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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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많이 나았다고?”
“모두 밤의 신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전향한 자는 아무래도 본래부터 그 신을 모셨던 자보다 입지가 약할 수밖에 없다. 물론 네아의 경우엔 치료를 받는 도중에 미아나 아란 같은 여신들과도 친분을 만든 편이니 조금 나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다른 주시자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빠른 회복 속도 역시, 더 이상 짐이 되기보다는 하루라도 더 빨리 나아서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일 수도 있었다. 의지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건 신에게나 가능한 일이지만, 원래부터 회복되고 있던 신체를 조금 더 빠르게 가속시키는 것은 보통의 사람이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좋아. 실은 그대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이가 있어서 찾아왔다.”
“소개… 라면?”
“전에 말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쪽 우주에서 그대보다 먼저 나에게 속하게 된 이들이야. 들어오도록.”
형진의 말이 떨어지자 파충류의 외모를 지닌 인물과 곤충 특유의 겹눈을 지닌 인물, 그리고 머리에 꽃을 달고 있는 인물이 각각 한 명씩 안으로 들어왔다.
네아는 조금 놀라 버렸다. 파충류의 외모를 지닌 종족인 보닉이나, 곤충의 형상을 지닌 종족인 누에까지는 이미 밤의 신에게 속했다는 사실을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에 꽃을 달고 있으며 식물을 돌보는데 특화된 종족인 클로리스의 경우는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열두 종족 중에서도 클로리스인들은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다. 다른 종족들은 그저 조용히 틀어박혀 꽃이나 돌보는 그들을 다소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대성전의 최고 장로 자리에 있던 네아는 그들의 존재가 빛의 신전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변변한 무력도 없이 오직 땅을 일궈 식물들을 일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는 클로리스인이 다른 여타의 종족들과 함께 빛의 신을 따르는 가장 중요한 열두 개의 종족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빛의 신에게 속한 이들 가운데 그들이 생산하는 식량의 총량은 약 삼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식량에만 국한된 부분이고 식물로부터 얻어지는 다른 무수한 자원들까지 감안한다면 실질적으로는 다른 모든 자원들의 생산까지 합한 총생산량의 사할, 아니 파생되는 여타의 자원까지 감안하면 최소 오할 이상의 자원이 그들의 손에 의해 책임져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게다가 식량 또한 마찬가지다. 삼할이라고 하면 얼마 안 되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건 바꿔 말하면 그들이 생산하는 식량의 공급이 끊기는 순간 빛의 신전에 속한 종족들 가운데 삼할 이상이 굶어야만 한다는 얘기가 된다. 클로리스인들이 자체적으로 소비하는 양을 제외한다 쳐도, 수백억 이상의 인구가 그들의 손으로 일구어진 식량으로 연명하고 있는 셈이다.
“놀랐나 보군.”
“네. 조금…”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밤의 신은 빛의 신전에 속한 자들의 경제를 그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는 역량을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모든 우주를 생명의 빛으로 채우겠다는 그의 이상 때문이겠지. 네아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처음부터 이 전쟁에서 빛의 신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사실 이들 가운데 보닉들을 제외한 다른 두 종족의 경우는 내가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어. 누에의 경우엔 보호와 균형을, 클로리스의 경우엔 꽃과 바람을 각각 섬기는 중이지.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나에게 속한 이들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이번 전쟁에서 우리 편에 서서 힘을 합치고 있는 중이니 그대도 알아두면 좋겠지.”
“그렇군요.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미아나 아란의 경우를 보면 밤의 신이 다스리는 우주가 다른 여러 신들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설마 누에나 클로리스 같은 열두 종족에 속한 자들까지 다른 신들에게 별다른 거리낌 없이 양보하는 걸 보고 네아는 다시 밤의 신이 지닌 포용력에 조금 놀랐다. 물론 그녀가 실상을 알았다면 그런 소소한 감동도 조금 퇴색했을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네아로서는 신들 사이에 얽힌 그런 복잡한 부분을 알 방법이 없다.
이렇게 형진이 네아와 다른 종족의 지도자들에게 만남의 자리를 주선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미묘한 역학 관계 때문일 수도 있었다.
보닉은 종족 그 자체로 놓고 보면 소수인데다 다른 종족과 특화된 부분도 적어서 지금까지는 열두 종족 아래에서 하층 노동자 신분으로 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함에 있어서 그들은 이 우주에서 밤의 신에게 직접적으로 속한 최초의 종족이 되었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지만, 선점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커다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위치를 잡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누에나 클로리스는 자신들이 원하던 신을 찾는데 성공하긴 했어도 밤의 신을 직접 섬기는 보닉과는 아무래도 입장이나 위치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네아는 자신이 이들 사이에 생길 수도 있는 알력이나 기타 여러 가지 문제를 조율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맡도록 정해졌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럼 난 이만 일이 있어서. 얘기 나누도록 해.”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진이 방을 빠져 나가자, 네아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 자주 만남을 가지면서 익숙해진 것 같긴 해도, 역시나 자신이 섬기는 신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나 할까.
“별 것 아니지만 조촐하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입이 심심할 때 드십시오.”
“감사합니다.”
클로리스를 대표해서 찾아온 지사라는 인물은 형진이 나가기가 무섭게 손에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네아에게 건네주었다. 네아가 앞으로 자신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될 것임을 감안해서 나름의 성의 표시를 한 셈이다. 물론 대놓고 금품을 건네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성의 표시는 이곳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고급 과일을 선물하는 정도에 그쳤다.
네아는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그들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접할 만한 것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잘 되었네요. 일단 앉으세요. 과일 깎는 칼이… 아, 여
네요.”
“…”
클로리스의 대표인 지사는 물론이고, 보닉의 대표인 카스툴이나 누에들을 대표해서 찾아온 공주 역시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래도 한때 빛의 신전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녀가 스스로 과일을 깎아 대접하려는 모습에 놀란 것이다.
“사실 전 이런 걸 잘 못하지만, 얼마 전에 좋은 도구를 전해 받았거든요. 손을 베일 염려가 없으면서도 아주 쉽게 과일을 깎을 수 있어요.”
“오오, 이건 참 훌륭하군요.”
“그렇죠?”
본래부터 누에나 보닉에 비하면 훨씬 사교적인 종족인 클로리스의 대표인 지사는 마치 면도기를 쓰듯이 쓱쓱 문지르기만 하는데도 깔끔하게 껍질이 깎여나가는 모습에, 감자칼 내지는 필러라고 부르는 도구를 신기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駭? 물론 그런 식으로 뭔가 요리를 한다거나 껍질을 벗겨 먹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누에는 물론이고, 채식보다는 육식을 선호하는 보닉 역시 그런가보다 하는 눈길로 바라볼 뿐이다.
“자, 드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과일 깎는 일을 마치고 네아가 그것을 담은 접시를 내놓자, 클로리스의 대표인 지사는 물론이고 조금은 별 감흥 없이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누에 공주나 보닉의 대표인 카스툴 역시 과일을 한 조각씩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카스툴은 과일 조각을 집어 들고 입으로 가져가서 우적우적 씹어 삼키자 곧바로 말문을 열었다.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아시다시피, 이 우주에는 열두 종족을 제외하고도 많은 소수 민족들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저희 보닉들이 밤의 신을 가장 먼저 모시게 된 것은 그런 다른 많은 소수 민족들의 권익을 보살피는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뜸 중요한 논제가 튀어 나와 버렸다. 네아는 살짝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받았다.
“아직 저는 그런 중요한 사안에 대해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심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과거 제가 대성전의 최고 장로 역할을 맡았다고는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지금은 그저 밤의 신을 모시는 평범한 주시자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현재 상황에 걸맞은 원론적인 대답이긴 했지만, 그 정도의 말을 듣고 아 그런가보다 하고 물러설 것 같았으면 카스툴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서로 다른 세 종족의 대표를 불러모아 네아님과 마주하게 한 것은 따지고 보면 밤의 신께서 앞으로 이 우주에 속한 종족들의 조율을 네아님에게 맡기겠다는 의중을 내비친 것이라고 봐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급하게 그분의 뜻을 예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누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
“네아님께서는 빛의 신을 모시던 대성전의 최고 장로였으며, 또한 일전에는 빛의 신을 그 몸에 스스로 강림시키기까지 하셨던 분입니다. 만약 빛의 신이 다시 네아님에게 돌아오라 명한다면, 그러한 뜻을 확고하게 거부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처음 입을 열었던 카스툴은 물론이고, 과일을 우적우적 씹으며 그들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지사 역시 놀란 표정이 되어 버렸다. 누에 치고는 제법 돌려 말한 셈이긴 하지만, 결국은 당신 같은 이가 과연 밤의 신을 대신해 우리들을 조율할 자격이 있느냐는 직설적인 힐난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 있는 각 종족의 대표들도 본래 빛의 신에게 속해 있다가 전향한 것은 마찬가지. 그래서 이것은 매우 민감하면서도 쉽게 언급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특히 다른 종족들과는 달리 네아는 빛의 신을 최측근에서 모시던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위치였기 때문에, 이 질문이 더 까다롭게 느껴진다.
자신들이야 빛의 신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으니 그렇다 쳐도, 당신은 최측근에서 빛의 신을 모시다가 전향한 것도 모자라서 우리들의 머리 위에 서려하는 것인가. 만약 빛의 신이 밤의 신이 그랬던 것과 같은 일을 하려 한다면, 그때 당신이 다시 마음을 돌려 우리들의 반대편에 서지 않으리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결국 누에의 공주의 질문은 이런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고견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네아는 자신의 의지를 밝히는 대신, 누에 공주에게 그렇게 물었다.
누에들은 모든 개체가 하나의 의식을 공유하는 놀라운 종족이다. 몇몇 장로들은 그들을 고작해야 우주 공간에서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필요할 때 아낌없이 소모할 수 있는 그런 종족 정도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네아는 이들의 사고 능력이 자신과 같은 단일 개체로 이루어진 종족들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반대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그대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겠느냐고. 어설프게 다짐이나 맹세를 하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나은 일이라 판단한 것이다.
눈빛을 알아보기 어려운, 일반적인 생물과는 다른 형태의 겹눈을 가진 누에 공주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런 네아를 살피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밤의 신께서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강력한 분이십니다. 저희가 비록 보호와 균형이라는 새로운 신을 모시게 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 분의 강력한 지배력 하에 놓여 있는 상태지요.”
“그렇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저희들은 그 분의 환심을 사기 위한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저희들은 다른 여타의 생명체와는 궤를 달리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흔히 다른 종족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쓰기도 어렵습니다. 더구나, 저희들은 이미 한 번 그 분의 뜻을 거스르려다가 호된 벌을 받은 일도 있기 때문에 더욱더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렵죠.”
“…”
뜻을 거스르려 했다니. 네아는 물론이고 보닉이나 클로리스도 놀란 표정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누에 공주는 담담하게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금부터 제가 하려는 제안은 그래서 저희 종족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미 한 번 미운 털이 박힌 상태이기 때문에, 이것은 어쩌면 저희 종족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일일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는 사실이 밤의 신께 알려지는 순간, 저라는 개체는 소멸을 면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깊이 생각하시어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클로리스의 대표인 지사는 물론이고 카스툴까지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설마, 이 누에 공주는 이 자리에서 새로운 반란이라도 모의할 셈인가.
“만약 그대들이 밤의 신께 반하려 한다면, 나는 그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곧바로 카스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여차하면 누에 공주를 공격하려는 자세를 취했고, 클로리스의 대표인 지사 역시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품에서 그들 특유의 국자 같은 형태를 지닌 무기를 꺼내 손에 쥐었다.
“제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얘기를 꺼냈군요. 사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누에 공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뒤, 다시 네아를 바라보았다.
“저희가 하려는 제안은 밤의 신께 반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그저, 저희 종족이 밤의 신께 좀 더 헌신할 수 있는 종족임을 보여드리고자 하는 것 뿐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별로 복잡한 건 아닙니다. 그저, 앞서 말하신 바와 같이 밤의 신을 모시는 주시자 가운데 한 분이신 네아님에게 저희 누에들이 힘을 실어드리고 싶다는 뜻일 뿐입니다.”
누에 공주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네아에게 말했다.
“우선 네아님이 쾌차하실 때까지 저를 비롯한 제 누이들이 당신을 돕고자 합니다. 이미 보호와 균형님께는 허락을 받았습니다만, 당사자이신 네아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래서 간곡히 청합니다. 저희들이 당신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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