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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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의 눈빛에 이채가 감돈다.
“만나서요?”
“네?”
“만나서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묻는 겁니다.”
네아는 이제 눈앞의 이 여성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한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접견이 이루어지기 전에 사전에 그 내용을 조율하고 협의하는 것은 실무진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다. 사실상 고위급 회담이란 것은 대부분 즉석에서 어떤 내용이 발의되거나 하기 보다는, 사전에 미리 조율된 내용을 접견이라는 형식으로 외부에 드러내 보이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에 네아는 빛의 신전, 그 중에서도 대성전이라 불리는 추종자들의 총본산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었다. 빛의 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일은커녕 장로들조차 자신들이 신앙하는 신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성전의 최고 장로란 어떻게 보면 이 우주 전체를 대표하는 자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네아의 경우 자신이 그런 식으로 절대적인 권좌에 앉아 있다는 식의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사상 최연소로 장로에 오른 탓에 경험이 부족한 면도 있었고, 실무적인 문제는 다른 여타의 장로들에게 대부분 분담되어 있었던 탓에, 그녀는 속된 말로 얼굴 마담에 가까운 위치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얼굴 마담이라고 해도 돌아가는 내부 사정을 전혀 모른대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녀는 대성전의 정책 수립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행사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협화음을 염려해서 모른 척 하고 있었던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의도적인 방관이, 최연소로 장로의 자리에 오르고 최고 장로에 올랐음에도 다른 장로로부터 견제를 받지 않고 은연중에 지지를 받도록 만든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 역시 단순히 외모나 운으로 그 자리에 오른 건 아닌 셈이다.
비록 포로가 되고, 다시 강제로 개종을 당해 빛의 신을 대신하거나 대성전이라 불리던 곳에 있던 다른 추종자들을 대표할 수 있는 지위는 이미 박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아는 자신이 아직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로 인해, 포로임에도 이러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때문에 네아는 비록 이렇게 영락한 처지에 놓였더라도, 밤의 신이라는 존재를 직접 만나 상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물론 확인을 한다고 뭔가가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빛의 신과 적대중인 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강제로 개종을 당해 더 이상 최고 장로는커녕 빛의 신을 모시는 추종자조차 되지 못하는 상황이라도.
“확인… 하고 싶습니다. 다른 세계의 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확인하고 나면?”
“아마도 제가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겠지요.”
보통의 경우라면 이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불행히도 상대는 다름 아닌 아란이었다.
“마음만이라도 빛의 신을 계속 따를 것인지, 아니면 개종에 순응해서 밤의 신을 따를 것인지를 결정하고자 하는 건가요?”
“그건…”
어떻게 보면 적나라하다 싶을 정도로 압축된 두 개의 선택지. 하지만 또한 어느 쪽이든 당장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은 내용이기도 하다. 아니, 이렇게 두 개의 선택지를 내놓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네아의 마음이 어느 정도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음을 시사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다.
미아, 혹은 보호와 균형이라고 불리는 존재와의 만남은 네아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신성불가침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신이라는 존재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고 함께 지냈다. 기존에 알고 있던, 그리고 믿고 있던 신의 존재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토대마저 붕괴시키는 그런 경험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왔고 지켜왔던 모든 가치들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선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명목상 빛의 신을 위해서라도, 최고 장로였던 자였기에 라는 식의 단서를 붙여 자신을 설득하고는 있었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밤의 신이라는 자가 미아와 같은 존재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 그녀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던 진정한 속내일 수도 있었다.
아란의 질문은 바로 그러한 전제 하에 건네진 것이다. 정말로 밤의 신이 미아와 같은 그런 존재라면, 과연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고자 하는 것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선택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저는…”
하지만 네아는 그녀의 질문에 쉽게 답할 수가 없었다. 비록 흔들리기는 했지만, 빛의 신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느냐면 그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밤의 신을 만나고 난 뒤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직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지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 이르다.
아란은 잠시 기다리다가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는 다시 말했다.
“당장 결정을 내리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적어도 생각은 해두고 있는 것이 좋겠죠. 마음의 준비를 해두면 나중에 어느 한쪽을 골라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덜 헤매게 될 테니까요.”
“…”
단숨에 몰아쳐서 궁지에 몰아넣으면 예상 외의 반응이 일어날 수도 있다. 놀란 사냥감이 오히려 몰이꾼을 덮치고 드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진행할 필요가 있고, 아란은 그런 일을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숙련된 사냥꾼이었다. 그녀를 지금까지 가장 곤란하게 만들었던 형진이라는 이름의 사냥감에 비하면 하얀 날개를 지닌 이 존재는 너무나 가냘프다.
“일단 당신의 생각은 그에게 전해 두겠어요. 당장은 여러 가지로 바쁘기도 하고, 당신의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으니 바로 허락될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요.”
“감사합니다.”
비록 조건이 걸리긴 했어도 어쨌든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여지긴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어쩐지 눈앞의 이 여성에게 유도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해도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네아는 천천히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역시나 혀끝에 닿는 순간 승천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신들은 본래 이런 음식을 먹는 걸까. 아니면, 밤의 신이 요리에 대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밤의 신을 따르는 추종자가 되어 버린 탓에 그 신의 권능과 존재감에 반응해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당장의 네아로서는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일생을 신에게 바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정작 신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아란은 조용히 그녀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식기를 정리한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네아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저… 하나만 더 여쭈어 봐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혹시, 당신도 신이신가요?”
미아의 경우를 놓고 봐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사실은 신이었다는 식의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게다가 눈앞의 이 여성은 어쩐지 스스로 신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미아에 비해 훨씬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사실 이건 아란이 의도한 바가 맞다. 그녀는 스스로가 그럴 생각이라면 다른 어떠한 이에게도 자신이 사실은 신이라는 점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형진은 물론이고 그녀의 아이들이나, 절친으로 지냈던 미나, 그 외 다른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그녀가 신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다.
“맞아요.”
“…”
순순히 대답하는 아란의 모습에 네아는 역시나 싶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쪽에는 이렇게 신이 발에 채이도록 많은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쩐 신이신지 물어도 되나요.”
그 말에 아란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공포와 죽음이에요.”
“…”
순간 네아는 흠칫하며 굳어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뭔가 존재감이 강렬하다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런 신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놀랐나요?”
“아, 아닙니다.”
“긴장할 것 없어요.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공포와 죽음을 뿌리고 다니는 그런 신은 아니니까.”
“…”
긴장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더 긴장이 된다. 아무에게나라는 단서가 붙긴 했어도, 그 단서가 아니라면 공포와 죽음을 뿌리고 다니는 것도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하지만 아란은 네아가 그런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다시 말했다.
“휠체어를 조작하는 방법을 알려줄게요. 사용법을 잘 익히면 어지간한 장소는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 또한 침대나 안락의자 대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죠. 몸을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는 불편하겠지만, 익숙해지면 여러모로 편리할 거에요.”
“감사… 합니다.”
잔뜩 굳어버린 채 네아는 아란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설명이 끝나자 아란은 정리가 끝난 손수레를 잡으며 다시 말했다.
“그럼 쉬고 있어요.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내 이름을 부르도록 하고요.”
“네.”
아란이 손수레를 끌며 방을 나가자, 네아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공포와 죽음이라니. 악신에게나 붙을 법한 이름이 아닌가. 그런 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옷을 갈아입히고 침구를 정리하고 음식을 차려주다니. 아마 자신의 이러한 경험을 다른 이에게 말한들 누가 과연 믿어줄까 싶을 정도다.
잠시 아란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뭔가 신경을 거스르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되새겨 보던 네아는 문득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는 다시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아름답다. 이곳이 자신이 살던 세계와는 다른 곳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녀는 또한 모르고 있었다. 처음 저 풍경을 보았을 때 떠올렸던 감정 가운데 하나인 죽음이라는 단어가, 어느 틈엔가 그녀의 머리 속에서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공포와 죽음이라는 이름의 신 앞에 서고 난 뒤의 후유증일 수도 있었다.
한편, 미아와 연습을 함께 하고 있는 중에도 형진은 또한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여러 가지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 게이트는 크게 두 가지 조건 하에서 움직이게 됩니다.”
“두 가지라면?”
“하나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추종자에 의한 허가입니다. 아마도 신전의 책임자가 이 일을 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군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겠지. 그렇다면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충분한 공헌도입니다. 다만 이것에는 게이트를 활성화시키는데 필요한 양의 거의 열 배 가까운 양이 필요합니다.”
“일종의 통행료라는 건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은 어디까지나 전제 조건에 해당될 뿐, 실제로는 각각의 게이트와 인접한 빛의 신전에서 게이트의 세부적인 조작을 담당하는 형태이다. 사실 공헌도라고 해도 일반인들은 그것을 활용하거나 모을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대납하는 신전에서 사실상 모든 통제 권한을 지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만으로도 빛의 신전이 저쪽 세계에서 얼마나 강력한 권한을 지니고 있는 건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결국 이 게이트를 쉽게 장악하고 빼돌릴 수 있었던 것은, 대성전이 초기에 손쓸 틈도 없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되는 거지.”
허세와 망상의 말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이것의 통제권을 빼앗아올 다른 방법은 찾았습니까?”
형진의 질문에 허세와 망상은 씩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하핫!”
“오, 그거 대단하군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상대가 손쓸 틈조차 없도록 빛의 신전이라는 곳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겠지만, 녀석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것에 관한 대비 정도는 해두었을 거야. 이를테면, 자폭 장치 같은 것을 덧붙이는 식으로.”
“방법이란 건 그것을 해결하는 것까지 포함이겠군요.”
“물론.”
게이트는 사실상 빛의 신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기술을 갖추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빛의 유일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저들이 초광속 항해을 실현하지 못한 상태인 점을 감안하면 게이트를 장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저들의 세계를 가장 작은 단위로 갈기갈기 찢어놓는 일이나 다름없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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