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12
-10912
“잊어선 안될 것이 있어. 무슨 말인지 알고 있겠지?”
허세와 망상의 말에 형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것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또는 숨겨진 게이트들에 대한 것이겠죠.”
“바로 그거야.”
대성전이 파괴되고 빛의 신이 네아의 몸에 강림하여 전투가 치러졌을 때, 그녀와 함께 있던 다른 장로들은 급히 몸을 피했고 게이트를 수중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위치는 현재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그 정도의 소수 인원을 이동시킬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봐야한다.
“당시 행성권 안쪽은 티폰과 누에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습니다. 게이트 장악 이후, 빠져나간 적의 군세가 없었던 것을 고려해 보면 소규모의 게이트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겠지요.”
“사실 처음 이것을 건네받았을 때, 가장 먼저 시험해 본 부분이 바로 그것이야. 기존에 사용하던 결계나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이미 장악한 행성 내부로 무언가가 침투해올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첫 번째 목표였지.”
허세와 망상의 말과 함께 낯익은 외모의 신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다. 바로 반지와 거울이다.
그가 인사를 마치자 허세와 망상이 말했다.
“이번에 게이트를 분석하는 와중에 확인한 점이 하나 있네. 여기 있는 녀석의 신격 가운데 하나인 거울이 이 게이트의 능력을 통제 또는 간섭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지.”
“오! 그렇습니까?”
누에와 클로리스인에게 이쪽 세계의 신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이 사용하는 물품 역시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건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반지와 거울의 뒤를 따라 새로운 방에 들어서자, 커다란 거울 하나가 한쪽 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급하게 만든 것이긴 합니다만, 앞서의 게이트를 일부나마 복제한 물품입니다.”
“오오! 훌륭해!”
일부라도 복제에 성공했다는 얘기는, 어쨌든 게이트의 작동 원리를 완전하게 파악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꿔 말하면 누에나 클로리스인들처럼 게이트 역시 통제권을 강제로 빼앗아오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하셨던 그 방법인 셈이군요.”
“맞아. 하지만 문제가 있어.”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상 외로 보안 장치가 상당히 강력해. 그래서 원거리에서 이것의 통제권을 빼앗아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야. 게이트 본체 내지는 그것을 통제하고 있는 신전의 관리 시스템에 반지와 거울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직접 접근할 필요가 있는 거야.”
“과연. 그런 얘기로군요.”
당장 반지와 거울의 권능을 현재 사용 중인 황혼과 망각의 권능의 대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쪽에서 게이트의 통제권을 빼앗아 올 수 있는 것처럼, 저쪽에서도 같은 일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확보한 이 기술이 본격적으로 실용화되는 것은 빛의 신을 완전히 굴복시킨 뒤의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지와 거울은 형진을 바라보며 기대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가 직접 전투에 참여해서 특수부대처럼 게이트 탈취를 시도하는 역할을 맡을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누군가가 투입이 되어야 한다. 당사자 이외에 권능의 사용을 허락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신에게 속한 추종자. 바꿔 말하면,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반지와 거울 역시 추종자를 끌어 모아 교단을 만들어야만 한다는 뜻이 된다.
반지와 거울은 개척 교단을 설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정사원이 되는 쪽을 선택한 케이스다. 비교적 초반부터 일을 시작해서 이제는 제법 높은 위치로 올라서고 신앙이나 공헌도도 꽤 많이 모아둔 상태가 되었지만, 욕심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이제는 자신도 교단을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교단을 만들고 싶다고 해도 당장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사업도 해본 사람이나 하는 것처럼, 교단을 세우고 신도와 추종자를 끌어들여 제대로 된 신으로 우뚝 서는 것 역시 무작정 시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이고만 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게이트의 장악을 위한 특수 인력의 모집이라는 빌미로, 이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최고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형진의 도움을 받을 기회가. 반지와 거울이 기대 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는 건 결국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우선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추종자를 모으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알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에게 맡겨 주시죠.”
한 눈에 반지와 거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린 형진은 선선히 기대에 부응했다. 혹시라도 마땅치 않은 기색을 보이면 어쩌나 싶었던 반지와 거울은 그런 형진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그에 어울리는 성과를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죠. 하하.”
반지와 거울이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자, 주위의 다른 잡신들은 부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교단을 갖추고 신도와 추종자까지 갖추고 나면, 비록 다른 대신들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당당한 한 명의 신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그들로서는 이래저래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도 보고 가게.”
허세와 망상은 형진을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이건… 새로운 잠수함인가요?”
그곳에 있는 것은 아쿨라급 잠수함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날렵한 모습을 지닌 함선이었다. 아쿨라급 잠수함이 거대한 흰수염고래를 연상시킨다면, 이 함선은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라 할 수 있는 범고래를 연상시킨다.
“잠수함이란 건 바다에서나 쓰이는 이름이 아닌가. 이것은 일전의 그 잠수함에 적용된 기술들을 응용해서 새롭게 건조한 녀석이야. 굳이 분류를 하자면 강습함이 어울리겠군.”
강습함이라는 이름은 보통 적진 내부에 부대를 상륙시켜 공격을 가하는 용도의 함선을 가리킨다.
“원래는 적이 스틱스와 같은 거대 요새를 앞세워 공격해 올 경우를 상정해서 그 내부에 주시자나 집행자, 수호자와 같은 강력한 추종자들로 편성된 공격부대를 침투시키는 상황을 상정하고 계획된 함선이지. 자체적으로 초광속 항해가 가능하고, 강력한 적의 저항을 뚫고 내부에 병력을 침투시키는 것이 가능하도록 다른 여타의 공격 능력은 포기하고 오직 고속 성능과 강력한 방어력에만 집중한 함선이라고 할 수 있지. 이를테면, 사람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아스트라페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허…”
이쪽에서 티폰이나 스틱스와 같은 거대한 병기를 선보이고, 다시 그에 대응할 만한 종족인 누에까지 장악해 버린 이상, 상대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해올 가능성이 있다. 아스트라페를 흉내낼 수 없는 이상, 빛의 권능을 가로 막을 수 있는 방어력을 갖춘 이들은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강대한 방어력을 지닌 요새라 해도 아스트라페의 위력 앞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 안에 인질이나 여타의 문제로 아스트라페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경우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전쟁이란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서 대비를 해두어야 하는 법.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함선이 계획된 된 것이다.
처음에는 굳이 이런 것까지 필요할까 싶었던 이 계획이 탄력을 받게 된 것은 바로 게이트의 연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파괴가 가장 간단한 방법이긴 하지만, 부숴서 없애는 것에 비해 그것을 활용해 적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전략이나 전술 면에서 훨씬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 건 당연한 일. 때문에 지금까지는 다소 우선 순위에 밀려 지지부진했던 건조 계획이 빠르게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결국 이렇게 완성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이제야 기억이 나는 군요. 건조 계획을 승인해 놓고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자네야 원체 하는 일이 많으니까. 하하.”
그렇게 거짓된 천국에서 현재 진행 중인 계획들을 확인하고 있자니, 아란에게서 연락이 들어왔다.
“나를 만났으면 싶다고?”
“네. 그렇게 말했어요.”
“재미있군. 슬슬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건가.”
“어떻게 하실래요?”
아란의 말에 형진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직은 좀 일러. 준비도 끝이 나지 않았고.”
그의 대답에 아란은 살짝 눈을 흘겼다.
“변태.”
“그런 변태를 좋아하는 건 어디의 누구?”
“게다가 뻔뻔스럽기까지.”
“죄송합니다.”
“말로만요?”
“물론 아니지.”
그렇게 아란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세와 망상이 작게 혀를 찼다.
“자네들은 참 변함이 없군. 슬슬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러는 허세와 망상님도 요새 꽤 분위기가 좋은 모양입니다만.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커흠흠!”
유일한 추종자라 할 수 있는 아유무가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다가오자, 허세와 망상은 괜히 헛기침을 해대며 말을 멈추었다.
아란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작게 웃다가 다시 앞서의 얘기를 꺼냈다.
“제 생각을 말해도 될까요?”
“물론. 당신의 생각이라면 언제든 귀담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거든.”
조금은 호들갑스러운 형진의 말에 아란은 살짝 눈을 흘기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 그녀를 방치해 두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째서?”
“생각이 많아지면, 그만큼 엉뚱한 결과를 낼 가능성도 높아지니까요.”
무언가를 결정함에 있어서 심사숙고는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생각만 하다보면 엉뚱한 결과를 도출해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른바 장고 끝에 악수라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잡념이 들지 못하게 몰아치라는 얘기로군.”
“그거야 당신이 하기에 달린 일이겠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형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따라야겠지.”
“고마워요.”
그렇게 아란과의 대화를 마치자, 그 사이 달라붙는 아유무를 간신히 떼어 놓은 허세와 망상이 살짝 붉어진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얘기는 끝났나.”
“네.”
“그럼 다음 방으로 가보도록 하지. 아직 자네에게 보여줄 것이 많아.”
“기대하겠습니다.”
네아는 자신의 요구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지 몰라 한동안 긴장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도, 아란은 그녀의 요구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 물어보니, 그녀는 예의 의미심장한 눈웃음과 함께 아직 검토중이라는 대답만 돌려주었다.
“하아…”
휠체어의 사용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방을 벗어나 건물 안과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가능해졌다. 허락 없이 건물을 벗어나도 괜찮을까 하고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의외로 아란은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건물 밖이라 해도 결국 이 섬 안이니까요. 이 섬을 벗어나더라도 결국 이 행성 안이고.”
“…”
아란의 말에 네아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감옥이 단순히 방이나 건물이 아니라 이 행성 전체임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행성 하나를 통째로 감옥으로 쓸 생각을 하다니. 빛의 신을 모시는 최고 장로였던 그녀로서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좁은 방 안에 갇혀 있는 것과 비록 한정된 공간이라 해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었다. 오죽하면, 그녀는 이대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떠올릴 정도다.
그녀는 휠체어를 조작해서 해변으로 나갔다. 휠체어라고는 해도 바퀴는 그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할 뿐이고, 실제로는 자유롭게 떠올라 움직일 수 있는 도구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부양형 휠체어라고 해야 하나.
때문에 일반적인 휠체어처럼 다른 이의 도움이나 특별한 기구에 의존하지 않아도 계단이나 다른 여타의 고저차가 있는 장소도 원하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다만 완전히 하늘을 나는 수준은 아니라 지면에서 살짝 떠오르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에 조금 불만스럽긴 했지만, 일부러 안전을 위해 제한을 걸어둔 것이라는 정도는 그녀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철썩거리며 밀려오는 파도를 조금은 홀린 듯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그녀는 문득 저 푸른 바다 속을 헤엄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을까.”
요며칠 동안은 침대를 붙잡고 일어서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직 몸이 완전히 나아지지 않아서 다리가 후들거리기는 해도 그냥 버티고 서는 정도라면 어떻게든 가능해진 상태다. 신들이 직접 돌보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상태에 빠졌었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회복력이 아닐 수 없다.
잠시 머뭇거리던 네아는 휠체어를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냥 발만 담그는 것뿐이라도 좋으니, 넘실거리는 파도의 감촉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어째서 그런 욕구가 갑자기 일어났는지, 그녀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끙…”
먼저 휠체어를 파도가 넘실거리는 수면 위로 옮긴 다음, 발을 휠체어 밖으로 내밀고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킨다. 고작 그것 뿐인데도 벌써부터 그녀의 이마에는 흥건하게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노력한 성과가 있어서 그녀는 마침내 휠체어에 몸을 기댄 채 발로 딛고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확 하고 들이닥친 파도의 힘에, 간신히 버티고 서는 것이 고작이었던 그녀의 다리는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고 말았다.
“악!”
놀라 비명을 지르며 그녀는 중심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하지만 이곳의 모래는 너무나 부드럽고 연약했고, 파도는 의외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녀의 몸은 너무 가벼운데다 힘이 없었다. 게다가 무언가 버티고 설만한 것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몰라도, 바닥에 엎어진 상태에서 몸을 일으키는 건 아직 그녀에겐 무리였다.
짭짤한 바닷물이 눈코입으로 밀려들자, 네아는 순간 죽음을 떠올렸다. 고작해야 발목을 조금 넘는 수준의 물속에서 이렇게 죽음과 마주하게 되다니. 그야말로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는 거나 마찬가지다.
한때 죽음을 떠올리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렇게 꼴사납게, 이렇게 어이없이 죽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외쳤다.
“사, 살려… 어푸!”
그러자 누군가가 답했다.
“원한다면.”
그것은 포로가 되고 나서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