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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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일을 하다 보면 별에 별 사람이 다 있다. 사람 상대하는 직업이 다 그렇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가끔은 아주 짜증나는 경우가 있다.
비가 온다. 비가 오면 알바들은 신경이 예민해진다. 어쩔 수 없다. 단지 비가 온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챙겨야할 사항이 훨씬 많아지기 때문이다.
“어, 춥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들어온다. 딱 보니 알겠다.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이 아니다. 추운 날씨에 바깥에서 기다리는 게 싫으니 안에 들어와 있는 경우다.
사실 그것만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솔직히 자신 같아도 바람 씽씽 부는 추운 날에 밖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보다야,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 백번 나은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 그냥 조용히 들어와서 기다리는 것뿐이라면 아무도 뭐라 안 한다. 가끔 그런 식으로 있는 것이 미안한지 따끈한 음료라도 하나 사서 마시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차라리 고맙다. 바깥이 추워서 그런데 잠깐 안에 있어도 되겠냐고 묻는 사람은 아주 훌륭한 인격자다. 어떻게 보면 그게 당연한 일인데도, 세상 일이란 건 그런 당연한 이치가 가끔 무시되곤 한다.
“아가씨, 이름이 뭐야?”
“네?”
“이름이 뭐냐고.”
“…”
심심하면 차라리 가판대에 있는 책이라도 읽어라. 마음의 양식, 좋지 않은가. 아, 물론 그렇다고 사지도 않을 거면서 읽는다고 포장 뜯으라는 얘기는 아니다.
“뭐야. 왜 대답을 안 해?”
“죄송합니다. 일 하는 중이라.”
“더럽게 비싸게 구네. 사람 무시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아하, 물건 안 사줬다고 그러는 거야? 옳지. 담배… 아니, 이제 담배는 못 사지. 에이씨. 망할 신인지 뭔지는 왜 갑자기 나타나서 이래라 저래라인지. 소주 팩 있지. 거기 마른안주랑 같이 좀 가져와 봐.”
이런 사람이 어딨냐고? 있다. 바깥 테이블에서 마시다가 청소하러 나갔을 때 술 한 병 더 가지고 오라고 시키는 경우면 차라리 다행이다. 안쪽 시식대에 앉아서 옆에 와서 좀 앉아보라는 놈도 있다.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이 남자, 살짝 취한 모양이다. 하긴 제 정신으로 이런 짓을 한다면 정상적으로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겠지. 아니, 술 먹고 해도 마찬가지인가.
“손님, 상품은 직접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하, 이젠 아주 가르치려 드네. 어디 알바 주제에 손님보고 이래라 저래라야.”
“…”
아, 혈압이 오르기 시작한다. 애초에 잘못했다. 맞상대를 하는 게 아닌데. 아니, 그건 좀 아닌가. 알바가 손님을 맞상대 하지 않고 어떻게 일을 하나. 이래저래 외통수다.
바깥에서 몇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웬 험상궂은 남자가 입구에서 버티고 선 채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고는 슬쩍 발걸음을 옮긴다. 이쯤 되면 명백한 영업 방해다.
무작정 경찰에 연락을 하기도 애매하다. 경찰이 드나들고 그러면 대번에 주위에 소문이 쫙 퍼지게 마련이고, 교육이 덜 됐네 어쩌네 하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파지는 건 힘없는 알바 쪽이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좋게 타일러서 보내는 쪽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이러시면 뭐? 어쩌라고?”
“하…”
“어쭈? 한숨을 쉬어? 뭐가 잘났다고… 어? 어어?”
멱살이라도 잡으려는 것처럼 알바에게 다가서던 진상 손님은 갑자기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는 흠칫하며 발걸음이 멈췄다.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손님, 제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시나요?”
“그, 그게…”
그냥 방긋 웃으면서 묻는데 어쩐지 술이 확 깨는 듯한 기분이 든다. 몽롱하던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넘어서 마치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이 온 몸에 솜털이 올올이 일어선다. 뭔가 이상하다. 뭔가 잘못 되었다. 그렇게 느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려는데, 갑자기 예쁘장한 알바의 등 뒤에서 검은 불꽃같은 것이 공작의 꽁지깃처럼 확 하고 펼쳐진다.
“추워서 안에 들어왔으면, 그냥 얌전히 있다가 나가세요.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거시나요.”
“어, 어어…”
어쩐지 눈에서 불꽃이 흘러나오는 듯한 모습에 놀란 남자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문에 닿자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문은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다.
“너 뭐야? 너… 히익!”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얼른 다시 몸을 돌리던 남자는 검은 불꽃같은 꼬리를 펼친 채 허공에 떠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알바의 모습에 기겁을 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갑자기 어디선가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편의점 안의 물건들이 마구 소용돌이치며 알바 주위에서 맴돌기 시작하자, 남자는 그저 덜덜 떨며 주저앉아서 그 모습을 홀린 듯이 지켜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에는 신이 존재하지.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들이 언제나 주위에 머물러 있지. 너의 불행은 나 또한 그런 존재 가운데 하나임을 미처 예상치 못했다는 점일까.”
“허억!”
남자는 어쩐지 억울했다. 무슨 얼어 죽을 신이 편의점에서 알바를 한단 말인가. 신인 줄 알면 내가 그랬겠냐고.
와들와들 떨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던 알바의 입이 다시 열었다.
“어차피 너 같은 자를 활보하게 두어봐야… 아얏!”
알바는 손을 들어 남자에게 무언가를 하려다가,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에게 꿀밤을 얻어맞고는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 보았다.
“빠아?”
“에효. 컷! 컷! 중단!”
뒤에서 나타난 자가 손을 내저으며 그렇게 소리를 지르자 어지럽게 물건이 휘몰아치던 편의점 안의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물론 벌벌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남자의 모습 역시 사라져 버린다.
“다희야.”
형진의 말에 어느 새 다시 귀여운 꼬마 숙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다희가 얼른 외쳤다.
“하, 하지만! 보셨잖아요! 그런 놈은 따끔하게 벌을 줘서 다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 해야 한다고요! 설마 그런 놈을 가만히 두고 보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억울하다는 듯이 외치는 다희에게 형진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손을 뻗어 자신의 귀여운 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물론 가만히 두고 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두고 볼 필요는 없지만, 네 방식은 잘못 되었다.”
“네?”
형진은 가만히 다희와 눈을 맞추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 방금 전과 같은 상황에서 네가 편의점 안을 다 뒤집어엎으면서 녀석에게 벌을 주었다고 치자. 그럼 그렇게 어지르고 부서진 물건은 결국 누가 치워야 하겠니.”
“그, 그건…”
“자칫하면 네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넘어서 세상이 시끄러워질 수도 있는 일이야. 지구처럼 발달된 문명이 발달한 곳이라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그런 일들이 사방에 퍼져 나가는데 채 하루도 걸리지 않을 거다.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초월적인 존재의 등장에 놀라서 네 정체를 밝히려고 혈안이 될 테고, 설령 네가 그런 자들의 시야에서 벗어? 수 있다 해도 지구를 들락거리는 다른 신들이 그로 인해 불편을 겪게 되겠지. 그렇지 않니?”
“…”
다희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앞뒤 분간 안하고 폭발해 버린 것은 자신의 잘못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벌을 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할 생각이 없다. 신이라면, 그런 식으로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자를 징벌하는 건 하나의 책임이자 의무와도 같은 일 아닌가.
형진은 그런 다희의 모습에 빙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벌을 주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그에 합당한 댓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다만, 벌을 주더라도 신답게 좀 더 세련된 방식이 있다는 얘기다.”
“세련된 방식이요?”
“그래. 다른 누구도 네가 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없도록. 치밀하고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는 거다. 단순히 잠깐의 화풀이를 위해 가게를 뒤집어엎는 것을 넘어서, 그 자로 하여금 다시는 같은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처리를 하는 거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두 부녀는 음모를 꾸미는 듯한 모습으로 눈동자를 빛내며 그렇게 얘기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다시금 자신들이 있는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자 화들짝 놀라며 얼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딴청을 피웠다.
“어, 당신. 왔어?”
“엄마. 에헤헤헤. 어쩐 일이세요?”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불청객은 다름 아닌 미엘이었다. 아홉 개의 검은 꼬리를 활짝 펼친 그녀는 얼핏 보기엔 다희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언니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일곱이나 되는 아이를 낳은 몸이다.
“진님.”
“응?”
“도대체 애 한테 뭘 가르치시려는 거에요?”
“그, 그게… 폭풍의 여신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에 관해서…”
“세련되게 인간들을 골탕 먹이는 방법이 신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인 건가요?”
“크흠.”
형진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설마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다희가 폭풍의 여신이 되기로 예정된 이후, 신들은 이 귀엽고 깜찍한 예비 신에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베풀기 시작했다. 누가 뭐라 해도 다희는 두 개의 우주를 지배하는 주신인 진의 딸이기도 하고, 신참 주제에 자신들을 까마득히 앞질러 버린 누군가와는 달리 아직 미숙하기 이를데 없는 어린 아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와 같은 교육 과정에는 아버지인 진도 참여할 수밖에 없는 일. 하지만 방금 전의 일처럼 진의 교육 방식은 다른 신들과는 여러 모로 다른 점이 많았다.
“당신은 딸을 악신으로 만들 셈이에요?”
“무슨 소리야? 악신이라니. 크흠.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관해서 조금 적나라하게…”
“…”
“미안.”
그렇지 않아도 영악하기가 다른 아이들과 비교조차 안 되는 다희다. 그런 다희에게 형진의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경험과 지식이 전수된다면, 그건 어쩌면 또다른 재앙의 시작일 수도 있는 일이다.
“진님.”
“응?”
“앞으로 다희의 교육에 참여하는 것은 금지에요.”
“엣! 그런 게 어디 있어!”
“불만인가요?”
“끄응…”
형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시무룩하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희가 슬쩍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빠아. 걱정 마세요. 제가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 게요.”
“그, 그럴래?”
“물론이죠.”
미엘은 그런 부녀의 모습에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버지와 딸이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어머니인 그녀가 싫어할 이유는 없다. 사실 어떻게 보면 형진을 제일 닮은 것이 다희이기도 하니, 이제와서 교육을 금지시킨다 해도 이미 늦은 일일지도 모르고.
“자아, 이제 그만. 청렴과 절조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다희야. 수업 준비하렴.”
“에엑! 나 그 아저씨는 좀…”
“좀?”
“…”
다희는 울상이 되어서 형진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이것만큼은 그로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미안하다. 딸아. 능력 없는 이 아빠를 용서해다오.”
“아니에요. 아빠 잘못이 아닌 걸요.”
둘이 그렇게 신파극을 찍고 있는 모습이라니.
“얼른 준비 안하니?”
“가, 갈게요! 간다고요!”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다희가 진정한 여신으로 거듭나는 일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모양이다.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엄마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끌려가는 다희의 모습에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앞서의 상황은 형진이 멋대로 연출한 것이므로 실제와는 다를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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