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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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뭔가 심각한 요구도 아니다. 그냥 네아가 쾌차할 때까지 자청해서 시중이라도 들겠다는 것이 고작이니까. 무슨 이런 일을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하는 건가 싶을 정도.
보닉 종족의 대표인 카스툴의 경우엔 고작 그 정도 일에 뭘 이렇게 거창하게 나오는 건가 싶은 생각에 어리둥절했지만, 네아나 클로리스의 대표자인 지사의 경우엔 이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누에는 효율이란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종족. 그런 종족이 얼핏 구차하게까지 보일 정도로 네아에게 매달리는 데는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다른 이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매우 절박한 이유가.
전투 중에 둥지가 앞으로 나서면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과 그 결과로 인해 누에들은 형진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물론 그들은 보호와 균형에게 속한 이들이니, 그녀에게 헌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누구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형진에게도 뭔가 자신들의 뜻을 전할 창구가 별도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또한 깨달아 버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네아는 자신들의 그런 의도를 실현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형진 스스로 그들과 네아를 연결시키는 일을 하기도 했고, 당장 몸이 성치 않으니 그것을 빌미로 인원을 밀어넣을 수도 있다. 보호와 균형 역시 그녀와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라는 점도 누에들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데 중요한 점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스스로 다른 종족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배울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효율만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진으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고 보호와 균형으로 하여금 스스로 다른 신에게 속하는 일을 선택하게 만든 정서에 대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물론 그들이 효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점을 포기하기는 어렵겠지만,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그런 자신들의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염두에 두기로 한 것 역시 누에라는 종족에게 있어 커다란 사고방식의 변화라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까지 포함한 사회라는 것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라고나 할까.
네아는 이런 속사정까지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이토록 심각하게 언급하는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그녀는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기 보다는 우선 확인을 거치기로 했다.
“앞서 보호와 균형님께 허락을 받으셨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우선 그 부분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누에 공주의 거침없는 대답에 네아는 조심스럽게 미아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저… 네아입니다.]그러자 곧바로 답신이 돌아온다.
[아! 어쩐 일이세요?]어쩐지 글귀를 보는 것만으로도 해맑게 웃고 있는 미아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해서 네아는 자신도 모르게 빙긋 미소를 짓고 말았다.
[실은 지금 누에들의 대표와 만나고 있는데요. 그분께서 제게 제안 하나를 하셨습니다.] [간병인 말씀이신가요.] [네, 뭐…]정확히는 간병인만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명목상으로는 그런 역할이다.
[그거라면 제가 허락한 것이 맞아요. 신분이 좀 높은 것이 흠이긴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런 일이 가능한 누에들은 그들뿐이라서.] [그렇군요. 갑작스런 제안이라 확인을 해보고자 했을 뿐입니다. 미아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면 더 따질 필요는 없겠네요.] [죄송해요. 제가 좀 더 잘 돌봐드려야 하는데.] [아닙니다. 많이 바쁘실텐데.] [있다가 들를게요. 실은 왕성에서 아이들이 쿠키를 보내왔거든요. 같이 먹어요.] [감사합니다. 기쁘게 기다리겠습니다.]그렇게 해서 일단 누에 공주들이 네아를 간병하는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일은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다른 종족에게 커다란 화두를 제시했다.
“음…”
사실 클로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섬기게 된 꽃과 바람을 대신해서 형진이 나서는 것을 그리 탐탁지않게 여기고 있었다. 애초에 빛의 신에게서 재빨리 꽃과 바람으로 갈아탄 것도 엄연히 자신들이 신봉하고 있는 신이 있는데 빛의 신이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그런데 다시금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신 이외의 다른 신이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는 상황에 직면하자 여러모로 기분이 별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에 네아가 이쪽 우주의 종족들과 밤의 신을 연결하는 자리에 서게 되자 그들은 마음 속으로 크게 반겼다. 어차피 한 단계 거치는 거라면, 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거치는 쪽이 그들로서는 훨씬 마음 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종족들이 모이면 여러 목소리가 나오게 마련이고, 그런 상황이라면 일종의 협의체 같은 것을 만드는 것도 고려해 볼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이후의 일을 시작하기 위한 첫 발걸음이라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누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였다. 애초에 타협이니 조율이니 협의니 하는 식의 단어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인 그들이 밤의 신에게 알아서 기는 듯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밤의 신께서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강력한 분이십니다…’
지사는 누에 공주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과연 이대로 좋은 것일까 싶은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너무나 오랜 시간을 거쳐 다시 맞이하게 된 여신께 누를 끼치는 식의 결과가 일어나서는 곤란한 일이다.
“그럼 당신은 우리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밤의 신에게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클로리스님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클로리스님을 위해서…”
“최소한 빌미가 될 만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결국 클로리스인들은 협의 끝에 누에들과 마찬가지로 네아를 간병하기 위한 인원을 엄선해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네아가 여성이니 만큼 그를 간병하고 보필하기 위한 인원 역시 여성들로만 특별히 추려졌다. 단순히 간병만이 목적이 아니라 이후에 네아가 자신의 곁에 두고 이런 저런 일을 맡겨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을 정도의 인재들이다.
“헐? 뭐야 이건.”
게이트 점령 이후 각 지역의 선무 공작에 대한 건을 의논하기 위해 다른 비서들과 함께 네아를 찾았던 형진은 그녀의 거처 안에 모여든 다른 종족의 여성들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작은 누에 공주들 뿐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클로리스인들이 간병인을 보내오고, 그것을 지켜보던 보닉 역시 간병인을 보냈다. 그렇게 보닉이 간병인을 보내자, 그들에게 설득되어 형진을 따르기로 결정한 다른 소수 종족들 역시 인원을 엄선하여 간병인을 파견했다. 이렇게 되자, 네아의 거처는 순식간에 서로 다른 여러 종족들의 여성들로 가득 들어차게 되었다.
놀란 형진의 모습을 본 리페가 조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던진다.
“보고 했잖아. 간병인들을 보내왔다고.”
“이렇게 많다고는 안 했잖아!”
소리를 빽 지르는 형진의 모습에 리페는 시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닌데. 명단까지 다 갖춰서 보고 했을 텐데. 그게… 힐리에타. 네가 보고한 내용 아니야?”
“그, 그게… 서류는 올렸는데.”
힐리에타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규설이 작게 한숨을 쉬며 대신 답했다.
“뭐… 다른 중요한 보고들 때문에 그냥 대충 보고 지나치신 것이 아닐까 싶네요. 어쩌면 보고보다 다른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있으셨을 수도 있고.”
“…”
규설의 말에 힐리에타는 목덜미까지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수그렸고, 그제서야 대충 어찌된 일인지 깨달은 형진은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자신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내들의 시선을 피했다.
“크흠! 크흐흠! 그건 그렇다 치고…”
물론 그런 식으로 말을 돌리는 걸 가만히 넘어갈 리페가 아니다.
“뭐가 그렇다 치고야. 이거 엄연히 업무 태만이라고.”
“끙…”
일단 간병인들에게 방에서 물러나 있을 것을 부탁하던 네아는 아내들에게 쩔쩔 매는 형진의 모습을 보고는 조금 놀라 버렸다.
“전보다도 많이 좋아졌군. 한결 나아 보이는데.”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조만간 다시 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빈 말이 아니라, 요즘은 조금씩 시간을 내서 다시 하늘을 날기 위한 운동을 시작한 참이다. 어쩐지 어렸을 때 했던 이런 저런 연습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달리 도움을 주는 이들도 많아서 네아는 요즘 꽤 생기어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바로 시작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그렇지?”
아란의 말에 형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네아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바로… 시작이라면, 역시 선무 공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그런 거라면 바로 시작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직 제대로 날 수 없는 것만 빼면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완쾌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스스로 날 수는 없더라도, 몇 가지 도구를 쓰면 비행 자체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역시 동족들을 속일 수는 없겠지. 그들은 네가 스스로 날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사용해서 단순히 하늘 위에 떠 있는 것인지 바로 알아볼 테니까.”
“동족… 인가요.”
따지고 보면 네아가 최고 장로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유익족 알마네아가 빛의 신에게 충실한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클로리스나 누에들처럼 다른 신을 믿던 종족도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빛의 신은 정말로 세상에 오직 하나 뿐인 유일신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익족 알마네아를 밤의 신에게로 끌어들이는 일은 다른 여타의 종족들에 비해 훨씬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상징성으로 보나, 실제 난이도로 보나 이번 선무 공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과제인 셈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현재 이곳저곳에 고립되어 있는 적의 군세를 먼저 무력화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군세들 또한 의사 소통이 가능한지조차 의문인 크리스털 같은 종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현재 형진에 의해 선무 공작이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질 예정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다.
단순히 빠르게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들의 군세를 먼저 때려부수고 더 이상 항거할 방법이 없게 된 자들을 대상으로 선무 공작을 벌이는 것이 효율적인 거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형진은 이 우주 전체를 정복했다고 선언하고 깃발을 꽂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무력이라는 강제적인 수단이 없더라도 모두가 자신을 주신으로 받들며 살아가는 그런 곳으로 만들고 싶다. 일반적인 경우 이런 식의 사고는 이상에 얽매인 몽상 같은 걸로 치부되기 쉽지만, 그런 몽상같은 결과를 이뤄내기 위해서도 가급적이면 피를 적게 흘리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
“알겠습니다. 신께서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기대하겠어.”
그 외에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든가, 네아가 일선에 투입되기 전에 알아두어야할 현재의 진행 상황 몇 가지를 알려주는 식으로 대화와 함께 간단하게 다과를 나누고 난 뒤에야 형진은 그녀의 거처로부터 빠져 나왔다.
“저대로 놔둬도 괜찮을까요?”
다시 집무실로 향하려는데 문득 미아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뭐가? 아… 간병인들?”
“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발단은 누에 공주들을 간병인으로 받아들인 일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형진에게 폐가 되는 건 아닌가 싶어 미아는 매우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형진은 그런 미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며 대답했다.
“괜찮아. 따지고 보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고. 알마네아를 받아들이는 일에도 필요하니까.”
“간병인들이요?”
“그래.”
형진은 다른 이들도 들으라는 듯이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알마네아는 지금까지 우리가 접해왔던 종족들과는 달라. 과연 그 차이가 뭘까.”
“음… 난태생이라는 점?”
미아의 말에 형진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닌… 가요?”
“물론 그것도 다른 점이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저들이 바로 기득권층이라는 점이야.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알마네아는 다른 종족들보다 여러 가지를 지니고 있는 거지.”
“아하.”
보닉이 가장 먼저 형진을 섬기게 되면서 우월적인 지위를 가지게 된 것처럼, 알마네아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한 지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단순히 신앙이나 다른 문제를 벗어나서, 그들은 빛의 신에 의한 지배 속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자들인 셈이다.
“흔히 기득권층이 개혁이나 변화를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건, 결국 그런 일련의 일들이 자신들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가기 때문이야.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알마네아들에게 있어서 그런 식의 변혁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하지.”
형진은 미아의 허리를 감싸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들이 지금까지 누리던 모든 것을 다 보장해 줄 수는 없어. 우주라는 것은 매우 넓은 공간이지만 이 안에서 종족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한정되어 있으니까. 체제가 바뀌면 결국 기존의 기득권이던 알마네아는 여러 가지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는 거지.”
그러자 미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랑 간병인들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있지. 아주 많이. 사실 그들은 그저 네아의 몸이 완치되는 것을 돕기 위한 간병인일 뿐이지만, 그들을 보낸 자들은 간병이 끝난 뒤에도 뭔가 다른 일들을 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이건 그들의 시선으로 보기에 네아라는 인물이 권력과 매우 가까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지. 그리고, 그것은 알마네아들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일테고.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보내와서 아까는 좀 놀랐지만.”
그러자 리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결국 저들은 미끼라는 말이네. 알마네아라는 자들에게, 당장 이런 저런 것을 빼앗길 수 밖에 없겠지만 네아를 통해 그 모든 것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식의.”
“역시 리페는 이해가 빠르네. 자, 이리와. 상을 주마.”
“됐거든!”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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