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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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
“어쩜 좋아!”
카트린이 예상했던 대로, 크루그의 웃는 모습은 왕족 아가씨들에게 대호평이었다. 모르긴 해도, 이들 중에 몇몇은 오늘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크루그가 어째서 여자를 멀리하는지, 카트린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녀 역시 다를 바가 없는 처지니까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트린은 이 아가씨들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본래대로라면 자신 역시 같은 입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더해, 그들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바꿀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점 역시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은 너무 많아서 문제고, 또 한쪽은 너무 없어서 문제고. 어째서 그녀의 오빠들은 도대체 중간이란 것이 없는 건지.
하지만 예전에 수빈이나 승희 같은 길드원들을 밀어붙였다가 실패한 전례가 있어서 다시 누군가를 접근시킨다거나 하는 일은 카트린도 하지 않고 있다. 어쨌든 당사자에게 그럴 마음이 없는 이상, 누군가가 옆에서 아무리 부채질을 해봐야 소용이 없는 일임을 그녀도 확실히 이해한 것이다.
하나 뿐인 여동생이 그런 식으로 자신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크루그는 공개 파티를 몇 번 더 휘저은 뒤에야 다시 왕성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어서 오세요. 피곤하시죠? 일단 씻으세요. 준비해 두었답니다.]거처로 돌아오니, 작은 요정 하나가 그를 맞이한다.
“고마워.”
크루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욕실에 들어가 땀에 젖은 몸을 따뜻한 물로 씻는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뒤 거울을 보고는 어느새 푸르스름해진 수염을 깎는다. 아직 수염이라고 하기 보다는 거무스름한 솜털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미리미리 깎아두는 편이다.
면도까지 마치고 가운을 걸친 채 밖으로 나오자, 요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잘 마른 옷을 건넨다.
[오늘은 일찍 돌아오셨네요?] “어쩌다 보니까.”크루그는 일상적으로 대답을 하다가 자신을 향해 방긋 웃음 짓고 있는 요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 그를 수발하는 요정들이라고 해봐야 다 거기서 거기지만, 어쩐지 이 요정은 조금 낯이 익다. 외모보다는, 수다스럽고 부산스러운 일반적인 요정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어째서인지 익숙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크루그의 시선이 조금 부끄러웠는지, 요정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묻는다. 확실히, 일반적인 요정들의 반응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어쩐지 보통 요정들 같지 않구나 싶어서.”
[아하.]
그제서야 요정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그렇게 느껴지나 보네요. 하하…] “무슨 말이지?”[그게…]
크루그가 느낀 대로, 이 요정은 처음부터 요정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본래는 다른 종족이었으나, 형진에 의해 요정의 모습을 지닌 아바타를 받은 존재였던 것이다. 크루그가 묘하게 이질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나 할까.
“아… 그 움리드의 마지막 생존자가 바로 너였구나.”
[네.]
“이름은?”
[릴이라고 합니다.]
이름 자체는 요정들과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크루그는 어쩐지 차분하면서도 편안한 그녀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좋은 이름이군. 평소에도 내 거처를 살피는 건가?”
[그건 아니고, 돌아가면서 맡아보는데 오늘은 다른 분이 바쁘다고 하셔서.]
“그랬군.”
크루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딱 봐도 어찌된 일인지 보인다고나 할까.
요정들에게 있어 크루그는 그리 인기 있는 존재는 아니다. 항상 부산스럽게 뭔가 재미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그들에게 있어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말수도 적고 무뚝뚝한 크루그는 인기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의 거처를 드나든다고 해봐야, 다른 요정들과 수다 떨 재료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으니 당연히 기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릴이 그의 거처를 자주 찾게 되는 이유도 결국 그래서다. 모습은 비슷해도 착하고 순진한데다 성실하기까지 한 그녀는 사정이 생겨서 당번을 바꿔 달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하는, 어떻게 보면 요정들에게 있어서 호구로 낙인 찍혀 버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크루그로서는 그런 릴의 모습이 조금 안 되어 보이면서도, 차라리 잘 되었다는 느낌 또한 받고 있었다.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그에게 있어, 원하지 않는데도 자꾸만 주위에서 소란을 야기하는 요정들의 존재는 귀찮고 껄끄러운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요정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요정과는 다른 릴의 존재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앞으로 네가 이곳을 맡아주는 건 어떨까?”
[네?]
의외의 제안에 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그 녀석들은 앞으로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널 이곳으로 보내려 할 거야. 나로서도 다른 시끄러운 녀석들보다는 네쪽이 편한 것이 사실이고. 서로의 이해가 그렇게 들어맞는다면, 차라리 전담을 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아…]
릴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른 요정들이 이곳을 기피하는 이유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크루그의 거처를 살피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건, 어쩐지 왕성 안에서 혼자 붕 떠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뭐랄까. 예전에 성녀로 떠받들여지던 자신을 떠올리게 만든다고나 할까. 물론 크루그에게는 그녀에게 없던 따뜻함 넘치는 가족들이 충분히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은 어쩐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제안을 듣고도 잠시 아무런 말이 없는 릴의 모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크루그는 다시 몇 가지 제안을 덧붙였다.
“네가 이곳을 전담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 이득이 있어.”
[이득이요?]
“그래. 우선 그 시끄러운 녀석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너에게 일을 떠맡기는 일이 그만큼 어려워질 수밖에 없지. 그건 바꿔 말하면 네가 다른 무언가에 투자할 수 있는 자유 시간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야.”
[자유 시간…]
사실 릴은 딱히 자유 시간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를 않고 있었다.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그녀에게는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크루그의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확실하게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딱히 자유 시간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아요.] “뭐?”자유 시간이 필요 없다니, 크루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릴은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은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왕자님께서 저를 필요로 하고 있으시다는 것은 확실하게 이해했습니다. 말씀대로, 제가 이곳을 맡도록 할게요. 그럼 되는 거죠?] “그거야… 그렇지만.”[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달리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종을 울려주세요.] “…”
크루그는 자신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물러가는 릴의 뒷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어쩐지 한 방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랄까. 굳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니 애초에 그녀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조차 의문이긴 하지만, 어쩐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신처럼 계산적인 건 아니라는 듯한 말을 들은 느낌이다.
다음 날도 어김없이 릴은 그의 거처를 찾아 청소를 하고 옷을 세탁하는 등의 일을 했다. 하지만 크루그도 릴도 일과 관련된 몇 마디 말 이외에 다른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지금까지 크루그가 바래왔던 이상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굳이 대답하고 싶지도 않은 말을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댈 필요도 없고, 딱 필요한 부분에서 딱 필요한 만큼의 대화만 오고가는 정도니까 번거로울 이유도 없다.
처음 하루 이틀 정도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크루그는 그러한 상황이 어째서인지 조금씩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만족스러움이 계속해서 유지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이유를 알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렇지도 않으니 크루그는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교관님이… 요새 어쩐지 짜증을 내는 빈도가 늘지 않았어?”
“너도 느꼈어?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구나.”
“무슨 일이지?”
“글쎄.”
이렇게 되자 당장 피해를 입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왕족 나부랭이들이다. 물론 크루그가 그들을 갈구는 거야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지만, 갈굴 때 갈구더라도 그에 합당한 이유 정도는 갖추는 것이 보통인데 요즘 들어 어쩐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뜬금없이 갈굼이 날아들기 시작한 탓이다.
“오빠.”
“응?”
“요즘 뭐 짜증나는 일 있어?”
“뭐?”
직접 크루그에게 따질 엄두는 못 내고, 그나마 만만한 카트린에게 물어보았던 모양이다. 카트린 역시 수련을 지켜보며 요새 그녀의 오빠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아차리던 상황이라 그런 식의 물음을 받기가 무섭게 이런 식으로 크루그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짜증이라…”
하지만 당사자인 크루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그런 식으로 짜증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렇게 주위에 민폐를 끼치고 있었음을 그제서야 비로소 인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크루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최근 자신의 환경에서 이전과 바뀐 부분 한 가지를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오빠?”
그 모습을 옆에서 빤히 지켜보던 카트린이 그렇게 부르고서야, 크루그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하게 해서 미안.”
“…”
크루그는 그렇게 얼버무리고 급히 자리를 떠났지만, 카트린은 그의 대답과는 달리 뭔가 있음을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만약 카트린이 철없는 다른 또래의 여자 아이들 같았다면 그 부분을 들쑤시고 다녔겠지만, 그녀는 괜히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는 대신 형진을 찾아가 크루그의 그같은 변화를 알렸다.
“그 녀석이?”
“네. 아주 수상해요.”
“호오. 그거 재미있군.”
형진은 곧바로 크루그의 주위에 생긴 변화를 조심스럽게 알아보았고, 어렵지 않게 그의 거처를 릴이 전담하게 된 것을 확인했다.
“요 녀석 봐라.”
조사 결과를 확인하자 카트린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다.
“어쩌죠?”
그녀의 질문에 형진은 피식 웃었다.
“어쩌긴. 일단은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거지. 그 녀석 성격에 괜히 옆에서 들쑤셨다가는 될 일도 안 될 테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 둔탱이 오빠라면 자신이 왜 짜증을 내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데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아무튼 우리는 녀석이 손을 내밀면 그때 모르는 척 그걸 맞잡아 주면 되는 일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그렇게 말한 뒤, 두 오누이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괜히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조용히 모르는 척 하기는 해도, 그것이 이런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지켜보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이든 간에,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크루그가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가족 된 입장에서라도 이것은 반드시 두 눈을 부릅뜨고 따뜻하다 못해 열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지켜봐야만 한다. 물론 당사자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당장 눈앞의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크루그가 그렇게까지 주위를 살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 작품 후기 ==========
간단하게 맺어지도록 놔둘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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