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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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그는 가만히 소파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째서인지 좀처럼 책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바로 주위를 오가며 집안을 청소하고 있는 릴 때문이다.
사실 릴의 콧노래 소리가 집중을 방해할 정도로 크냐면 그건 아니다. 청소를 한답시고 부산스럽게 주위를 돌아다니냐면 그것도 아니다. 애초에 그런 것이 문제였다면 결계를 친 방으로 들어가서 공부에 집중하면 된다. 하지만 크루그는 어째서인지 그런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재밌어?”
[네?]
요정 특유의 염동력을 써서 창문을 닦고 있던 릴은 갑작스런 크루그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재미있어요.] “청소가?”[이상한가요?] “무척. 대부분 그런 일은 귀찮아하게 마련이잖아.”
[그런가요?] “…”
이제껏 몇 번 대화를 나눠보지도 못했지만, 크루그는 이 작은 요정의 모습을 한 움리드 최후의 생존자와 얘기를 할 때면 어째서인지 자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집안을 청소하는 일 따위 누구라도 귀찮고 피곤한 일이 분명할 텐데, 어째서 이 녀석은 그런 걸 이렇게 즐겁게 할 수 있는 건지. 크루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 성에는 좀 더 재미있는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어. 그 중에서도 하필 선택한 것이 청소 같은 일이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야.”
[구체적으로, 어떤 일말인가요?]
“그건…”
막상 말을 하려니 말문이 막힌다. 당장 그녀가 평소에 어울려 지내는 것은 재미있는 것을 찾는 일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요정들. 그런 요정들 사이에서 지낸다면 어지간한 건 다 경험을 해봤을 것이 분명하다.
잠시 머뭇거리던 크루그는 문득 거짓된 천국이 떠올랐다. 왕성에서 지내는 것을 허락받기는 하였어도, 그곳을 오가는 것은 또한 특별한 허가가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항상 청소니 뭐니 하는 일 때문에 바쁘다면 분명 그곳을 가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막상 그곳이 왕성보다 재미있는 곳일까 하는 생각을 떠올려 보니 스스로도 영 답이 궁하다. 따지고 보면 크루그 ?黴킵?재미보다는 특별한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카들의 일을 떠올려 보면 그것은 자신에게만 국한된 일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재미를 느끼는 분야라는 건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당장 청소 따위를 재미있어 하는 이도 있는 마당에.
크루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이렇게 답했다.
“거짓된 천국이라는 곳에 대한 걸 들어본 적이 있나?”
[아… 공주님들이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형진과 함께 엘리시온을 경험한 아이들은 이 새로운 세계에 푹 빠져 버렸다. 이를테면 거짓된 천국이라는 곳이 즐거운 장소라는 식으로 각인이 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알에서 깨어난 오리 새끼가 처음 본 무언가를 어미로 인식하는 것처럼, 어린 아이들 역시 처음 겪은 무언가에 대한 인식이 평생토록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단순히 맛있게 먹은 음식부터 시작해서, 이번처럼 즐겁게 보냈던 시간이나 장소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기억들은 평생토록 이어지며 간단하게는 취향부터 복잡하게는 성격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번에 형진이 아이들에게 거짓된 천국을 경험시켜 주었던 일들은 여러모로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 확실하다. 크루그는 그런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 특별한 요정에게 지금까지 알지 못한 무언가를 알려줄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실 이건 크루그를 아는 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여동생인 카트린을 제외하고는 크루그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 먼저 움직인 경우 자체가 이제껏 없었기 때문이다.
[굉장히 즐겁고 재미있는 곳이었다고 자랑을 하셔서 조금 궁금하기는 하지만, 저는 드나들 수가 없는 곳이라…]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크루그가 한 마디를 툭 던진다.
“데리고 가줄까?”
[네?]
“가보고 싶다면, 데리고 가주겠다는 얘기야.”
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저를요?] “그래.”[정말요?] “…”
거듭 확인하듯 묻는 릴의 모습에 크루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 말을 믿기 어렵다는 건가?”
작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투로 그렇게 묻자, 릴은 당황해서 얼른 손을 파닥거리며 내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구요. 정말 저 같은 것을 데리고 가주시는 건가 싶어서요.] “…”[죄, 죄송합니다.]
크루그가 다시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고 릴은 급하게 다시 한 번 사과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크루그의 심기가 불편해진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저 같은 것이라니.
릴이 자신의 거처를 전담하게 되면서, 크루그는 슬쩍 그녀에 대한 것을 확인했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넘어서, 알지 못하고 있던 것까지 도서관에 보관된 정보를 열람하는 식으로 확인을 해보았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지만, 그녀는 링월드라는 무지막지한 구조물을 만든 움리드의 마지막 생존자이다. 게다가 그녀는 이전에 성녀로까지 불리던 존재다. 물론 그 성녀라는 것이 그녀의 능력 같은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직 티끌 하나 찾을 수 없는 순백의 외모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는 하나, 분명 거대하고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강력한 종족에서 가장 존귀한 이로 떠받들여지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이제 와서 그런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듯한 표현이라니.
고작해야 얼마 되지 않는 땅덩이와 작은 인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이 속한 나라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콧대를 세우고 다니는 왕족 나부랭이들의 모습을 숱하게 봐왔던 크루그로서는, 그보다 훨씬 크고 강대한 문명의 대표자 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는 그녀의 모습이 아무래도 심하게 거슬렸다.
단순히 마음에 든다 아니다를 떠나서, 뭔가 보이지 않는 티끌조각이 눈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자꾸만 거슬린다. 간단하게 빼버릴 수 있으면 진작에 그랬겠지만, 그러지를 못하니 답답하고 짜증나는 기분. 릴을 볼 때마다 크루그가 느끼는 감정이 꼭 그와 같았다.
“형. 부탁이 있어.”
“응? 뭔데?”
다짜고짜 통신을 연결해 그렇게 말하자 형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릴이라고, 움리드의 마지막 생존자 알지?”
“알지. 물론 알다마다.”
“그녀와 함께 거짓된 천국에 들어가 보고 싶어.”
“갑자기 왜? 뭔가 문제라도 있어?”
“그냥. 그럼 부탁해.”
“잠깐! 무슨 영문인지나…”
형진은 뭔가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으려드는 기색이었지만, 크루그는 더 이상 답하지 않고 통신을 끊었다. 릴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시 자신에게로 시선을 던지는 크루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크루그는 어쩐지 우쭐해졌다. 두 개의 우주를 손 안에 넣고 주무르는 위대한 신이 자신의 말 몇 마디에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에 이런 식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어쩐지 유치하게도 느껴지지만,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릴의 시선과 마주하니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떠올려 버린다.
하지만 크루그는 또한 알지 못했다. 바로 그 형진이 카트린이라는 그의 또다른 혈육과 함께 자신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히죽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 모든 광경이 그대로 고화질 삼차원 입체 영상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절대로 알 수가 없었다.
“준비는 끝났어. 자, 그럼 같이 갈까?”
[네? 하지만…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못 가겠다고?”
[…]
릴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흥미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라니. 게다가 그냥 잠깐 바깥을 산책하는 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져 버리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왜?”[일을 마쳐야 해서요.] “…”
뭔가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대화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초점이 어긋나 있다고 해야 하나.
이번엔 크루그가 조금 불만스런 표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일 같은 건 집어치우고 당장 따라 나서라는 식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어쨌든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은 아니니까 굳이 조급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잠시 기다리자 릴은 예정된 일을 모두 끝마친 뒤에야 그에게 다시 다가왔다.
“끝난 거야?”
[네. 그런데…]
“왜?”
[정말 괜찮은 건가 싶어서요. 신께 제대로 말씀을 드리는 편이.]
“괜찮아.”
이제 와서 다시 연락을 해서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도 우습고, 무엇보다도 형진이 그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견디기도 어렵다. 사실 형진이라면 자신의 이런 상황을 진작에 살펴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다시 연락을 해서 묻지 않는 걸 보면 거의 틀림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한 생각을 떠올리자 크루그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괜히 잠깐의 충동으로 쓸데없는 일을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형진을 나중에 캐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도 난감하다.
젠장.
역시 괜한 일을 저질러 버린 걸까.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머리 속에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이런 저런 잡념들을 떨쳐 버렸다.
애초에 딱히 뭔가 뒤가 켕기는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자신의 거처에서 일에만 파묻혀 지내는 녀석이 불쌍해서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하는 것뿐이다.
그렇다. 딱히 문제될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당장의 크루그로서는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탈탈 털듯이 저어 보이는 크루그의 모습에 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이성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 경험이 없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 누군가에게 흥미나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쑥맥남과, 그런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둔감녀. 이것도 나름의 천생연분이 아닐까.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끝난 거면 이리 와.”
[네?]
“내 어깨로 와서 앉으라고.”
[왜요?]
“…”
크루그는 형진이 여신들을 어깨 위에 얹고 다니는 모습이 생각나서 그렇게 말했지만, 릴은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사이즈부터 차이가 나는데다 가장 기초적인 스킨십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부터 이 모양이니, 지켜보는 이들로서는 절로 가슴이 답답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역시나, 뭔가 초점이 어긋나 있다.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그게 편하면 그러던가.”
싫다는데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는지라 크루그는 그렇게 말하고 거짓된 천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지만, 이 모든 것을 염탐하고 있던 그의 남매들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고 말았다.
“글렀네. 글렀어. 저래서야 어디 가슴이 두근거릴 기회가 생길까.”
“그, 그래도 사람은 저마다 다른 법이니까…”
“그렇다면야 다행이겠지만.”
“콜라 더 드실래요?”
“부탁해. 얼음 가득 채워서.”
“네.”
그런 식으로 형진과 카트린이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팝콘과 콜라를 즐기며 자신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리라고 까지는 생각도 못한 채, 영상 속의 크루그는 릴을 데리고 거짓된 천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한 해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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