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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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통과하자, 마치 우주와도 같은 공간에 놓여져 있는 통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카스툴은 그곳을 지나쳐 끄트머리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앞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이런 모습으로 만든 존재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왔군. 일단 앉지.”
그가 손을 가만히 내뻗자, 카스툴의 눈앞에 단조로운 형상의 의자 하나가 놓여진다. 잠시 그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스툴은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카스툴이 의자에 앉는 모습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던 형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예상외의 상황을 지켜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야. 나는 틀림없이 자네가 그 음식을 먹을 거라고만 생각했거든.”
“그렇습니까.”
“하지만 덕분에 일이 아주 편해졌어.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데 들어갈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
카스툴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진다. 물론, 그런 그의 표정은 형진이 보기엔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역시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의 표정은 이래저래 알아보기가 어렵다.
“한 잔 하겠나?”
“주십시오.”
형진의 제안에 카스툴은 의외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하기야, 이제 와서 음식이든 음료든 거부할 이유가 없긴 하다.
“어떤 걸 좋아하나. 과즙? 아니면 술? 그것도 아니면 차?”
클로리스인에게 전해 받은 정보를 통해 이 우주에도 그러한 음료들이 존재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파충류의 외형을 지닌 이 종족들이 어떤 음료를 즐기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서로 알아가야 할 부분이 아직 많이 남은 것이다.
“차로 주십시오.”
“알겠네.”
형진의 대답과 함께, 공간이 열리며 아란이 티세트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형진이 손을 한번 내저어 보이자, 카스툴과 그의 사이에 고풍스러운 느낌의 탁자 하나가 놓여진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험이 있는 차다. 당장 식사를 내놓는 건 아무래도 좀 그럴 것 같아서. 대신 간단한 음식을 함께 내오도록 했으니, 마음껏 즐기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신전의 최고 책임자인 크츄카에게 그런 일을 해놓고서 바로 형진과 식사를 함께 하는 건 여러모로 미묘한 느낌이라 나름대로 배려를 한 셈이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다과를 보니 카스툴은 다시 한 번 입안에 군침이 도는 것을 느꼈다.
일단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은은한 꽃향기가 몸 안을 휘감아 도는 듯한 착각이 느껴진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따뜻해지고, 다소 긴장되었던 몸이 이완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뒤이어 쿠키로 손을 가져간다. 아삭한 식감과 함께 혀끝을 감싸는 달콤함이 일품이다. 한 잔의 차가 정신을 덥혀주었다면, 이 달콤한 과자는 신체를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역할인가보다.
“훌륭합니다. 아주 맛있군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카스툴에게 대답하며 형진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아란은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방을 빠져 나갔다.
그런 아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스툴은 문득 생각 난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봐.”
“어째서 저입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쩐지 좀 뜬금없게 느껴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당장의 그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묻고 싶은 내용이기도 하다.
“글쎄. 우선은 가장 강했으니까. 게다가…”
“게다가?”
“자네의 검은 비늘이 꽤 멋져 보였거든.”
“…”
카스툴은 한 번 더 쓴웃음을 지었다. 빛의 신을 섬기는 자가 되고 난 뒤, 자신의 검은 비늘은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곤 했었다. 사방을 밝히는 빛의 사도로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지만 그것이 이번에는 다른 신의 마음에 드는 이유가 되다니, 세상 일이란 정말 모를 일이다.
“궁금증은 풀렸나?”
“네.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물을 차례로군. 자네의 이름을 듣고 싶은데.”
“카스툴. 보닉 종족의 일원인 카스툴이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이러한 이름 뒤에 빛의 신을 섬기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이제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치장하는 행위는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름도 아주 멋지군. 뭐랄까. 듣는 것만으로도 강해보인다고 해야 하나.”
“과찬이십니다.”
“상대의 이름을 들었으니 다음은 내 차례겠지. 나는 밤의 신이다.”
형진의 말에 카스툴은 조금 의외라는 기색을 보였다.
“밤… 이었습니까.”
“왜? 다른 거라고 생각했나? 어둠이라든가, 악마라든가 그런 식의?”
“그, 그게…”
마치 속을 읽은 것처럼 말하는 모습에 카스툴은 살짝 당황해 버렸고, 그것을 지켜보던 형진은 껄껄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보닉이라는 종족과 이렇게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지만, 자네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군. 하하하하.”
“죄송… 합니다.”
“아니야. 그럴 것 까지는 없고. 충분히 오해 살 만한 짓을 했으니까.”
“…”
사실 어둠이든 밤이든 카스툴에게는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느낌의 단어다. 그래서일까. 형진은 간단하게 부연설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도록.”
“…”
형진이 손을 내저어 보이니, 방 안은 어느 틈엔가 드넓은 우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별들이 사방에 가득 채워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끝을 알아볼 길이 없는 광활한 우주가 순식간에 사방에 가득 들어찬다.
“밤이라면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겠지만, 내가 처음 신이 되었을 때 떠오른 모습은 바로 지금과 같은 우주의 모습이었어. 그것을 보며 나는 생각했지. 이 넓은 우주를 가득 채운 밤에 대해서.”
“…”
그런가. 이 신이 가진 밤의 이미지는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빛의 신에 귀의하고 나서도 한동안 의문스러웠던 부분이 있다.
분명 빛은 어둠을 물리치는 힘을 지니고 있으나, 어째서 저 우주의 대부분은 그렇게도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것일까. 물론 그것을 다시 빛으로 채워가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의문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자네는 왜 우주가 이렇게 어두운지 알고 있나?”
“잘… 모릅니다.”
우주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고, 그 별들은 저마다 휘황한 빛을 뿜어낸다. 빛은 아무리 넓은 공간이라도 끊임없이 뻗어나가고, 사방을 채우고 있는 별의 숫자만큼 나중에는 도달하는 빛이 강해질 것이니 결국 세상 모든 곳에는 빛이 충만해야만 한다.
과거 지구에서도 이런 의문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만약 별의 분포가 일정하고 우주가 무한원까지 계속 펼쳐져 있다면 결국 이런 결과를 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이 의문은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올비스의 역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우주에 살고 있는 종족들은 드넓은 우주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모든 것을 또한 신의 섭리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지금 형진의 앞에 앉아 있는 카스툴 역시 사물의 근본을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보다, 그것을 통할하는 신의 뜻을 받드는 입장이었기에 이런 근본적인 부분에 대한 의문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카스툴은 조금 당황해 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이 직접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지는 지금의 상황 때문에.
“그건 말이야. 이 우주가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야.”
“팽창… 늘어난단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거야. 가까운 우주라면 조금 느리게, 하지만 먼 우주일수록 더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그 속도는 우리에게 닿게 될 빛에도 간섭을 일으키게 되는 거지. 이 우주가 어두운 까닭은 바로 그래서야. 계속해서 커지고, 발전해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이 어두운 우주는 바로 그러한 현상에 대한 증명인 셈이지.”
“…”
카스툴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형진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물론 빛이라는 건 참으로 대단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 세상의 어떠한 것도 빛보다 빠를 수는 없어.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빛보다 빠르게 나아가는 항해가 불가능하지.”
“그렇… 습니까.”
사실 카스툴로서는 빛에 속도가 있다는 것부터가 금시초문이다. 하기야 과학이 발달한 지구에서도 빛의 속도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고급에 속하는 분야이고, 상대성 이론 같은 것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조차 손에 꼽을 정도라고 일컬어질 정도이니 카스툴이 그런 모든 것을 한 번 듣고 이해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빛이 모든 것을 초월하거나 하지는 못해.”
형진은 그렇게 말하며 우주 공간에 위치한 하나의 천체를 카스툴의 눈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것은 우리 쪽에서는 블랙홀이라고 부르는 천체야. 너무나 무거워서,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천체지. 이름 자체는 검은 구멍이라는 의미지만, 실제로는 구멍이 있거나 한 건 아니야. 단지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 이를테면 빛마저도 도망칠 수 없는 곳이기에 이런 검은 구멍 같은 느낌으로 관측되는 것 뿐이지.”
“빛조차…”
“그래. 빛조차. 이곳에서는 시간과 공간마저 비틀리고 말아. 신인 나 역시도 이곳에 접근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정도지. 어때. 대단하지 않은가. 우주의 섭리라는 것이.”
놀라운 정도가 아니다. 만약 이런 내용을 빛의 신전에서 논했다면 대번에 이단으로 몰리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단순히 이단으로 몰려 비난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분노한 추종자들에게 사지가 찢겨 죽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정도로 파격적이고, 또한 그 정도로 강렬한 내용이었다.
“어떤가. 밤이란 것도 이렇게 보면 결국 우주의 섭리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결국 그것을 신격으로 삼고 있는 나 역시도 이 광활하고 넓은 우주의 일부일 뿐이라는 얘기지.”
“…”
카스툴은 혼란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얘기는 신의 입에서 직접 나올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유일신의 아래서 태어나고 자란 그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난 신이 되고 나서 다짐한 바가 있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도 그런 말을 했다. 처음 신이 되었을 때… 라고.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신이 되고 나서 라고. 그 말은, 설마 지금 눈앞의 이 자는 처음부터 신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는 건가.
하지만 이것은 차마 물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만약에 이것마저 사실이라면, 카스툴이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왔던 모든 것들이 단숨에 붕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존재여야 할 신이라는 개념이 그의 내부에서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카스툴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간단한 얘기야. 나는 이렇게 어둠으로 가득 찬 광활한 우주가 생명의 빛으로 가득 차기를 원하네. 그것이 궁극적으로 내가 신으로서 이루고자 하는 바인 셈이지.”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럽던 카스툴은 한 번 더 머리를 뭔가에 얻어맞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생명의 빛… ”
“맞아. 단순히 저 하늘을 밝히고 있는 태양의 빛과는 다른, 서로 다른 수많은 빛들이 하나로 합쳐져야 비로소 발할 수 있는 바로 그 생명의 빛 말이야.”
“…”
“밤이란 또한 생명이 잉태되는 시간. 때문에 나는 또한 그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 자네가 이전에 섬겼던 빛도, 나의 밤이라면 충분히 감싸 안을 수 있다는 얘기지. 지금 보고 있는 바로 이 우주처럼.”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스툴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떤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전에 빛의 섬겼던 자네가 함께 그 일을 같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 말에 카스툴은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저를…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카스툴은 본래 빛의 신을 섬기던 존재. 그리고 그 빛은 현재 이 밤의 신과 전쟁 중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아무렇게나 마구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준비했지.”
형진은 씩 웃으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건…”
느닷없이 내밀어진 종이와 그 안에 빽빽하게 씌여진 내용에 어리둥절해 하는 카스툴에게 형진은 설명했다.
“이건 고용계약서라는 거야. 자네와 나 사이의 관계를 정의함은 물론이고, 자네의 봉사에 대해 내가 줄 합당한 보상, 즉 서로 간의 책임과 의무를 규정한 문서라 할 수 있지. 물론 이런 종이 한 장으로 모든 걸 담을 수는 없겠지만, 서로간의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초석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
카스툴은 형진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손 위에 건네진 고용계약서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이것은 계약이다. 이전에 빛의 신을 섬길 때처럼 자신이 무조건적으로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여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인 셈이다. 한번 동료들에게 신뢰를 부정당한 그에게 있어, 이 계약서라는 수단은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어떻게 하겠나.”
형진의 말에 카스툴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계약… 하겠습니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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