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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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떠도 감은 것과 마찬가지로 새카만 어둠만 가득 차 있는 공간. 하지만 앞서 깨어났을 때와 지금의 상태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전에는 스스로 깨어났던 것이라면, 지금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깨워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들어요?”
일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다시 보니 확실히 뭔가 특이한 옷차림이다.
머리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통 알기 어려운 기다란 장식이 달린 머리띠를 썼다. 몸에는 굴곡은 물론이고 탐스러운 가슴골마저 확연하게 드러나는 기이한 옷을 걸쳤고, 구멍이 숭숭 뚫려서 맨살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기이한 천으로 다리를 감싸고 있다. 원활한 동작을 위해서인가 싶었지만 손목에는 의미 모를 소매 자락을 붙이고 있는 걸 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바니걸이라는 의복 문화 자체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네아의 눈에 미아의 옷차림은 뭔가 매우 많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곤히 자고 있는데 미안해요. 하지만 슬슬 음식을 섭취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
음식이라는 말을 듣자 기다렸다는 듯이 허기가 밀려든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러한 느낌을 통해 네아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인식은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자신은 누가 봐도 죽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빛의 신을 그 몸에 불러들인 것부터가 그러한 결과를 예상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네아는 자신이 어째서 살아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 소화시키기 좋은 걸로 준비해 봤어요. 잠시만요.”
미아의 말과 함께 등 부분의 매트리스가 천천히 들려지며, 네아의 몸이 살짝 기대어 앉은 자세로 바뀌었다.
“으…”
몸의 무게 중심이 바뀌자 살짝 통증이 전해져 온다. 가급적이면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의 통증이 찌릿하게 스치고 지나가자 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파요? 잠시만요.”
그 소리를 들은 미아는 허둥대며 침대의 작동을 멈추고는 권능을 발현해 통증을 잠재워 주었다.
본래대로라면 미아는 자신의 권능인 균형의 힘만을 사용했어야 옳겠지만, 형진에게 속하게 되면서 좀 더 다양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형진의 허락에 의해 그가 계약으로 묶인 신들의 힘을 빌어오는 것이기에, 신의 힘이라기보다는 일개 추종자의 것에 가깝긴 하다. 그러나 신급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다양한 힘을 쓸 수 있다는 건 의외로 꽤 쓸만한 일이고, 포로를 돌보는 일을 미아가 맡게 된 것도 그런 식으로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여러 가지 상황이라는 건 환자를 돌보는 종류의 일에 대한 것이다. 형진은 미아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그래서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충분한 대비를 해둔 상태다. 굳이 병실 안을 밤의 권능으로 가득 채워둔 것도 결국 그런 이유에서다.
“당신은… 밤의 신을 섬기는 분인가요?”
베개와 이불을 다시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네아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질문은 그녀로 하여금 적아를 식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의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네아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기이할 정도로 미아에게 별다른 적대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미아를 보며 알 수 없는 동질감 같은 것마저 느끼고 있었다.
베개의 정리를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던 미아는 뜻밖의 질문에 눈이 동그래졌지만, 이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맞아요. 저는 그분의 일을 돕고 있답니다.”
“…”
짧은 대답에 불과했지만, 네아는 기묘한 옷차림을 한 이 여성이 자신의 신을 얼마나 경애하고 있는지 여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아니다. 네아는 미아의 목소리와 표정과 다른 모든 신체의 작은 움직임을 통해 그녀가 밤의 신을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신을 사랑하다니. 신앙의 대상이라면 몰라도 명백하게 이성으로 대하고 있는 미아의 모습에 네아는 작은 충격마저 받았다.
신을 사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신앙의 극한으로서의 사랑이다. 적어도 지금 눈앞의 이 여성처럼 얼굴을 붉히며 한창 꿈꾸는 소녀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그런 식의 사랑은 아니다.
만약 네아가 미아의 정체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신이 대등한 관계의 신과 사랑에 빠진 거라면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미아는 스스로를 신이라고 소개하지도 않았고, 설마 신이 이런 식으로 포로를 돌보는 일을 직접 하고 있으리라는 발상 따위 네아는 절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신이란, 다른 어떤 생명체보다도 지고한 존재인 탓에 스스로를 희생해 강림시키지 않는 이상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접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절대적인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크흠. 일단…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가능한 한 소화하기 쉬운 음식을 마련해 봤어요. 미음이라는 음식이래요. 따뜻할 때 먹어야 좋다니까 먹어보세요.”
“…”
살짝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수저로 음식을 떠서 입가로 가져가는 미아의 행동을 보며 네아는 잠시 고민했다.
어쨌든 살아있다는 건 확실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 그렇구나 하고 지금의 상황을 그냥 넘길 수가 없는 입장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거야 그렇다 쳐도, 밤의 신에게 포로가 되어 버린 것이 명백한 지금의 상황에서 과연 자신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일까.
차라리 죽어 버렸다면, 그랬다면 이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네아는 내밀어지는 수저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먹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는 순간, 네아는 미아가 내민 수저로부터 전해지는 어떤 냄새를 맡고 말았다.
부드러우면서도 은은한, 그러면서도 어째서인지 황홀한 기분마저 느껴지는 그 냄새라니.
그녀의 의지는 분명히 음식을 거부하고자 하고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몸은 그러한 의지를 또한 거부하고 있었다.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 그렇지 않아도 싸늘하게 식어있던 손발이 더욱 차가와지는 듯한 느낌. 어쩐지 현기증이 일며 어질어질해지기까지 한다. 부드럽고 고소한 느낌 가득한 냄새를 확실하게 인식하자 그녀의 몸은 어서 영양분을 섭취해 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한 것이다.
꼬르륵!
네아는 물론이고 수저를 내밀고 있던 미아마저 놀랄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쯤 되면 뱃고동이라고 불러도 충분할 것 같은 소리다.
순간 네아는 머리로 피가 확 몰리는 듯한 기분에 작은 현기증마저 느껴야만 했다. 말로야 먹지 않겠다고 했지만, 몸이 이런 식으로 반응해서야 비웃음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흘깃 바라보니 미아는 잔잔하게 웃으며 어서 먹으라는 듯이 다시 수저를 내민다.
“말은 그래도 몸은 정직하네요. 자, 어서 먹어요. 얼른 먹고 건강해져야 뭘 해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형진이 말했다면 영락없이 능욕 내지는 기타 변태스러운 상황을 떠올리게 만들 것 같은 말이다. 순진무구하기 이를 데 없는 미아가 말하니 말하는 쪽도 듣는 쪽도 완전히 의미가 달라지고 만다.
피하고 싶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없다.
어서 먹으라는 듯이 코앞에서 그렇게 멈춰 있는 수저로부터 풍겨지는 향기에 어느새 네아의 입안은 흘러나온 침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꿀꺽.
견디다 못해 군침을 삼키자 그 소리는 또 왜 그렇게 크게 느껴지는지.
고문이다. 이건 정말 고문이나 다름없다. 차라리 때리고 찌르는 식의 고문이라면 이렇게 당황스럽지는 않을 텐데. 선의 가득한 미소를 생글생글 지은 채 냄새만으로도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무언가를 코 끝에 들이밀고 있으니 네아로서는 정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식으면 맛없어요.”
“…”
“자꾸 그러면 강제로라도 먹일 거에요.”
위협을 하려는 건지 살짝 눈을 흘기며 말하는 모습은 왜 그리 또 귀여운 건지. 만약 밤의 신이 일부러 이런 상황을 노리고 이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보살피게 한 것이라면, 정말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심계를 지닌 이가 아닐 수 없다.
“자아, 어서요.”
결국 네아는 눈을 질끈 감고는 조그맣게 입을 벌렸고, 그렇게 벌려진 입으로 어김없이 수저가 밀려들어왔다.
조금은 딱딱한 느낌의 이물질이 입 안으로 들어오자, 네아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무언가가 혀 끝에 닿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아!”
이것을 과연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지금까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져 있던 세상에 갑자기 온갖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부드러운 물처럼 입 안을 적시는 그 무언가는 그야말로 생명수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달콤하면서도 고소하고, 고소하면서도 은은하고 촉촉하게 혀끝을 적시는 그 감각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어때요. 맛있죠?”
“핫!”
잠시 풀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네아는 작게 웃음이 섞인 미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헤매고 있던 꿈결 속에서 화들짝 깨어났다.
“그, 그냥 뭐…”
“킥. 아닌 척 하는 모습이 꼭 리페님 같아요.”
“…”
리페는 또 누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고작 한 숟가락을 먹었을 뿐인데도, 차가와져 있던 손발에 따뜻한 온기가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네아가 알던 그 어떤 음식도, 이런 식의 효과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혹시, 뭔가 이상한 걸 타거나 한 건 아니겠지.
“자, 아직 많이 남았어요. 마저 드세요.”
“으으…”
미아는 다시금 음식을 떠서 그녀의 입가로 가져다 댄다. 먹어 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은은하고도 구수한 그 향기에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건 차라리 지금보다는 나은 상황이었음을 이제 네아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일단 먹어버리고 난 뒤에는, 도저히 저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아 버린 것이다.
덥석.
결국 그녀는 인내하지 못하고 내밀어진 수저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옳지. 잘했어요. 후후.”
아아… 이젠 모르겠다. 잘했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미아의 모습에, 네아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일단 한 번 가로막고 있던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지자, 네아는 더 이상 터져 나오는 식욕을 주체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아차하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한 그릇을 뚝딱 다 비워버리고 만 뒤였다.
“수고했어요. 이런 식으로 푹 쉬고 잘 먹으면 아픈 몸도 금방 나을 거에요.”
“…”
어쩐지… 몸도 마음도 완전히 능욕당해 버린 듯한 기분이다. 아니, 차라리 그런 거라면 최소한 이런 패배감과 수치심은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폭력에 굴하지 않겠노라 마음을 다잡을 수라도 있었을 테니까.
“당신은… 대단한 요리사군요. 사람의 굳은 마음마저 녹여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고작 한다는 말이 이 정도다. 그것은 칭찬이면서도, 자신을 이런 식으로 함락시켜 버린 것에 대한 질타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들은 미아는 그릇을 정리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거, 제가 만든 음식 아닌데요?”
“네?”
“배워보고는 싶은데, 소질이 없나 봐요. 아무래도 무리더라고요. 설령 소질이 있다고 해도 진 정도의 실력을 갖출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고.”
“…”
순간 네아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새로부터 진화한 알마네아족에게 전해져 내려온다는, 어떤 강렬한 직감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정작 대성전의 붕괴 때는 전혀 발동하지도 않은 주제에, 하필 지금 이순간 그런 직감이 떠오른 것인지는 그녀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진이 누구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네아의 말에, 마치 자신이 칭찬 받은 것처럼 즐겁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미아가 대답했다.
“제 남편이에요. 아, 참고로 그는 당신이 밤의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이기도 하죠.”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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