 날아오고, 유아는 역시 제랄딘과 미엘이 자신들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그럼 내려갑니다.”
형진은 스스로 만든 젓가락으로 면을 한웅큼 집어 졸졸 흐르는 물줄기 아래로 내려 보냈다.
“와아!”
“온다!”
“아가씨, 밀지 말아요.”
“미안, 하지만 이것만은 나도 양보할 수 없어.”
마치 워터슬라이드를 타듯 물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오색의 면발을 잡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다. 가장 먼저 카트린이 포크를 휘둘러 면발을 건져냈지만, 아쉽게도 반 이상이 비껴가며 아래로 흘러내려갔고, 이것들은 모두 제랄딘과 미엘, 그리고 유아의 포크에 의해 포획되었다.
“…”
뒤쪽에서 포크를 든 채 대기하던 시녀들은 앞에 선 이들이 건져낸 국수를 맛있게 흡입하는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니 침만 꼴딱꼴딱 삼켜야만 했다.
고문이다, 이건. 차라리 그냥 뒤에서 구경하는 거라면 몰라도, 포크와 장국까지 모두 쥐어진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먹는 것만 지켜봐야 하다니, 이런 고문이 세상에 또 있을까.
울 것 같은 시녀들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더니 그녀들을 손짓해 불렀다.
“거기서 그러지 말고 이리 가까이 오세요.”
“네? 하지만…”
시녀들은 형진의 말에 당황했지만, 이내 제랄딘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의 뜻을 비추자 용기를 내어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형진은 사람 수를 감안해서 좀 더 많은 양의 국수를 흘려보냈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국수를 집은 것은 카트린. 하지만 역시나 포크의 한계 때문인지 대부분의 국수들은 그대로 아래로 흘러내려가 버렸고, 곧바로 이것을 노리는 야수들의 난투가 시작되었다.
“앗! 반칙이에요!”
“그런 게 어딨어요. 먼저 먹는 게 임자지.”
“에에엣!”
“아하하하!”
천연덕스럽게 유아의 국수를 강탈하는 제랄딘의 모습에 미엘은 물론이고 다른 시녀들 또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아!”
“아…”
“맛있어?”
“응, 맛있어.”
카트린은 자신이 집어낸 국수를 오빠인 크루그에게 먹여주며 함박웃음을 지었고, 크루그 역시 마주 웃었다. 림은 림대로 국수 하나를 호로록 빨아 먹고는 뺨을 발그레 하니 붉히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고작 음식 하나로 이렇게 모두가 즐거워질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단순히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작해야 국수를 장국에 찍어 먹는 것 뿐인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입에 들어가는 순간 탱글탱글하고 쫄깃한 식감이 혀를 휘감는다. 달콤 짭짜름하면서도 마치 방심한 허를 찌르듯 순간 톡 쏘고 사라지는 매운 맛은 또 어떠한가. 그것만으로도 절로 행복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알 수 없는 마력에 빠져 버린다.
이번에 처음 제랄딘을 수행하게 된 시녀들은 그제서야 이전에 이곳에 왔다간 시녀들이 입을 꾹 다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웃으며 면을 흘려보내고 있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호감에 화들짝 놀랐다.
이래서였다. 이래서 앞서 다녀간 시녀들은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이 분위기와, 이 즐거움과, 이 맛과, 그리고 이 가슴 떨리는 느낌을 독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에.
떠들썩하던 정오의 만찬은 마지막 면발이 심기일전한 미엘의 포크에 걸려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 끝을 맺고 말았다.
“모두 즐거우셨습니까?”
“네에!”
어쩌다 보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여자다. 남자라고는 형진과 크루그가 고작. 형진 역시 중간에 유아가 빠져 나와 자신 몫의 국수를 장국에 찍어서 입까지 배달하는 서비스를 해준 덕분에 넉넉히 식사를 마칠 수가 있었는데, 유아는 그 닭살 돋는 모습에 모두가 야유를 보내는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형진은 식사가 끝나자 제랄딘과 미엘, 그리고 크루그에게 말했다.
“우리 집 바보 메이드들이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아무래도 오늘은 의뢰 수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여러분들끼리 다녀오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딱히 저는 공헌도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전 이미 넘칠 만큼 쌓여 있으니 상관없어요.”
제랄딘과 미엘이 그렇게 대답하자, 크루그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아까 슬쩍 찾아보긴 했는데, 우리들 때문에 경쟁이 붙었는지 수도 인근의 의뢰는 불티나게 선점되고 있더군요. 아깝긴 하지만 며칠 더 두고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형진이 아쉽다는 표정을 짓자, 문득 제랄딘이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낮에는 제가 좀 움직이기 힘든 게 사실이에요. 차라리 이따가 밤에 의뢰를 수행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럼 저도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곳에서라면 모를까, 왕국 최고 가문의 금지옥엽이다보니 예정 외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럴 때 집을 비웠다가 그 내용이 밖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예기치 못한 구설수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낮에는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렵다. 이런 이유 때문에 수도에 도착하고 한동안 함께 움직이지 못한 것이 제랄딘은 상당히 아쉬웠던 모양이다.
“피곤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보다는 오히려 진님이 걱정이죠. 요리도 하시고, 다시 밤에 의뢰도 하셔야 하니.”
“도핑이 있으니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도요.”
어쨌든 그들은 해가 지면 다시 모이기로 의견을 모았고, 제랄딘과 미엘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시녀들을 거느리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자, 그럼 이제 바보 메이드들이 사고친 걸 뒷수습할 차례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산처럼 쌓인 식재료들 앞에 선 형진은 인벤토리에서 음식 하나를 꺼냈다. 이름하여 요리사를 위한 무한의 리타이어 불가능 풀 도핑 세트다.
“딸꾹!”
유아는 그 음식의 모습과 향기를 느끼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 그녀의 영혼 깊숙이 각인된 저 음식의 저주받을 효과는 너무나도 강렬하다.
-그건 뭐죠?
형진은 음산하게 웃으며 궁금증을 표하는 림에게 대답했다.
“요리사로서의 진정한 나를 일깨워 주는 음식이지.”
-와아… 스승님의 비기인건가요?
“그런 셈이다. 제자여. 도전해 볼 용기가 있는가?”
형진의 말과 유아의 반응에 뭔가 이 음식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떠올린 림이었지만, 결국 이 귀여운 요정은 자신의 호기심에 굴복하고 말았다.
-도전하겠습니다!
“훌륭하다. 과연 나의 제자! 그럼 이 음식을 먹어라! 그리고 전율하라!”
-오오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용기백배한 상태로 형진이 건네준 음식을 먹었다.
순간, 림은 자신의 몸 안에서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용솟음치며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고, 이내 그 힘으로 인해 자신의 몸이 무한정 커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조그마한 요정의 몸은 어느 틈엔가 수도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커졌고, 마침내 하늘 위의 구름을 뚫고 올라가 하늘 그 너머의 세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빠졌다.
도대체 이 힘은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이 음식은 무엇이란 말인가!
림은 전율했다. 진정한 나를 일깨워 주는 음식이라고 했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이라면 정말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최고로 High한 기분이다아아!
“뚝!”
-뚝.
하지만 그런 림의 각성은 의식을 뚫고 들어온 형진의 한 마디에 마치 조건 반사처럼 반응하며 멈춰서고 말았다.
“그만 울어. 바로 시작한다. 준비해!”
-네넷!
림은 그제서야 자신이 음식의 효과에 도취되어 감격의 눈물을 쏟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쉬움을 느꼈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힘은 그대로였지만, 만약 그 상태가 계속되었다면 혹시 지금껏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어쨌든 형진이 꺼내든 요리사를 위한 무한의 리타이어 불가능 풀 도핑 세트의 위력은 대단해서, 도대체 해결할 수 있을까 싶었던 식재료를 채 오후 시간이 다 가기도 전에 전투식량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성공했다. 특히나 요리 그 자체보다도 번거롭고 귀찮았던 포장을 림이 맡으면서 작업시간이 대폭 감소한 것이 매우 주효했다.
예상보다 요리가 빨리 끝나자, 형진은 이따가 밤의 활동을 위해 휴식도 취할 겸 별채의 서재에서 이 세계에 전해지는 서적을 탐독하기로 했다.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계획은 실패였다. 채 몇 장 읽기도 전에 지독한 만연체로 기술된 서적들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채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주인님. 일어나세요.”
“응?”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이 되어서야 형진은 자신을 깨우러 온 유아에 의해 눈을 떴다. 이럴 수가. 나름 십수년이 넘는 학업 생활로 아무리 지루한 책이라도 버티고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지구력 쯤은 얻었다고 생각했건만, 이 세계의 책은 그런 형진의 능력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제서야 형진은 또 하나를 깨달았다. 주정뱅이가 남긴 책들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임에 대한 배려로 가득 차 있었다. 솔직히 그 책들의 내용도 간결체라고 하기는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최소한 몇 장 넘기지도 못하고 마치 수면 마법에 빠진 것처럼 강제적인 잠에 빠져들도록 만들지는 않았었다.
“끙.”
형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둔 후, 주방으로 내려가 마치 둥지에서 어미새를 기다리는 아기들처럼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식구들에게 맛있는 저녁 식사를 선사한 뒤 밤의 활동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뒤뜰에서 이제는 버릇이 되어 버린 매크로 수련을 하고 있는데, 문득 유아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건넨다.
“혹시… 그거 저도 배울 수 있나요?”
“뭘? 이걸? 왜?”
“그냥… 운동이 좀 될까 싶어서요.”
“…”
그동안은 어떻게 노동을 통해 살이 찌는 것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무지막지한 노동력의 소유자인 림이 등장하는 순간 그것도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더 이상 칼로리를 소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노동 활동을 유지하기가 곤란해진 것이다.
유아의 말에 형진은 호기심이 일었다. 과연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도 매크로 수련이 효과가 있을까 하는 그런 호기심 말이다.
“좋아. 하지만 이거 쉬워보여도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니까 명심해.”
“알겠습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유아에게 매크로 수련을 가르쳐 봤지만, 딱히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뭐랄까.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초반에 폭발적인 능력치 증가가 일어나는 느낌이 없다고 해야 하나. 잠시 지켜봐도 별 다른 변화가 없음을 확인한 형진은 적당히 하고 일찍 자라는 말을 남긴 채 땀으로 젖은 몸을 씻으러 안에 들어갔다.
하지만 형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열심히 매크로 수련을 하고 있는 유아가 어느 틈엔가 무아지경 비슷한 상태로 빠져 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날의 일로 그저 맹하고 둔하기만 했던 바보 메이드 유아가 새로운 능력에 눈을 뜨게 되리라는 사실도 그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작가: 임플란트 광고를 볼때마다 마음 속으로 무다무다무다를 외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하지. 참 나쁜 광고야. 그렇지 않은가?
주인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