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05
-10905
“얘기를 나눴다고?”
형진의 말에 미아는 바로 답했다.
“네. 자기가 죽어서 지옥에 간 줄 알던데요.”
“하긴. 원래 빛의 신을 섬기던 자가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공간에 덩그러니 있는 모습으로 깨어나면 그런 생각도 무리는 아니지.”
포로의 상태는 꾸준히 확인 중이었고, 몇 번 깨어난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일단은 가만히 놔두는 중이다. 아직 심문이나 다른 여타의 공작을 하기엔 상태가 너무 좋지 않은 탓이다.
“그래도 얘기까지 나눌 정도였다면 생각보다는 훨씬 상태가 나아진 모양인데.”
하지만 포로의 상태를 직접 확인한 미아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그렇다고 보기엔 아직… 나름대로 추종자들 중에서도 고위직이었던 모양이니 정신력이 강한 건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겠지. 알았어. 앞으로도 신경 써서 살펴 보도록 해.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바로 말하도록 하고.”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여기 깃털이요.”
“고마워.”
형진은 미아가 건네준 깃털을 받아들고는 조명에 그것을 비춰 보았다.
“은은한 무지개 빛이 흘러나오는 것이 그냥 봐도 꽤 고급스러워 보이네. 그렇지. 깃털 펜 같은 걸 한번 만들어 볼까?”
그렇지 않아도 어디에 쓰려고 그런 걸 가지고 오라고 했냐는 질문을 던지려던 미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깃털 펜이요?”
“그래. 빛의 신을 모시는 대성전을 격파한 것에 대한 기념으로.”
“…”
형진의 말에 미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다. 아마도 지난 전투로 인해 죽어간 생명들 때문이리라. 그들이 불쌍하다 여기면서도, 또한 그것이 형진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기에 애써 억누르는 것이리라.
형진은 그런 아내의 기색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가급적이면 나도 대화가 가장 좋은 해결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 당신도 그들의 대화를 들었을 텐데.”
미아는 그 말을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
“당신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에요. 저는 그저…”
형진은 빙긋 웃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가식이니 뭐니 하는 식의 단어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날카로운 인상의 사감 같은 모습을 하고서도 걸핏하면 놀란 꽃사슴 같은 눈망울이 되어 버리는 이 귀여운 아내에게는 그런 식의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알아. 그리고 그런 당신이기에 좋은 것이고.”
“…”
가만히 품으로 끌어당겨 머리를 쓰다듬어준 형진은 손 안에 쥐어진 깃털 가운데 상태가 가장 안 좋은 것을 세 개 정도 골라 빼놓았다.
“이것은 예정대로 지구로 보내 분석을 시키도록 하고. 나머지는 깃털 펜으로 만들어봐야겠어.”
미아에게는 단순한 기념품 정도로 말했지만, 단순한 장식품 따위에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아름다운 깃털에 형진의 실력이 더해지면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훌륭한 공에품이 탄생하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빛의 신을 스스로의 몸에 강림시켰던 자의 깃털로 만들어진 물품이라는 점이다.
대성전의 파괴로 인해 저들은 잠시 동안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행정 공백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사방에서 모여들었다가 다시 퍼져 나가는 정보의 흐름이 끊겼다는 뜻도 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꽃과 바람의 영향력이 점차로 확대되어 가고 있는 클로리스인들은 이런 혼란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비수로서 작용하게 된다.
그들은 지금까지 통제되고 있던 정보들을 비롯해, 대성전이 그 잔해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파괴되고 빛의 신이 직접 강림했음에도 불구하고 패퇴해 버린 사실을 다른 모든 지역에 퍼트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지 패전에 대한 정보를 퍼트리는 것으로 끝나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진리나 법보다 우선했던 신의 절대성이 붕괴되어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권력의 붕괴는 필연적으로 거대한 파탄을 불러온다. 더구나 지금은 그들을 다잡고 통제해야 할 대성전이 붕괴해 버린 상태. 억눌러져 있던 불만이나 욕망이 한 번에 터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인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아름다운 깃털로 만들어진 펜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물증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밤의 권능에 의해 강제개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빛의 축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 깃털로 만든 펜. 식견이 있는 자라면 보는 순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생각 난 김에 바로 만들어 볼까. 미아, 도와주겠어?”
“네. 물론이죠.”
새의 신체는 비행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다. 깃털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 내부는 마치 새의 뼈가 그렇듯이 속이 비어있다. 깃털 펜은 단순히 뾰족한 끝 부분에 잉크를 찍어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비어있는 깃털 내부에 잉크를 머금도록 만든 필기구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만년필이나 볼펜도 결국은 이 원리를 이용해 좀 더 편안하고 오래 쓸 수 있도록 만든 발명품인 셈이다.
가장 간단하게 만드는 깃털 펜은 깃털의 끝을 전용의 칼로 다듬어 펜촉 모양으로 만든 다음, 모양을 낸 깃털의 끝을 달군 모래에 담그거나 끓는 물에 삶는 등의 가공을 거쳐 완성된다. 물론 이런 처치는 견고하지 못한 깃털에 내구성을 부여하여 좀 더 오랫동안 쓰기 위한 방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형태가 망가지곤 해서 깃털 펜을 사용하는 이는 스스로 다듬는 방법 정도는 익혀 두어야만 했다.
하지만 형진이 만들고자 하는 깃털 펜은 그러한 기초적인 형태의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형태는 만년필의 그것을 유지하면서 손잡이 위쪽에 깃털을 달아 놓은, 굳이 표현하자면 깃털 장식 펜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르는 그런 물건이다.
먼저 나무 같은 것으로 형태를 만든 다음 거푸집을 만들어 금속으로 본을 떠낸다. 주물로 떠낸 형상은 매우 투박하기 때문에 일일이 갈고 깎아내는 과정을 거친 다음 상감과 같은 방식으로 무늬를 새겨 넣는다.
어지간한 실력을 지닌 장인이라도 상당한 시간을 소요할 만한 일이지만, 이미 경지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의 실력이 되어버린 형진에게 이 정도 물건을 만드는 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됐다.”
뭔가 뚝딱뚝딱하더니 순식간에 아름다운 깃털 장식이 달린 펜이 만들어졌다. 미아는 옆에서 일을 도왔으면서도 형진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 대단해요!”
“하하. 이거 쑥스럽구만.”
진심으로 감탄하는 미아의 모습에 형진은 그렇게 웃어보이고는 글씨를 써보았다. 평상시 쓰던 볼펜 같은 것과는 다른 사각거리는 필기감이 꽤 마음에 든다. 물론 제대로 길을 들여 자신만의 펜으로 만들려면 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점을 줄만 하다.
“써볼래?”
일단 시험 삼아 글씨를 써본 형진이 펜을 건네며 말했지만, 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별로…”
“그래? 하나 만들어 주려고 했더니.”
“괜찮아요. 앞으로 그분의 상태를 종종 지켜봐야할 텐데,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아마 싫어할 거에요.”
“그런가. 딱히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런 거야 들여다 볼 때 조심하면 될 일이고.”
“그렇다면야…”
어차피 깃털을 뽑아가는 장면을 들켰으니 그걸로 펜을 만들어 가지고 다닌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보다 확실하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것이 형진의 생각이었지만, 그런 자신의 생각을 미아에게 굳이 강요하거나 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좋았어. 어쨌든 시험작은 성공적이니 나머지도 만들어 봐야겠군. 도와줘.”
“네.”
곧바로 깃털 펜 여러 개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깃털 펜은 대부분 정보 공작을 위해 암약하고 있는 클로리스인들에게 보내졌지만, 특히 잘 만들어진 고급품은 비서 일을 하는 아내들의 차지가 되었다.
“고마워! 대단해. 너무 멋져!”
“어이쿠.”
의외로 이 선물을 가장 기뻐한 것은 리페였다. 만년필이라는 필기구에 익숙하지 않은 다른 이들에 비해 그녀는 이 도구가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 물건인지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 건 아니지만, 언제나 불퉁거리는 리페가 이번만큼은 볼이 빨개질 정도로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걸 보니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사실 아내들을 위한 깃털 펜은 특별한 처치가 더해졌다. 오래 써도 잉크가 내부에서 굳어 막히거나 하지 않도록 처리를 해두었고, 세공 역시 특별히 신경을 썼다. 특히 손으로 쓰다듬으면 마치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드러나는 글귀는 만년필이라는 필기구에 낯선 이들조차도 절로 감탄을 자아내도록 만든다.
“나의 성실한 비서이며 아름다운 아내, 힐리에타에게… 아아…”
힐리에타는 씌여져 있는 글귀를 읽더니 눈물마저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새삼스럽게 아내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해 버린 모양이다.
규설 역시 힐리에타처럼 드러내지는 않고 있어도 눈가가 붉어진 것이 톡 하고 건드리면 마찬가지로 울어버릴 것 같은 모습이다. 천신만고 끝에 그에게 안기긴 했어도, 정말로 여신들이나 다른 아내들과 같은 위치에 선 것인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녀들에게 있어 이 만년필은 의외의 선물이었던 셈이다.
“크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준 것뿐이야. 그렇게까지 반응하면 뭔가 지금까지 몹쓸 짓만 한 것 같아서 미안해지잖아.”
그러자 곧바로 리페가 핀잔을 준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몹쓸 짓을 한 건 맞지. 하지만 뭐… 이 정도로 성의를 보여주었으니 이번만큼은 용서해주도록 할게. 헤헷.”
“어이쿠. 이렇게 황공할 데가.”
아내들에게 준 것만큼 정성껏 만든 물건은 아니었지만, 네아의 날개 깃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깃털로 만들어진 펜을 건네받은 클로리스인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제 생각이 맞다면 이 깃털은…”
“맙소사. 그럼 설마…”
“아마도 최고 장로인 네아의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포로로 잡혔단 말인가.”
대성전의 최고 장로 네아는 단순히 빛의 신을 모시는 최고 직위의 추종자로서만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으로도 매우 유명했다. 특히 은은한 무지개 빛을 발하는 그녀의 깃털은 제발 하나라도 소장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가 의외로 꽤 많았다. 물론 드러내놓고 그런 욕심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깃털이 펜으로 만들어져 전달되자 클로리스인들은 적잖은 충격마저 느끼고 있었다.
사실 열두 종족, 아니 누에가 빠져 나가 열하나가 되어버린 빛의 신 휘하의 종족들 사이에서는 따로 클로리스인들이 퍼트리지 않았어도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우주를 다스리는 두 신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들 사이에 오간 힘은 격돌의 와중에 휘말린 별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그런 격렬한 싸움이라면 아무리 대성전을 대표하는 최고 장로라 해도 결코 살아남지 못할 터. 일반적으로 죽이는 것보다 사로잡는 것이 수백 수천 배는 더 어려운 일임을 가늠하면, 이것만으로도 이미 빛의 신과 밤의 신이 지닌 힘의 격차가 드러난 것이라고 봐도 틀림이 없는 일이다.
“혹시 위조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알마네아족의 날개깃을 가져다가 만든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물론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굳이 우리가 그걸 따질 이유가 있소?”
“과연. 그런 얘기군요.”
거짓. 그것도 아주 잘 포장된 거짓은 그것의 진위를 구별하기 위해 굉장한 수고로움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런 식의 진위를 구별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아닌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는 식으로 생각해버리곤 한다. 대성전의 최고 장로 네아를 만나본 일조차 없는 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따로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은밀하게 퍼져 나가던 소문은, 이렇게 물증까지 더해지자 마치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성전에서 다급하게 도망쳤던 장로들이 겨우 안전한 장소에 도착해서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퍼져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린 다음이었다.
그렇게 빛의 신전이 내부로부터 균열을 일으켜 서서히 쪼개져 가고 있을 때, 미처 자신이 정신을 잃은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는 상태로 다시금 네아가 깨어났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