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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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그는 왕자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왕성에서 곱게 길러진 그런 왕자들과는 다르다.
그는 아직 철이 들기 전에 큰 일을 겪었다. 그때의 혼란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여동생과 단둘이 왕성을 빠져 나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공포와 죽음을 받드는 집행자가 되었다. 한때는 망국의 왕자라고 불리며 라야바르트 왕실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그래서 타국의 정략에 의해 어릿광대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 왕자의 역할을 떠넘기기까지 했던, 그런 존재였으나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도 너무 크게 바뀌고 말았다. 그가 반쯤 어거지로 왕자의 역할을 떠넘겼던 이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빠아! 이거 드세요.”
“어디. 오오오오! 아주 맛있구나.”
“헤헷.”
귀여운 조카들에게 파묻히다시피 둘러싸인 채로 헤벌레한 표정을 지은 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저 바보 같은 남자. 그가 바로 자신이 억지로 형의 역할을 떠넘긴 바로 그 사람이다. 아니,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는 사람이라는 식의 명사를 사용하는 것조차 어색할 정도로 거창한 무언가가 되어 버린, 바로 그런 존재라고나 할까.
“왜 또 그렇게 뚱한 표정을 짓고 있어요?”
“내가 뭘?”
잘못 만지면 픽 하고 쓰러질 것만 같았던, 그래서 너무나 안쓰러웠던 그의 여동생이 지금과 같이 예쁘고 건강한 모습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저 바보 덕분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동 스킬조차 제대로 못 익혀서 다른 집행자들에게 짐짝처럼 옮겨지던 그런 남자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버린 것일까. 질투라는 말조차 쓰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대단한 존재가 되어버린, 크루그에게 있어 형진은 그렇게 스스로를 조금은 자괴감 들게 만드는 존재인지도 몰랐다.
조카들은 배불리 먹고 나자 졸린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흥겹게 즉석에서 벌어진 잔치를 즐기던 낚시꾼들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조심스럽게 자리를 정리했고, 형진은 그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크루그와 카트린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길드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도와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당연히 해야할 일인 걸요.”
길드성 안쪽에 마련된 침실에 아이들을 데려다 놓는 일이 끝나자, 크루그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 나왔다.
평소에 그는 왕족 나부랭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만, 하루 종일 그것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왕족 나부랭이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분야는 사실 따로 있었다.
“거미숲 딜러 모십니다!”
“사교도 던전 가실 분!”
“초행입니다! 인던 가는데 끼워주실 분! 길드 가입도 원해요!”
광장은 이런 저런 유저들이 각자의 목적에 맞는 파티를 구하기 위한 장소로 흔히 이용되는 곳이다. 크루그가 이곳을 찾은 것은 바로 인던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사실 그럴 생각만 있다면 길드성에서 왕족 나부랭이들에게 한 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수십명은 족히 되는 파티, 아니 공격대를 꾸릴 수도 있다.
그들 대부분은 본래 형진이라는 인물과 친목을 다지는 것을 목적으로 보내졌으나, 형진이 그야말로 손이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신분이 되어 버린 탓에 이제 그들의 목표는 크루그와 카트린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 중에서도 크루그는 장차 엘 파르드의 국왕으로 올라설 것이 확정적인데다 묘하게 차분하고 염세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탓에 각국의 공주나 왕녀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크루그로서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질 뿐이다. 뭐랄까. 어릴 때부터 사람의 어두운 면을 너무 많이 본 탓에 그녀들의 진심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자신이 아니라 왕자나 장차 얻게 될 국왕이라는 자리를 얻을 남자를 바라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그가 그저 왕자의 삶을 이어갔더라면 그런 식의 정략적인 관계도 그냥 납득하고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의 위치는, 비록 스스로가 얻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럴 생각이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반려를 얻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적어도 그가 싫다는데 억지로 누군가와 결혼시킬 수 있는 자는 고작해야 형진 정도에 불과하고, 그가 아는 형진은 자신에게 그런 일을 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다.
“거미숲 가신다고요?”
“네! 딜러세요?”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어느 정도나…”
“혹등거미 정도는 원킬 낼 수 있습니다.”
“와! 정말요?”
거미숲에서는 여러 종류의 거미들이 출몰하지만, 그 중에서도 혹등거미는 꽤 귀찮은 쪽에 속한다. 등에 혹이 불룩하게 솟은 이 거미는 중거리에서 독액을 쏘아내는 공격을 하는데,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꽤 골치아프기 때문에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몹이라 할 수 있다.
혹등거미를 원킬 낼 수 있다는 말에 파티원을 모으던 남자는 두번 따지지도 않고 크루그를 자신의 파티에 초대했다.
“근딜이신가요?”
“네.”
“탱커는 제가 할 예정이고, 힐러도 있으니 원딜로 두명 정도 더 모으면 되겠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크루그는 조금 도도해 보이는 모습의 힐러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네고는 한쪽에 조용히 서서 파티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탱커와 힐러가 이미 갖춰져 있는 상태라 그런지는 몰라도, 원딜 두 명은 순식간에 채워졌다.
“길드명을 가렸네.”
“괜찮은 건가.”
길드명을 비공개로 해놓은 크루그를 보며 원딜 두명이 그렇게 쑥덕거렸다. 간혹 저렇게 길드명을 가린 것을 문제 삼으며 시비를 거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혹시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지만, 저들에게는 아쉽게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파티는 곧바로 워프 게이트를 타고 이동하여 흔히 거미숲이라고 불리는 인던으로 향했다.
인던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던전과는 달리, 거미숲은 동굴이 아닌 개방된 숲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안개와 나무들로 들어찬 이곳 역시 자칫 방심했다가는 길을 잃기 쉬운 것은 마찬가지. 더구나 보스의 위치가 항상 바뀌는 특성 때문에 공략이 까다로운 곳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찾는 것은, 많은 수의 몬스터가 짧은 시간 내에 다량 출현하기 때문에 빠르게 레벨업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초행은 없으시죠? 혹시 계시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탱커 겸 파티의 리더 역할을 맡은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사실 초행인지 아닌지는 일단 들어가 보면 확연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 남자는 그런 파티원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던의 입장을 시작했다.
“그럼 들어갑니다.”
인던으로 입장하자 희뿌연 안개에 휩싸인 숲의 모습이 드러난다. 크루그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라이언하트를 발동했다.
화악!
순간의 그의 몸 주위로 작은 돌개바람이 일어난다. 하지만 파티원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현실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겠지만, 엘리시온 안에서는 스스로에게만 적용되는 버프 스킬을 전투 전이나 도중에 사용하는 것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이순간 크루그가 발동한 라이언하트는 보통의 스킬이 아니다. 천하에 둘도 없는 몸치조차 일순 숙련된 전사로 만들어주는, 실로 사기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스킬이다.
“옵니다.”
선두에 선 남자의 말과 동시에 마치 갈대밭에 바람이 불어올 때처럼 스산한 울림이 숲 전체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물론 이것은 정말로 바람이 불어오면서 생긴 소음이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 작고 치명적인 생명체 다수가 한꺼번에 풀숲을 헤치고 달려오면서 생기는 소음이었다.
“어?”
작은 거미들을 차단하기 위해 마법을 준비하던 법사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자신의 앞에 서있던 크루그의 모습이 아차하는 순간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탓이다.
그렇게 잠시 당황한 탓에 마법을 쓰는 타이밍이 조금 늦어버렸고, 그 틈을 비집고 몇 마리의 거미들이 파티원들에게 뛰어들었다.
“어딜!”
탱커 역할의 남자가 순간 커다란 고함을 터트린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목소리를 돋워 사기를 올린다거나 하는 식의 겉치레가 아니다. 명백한 스킬, 그것도 적을 끌어들여 자신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키는 스킬이다.
불의 벽이 솟아오르기 전에 그곳을 돌파한 거미들은 순간 방향을 바꾸어 탱커에게로 향했고, 그렇지 않아도 기다라고 있던 남자의 이어진 스킬 한 번에 순식간에 짓뭉개지고 말았다.
“준비하세요!”
“오케이!”
애초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 작은 거미들은 숫자를 빼면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진짜는 지금부터 모습을 드러낼 병정거미와 혹등거미의 조합. 특히 큰뿔 병정거미를 선두로 하고 나타날 때는 숙련된 파티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한다.
잠시 동안 유지되던 불의 벽이 사그라들자, 곧바로 청동색으로 빛나는 외골격을 가진 거미들이 돌진해 온다. 바로 병정거미라고 불리는 녀석들이다.
앞서의 작은 거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외피를 가진 녀석들이기 때문에 파티원들은 긴장하며 자신의 무기를 움켜 쥐었다.
“으샤앗!”
역시나 이번에도 앞장선 탱커가 기합 소리로 놈을 끌어들였고, 그렇게 거미들의 시선이 바뀌자 곧바로 원딜들의 공격이 쏟아져 하나씩 차근 차근 박살내 버린다.
이렇게 차근차근 한 마리씩 처치하면 사실 별로 어렵지 않게 공략할 수 있지만, 문제는 여기에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혹등거미가 가세했을 경우다. 초행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게 되는 것도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인데, 원거리에서 쏟아지는 독액 공격에 우왕좌왕하며 공격 목표를 바꾸거나 하면 확실하게 초행이라고 봐도 된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많은 적이 몰려오더라도 탱커와 힐러의 조합을 믿고 우직하게 일점사를 이어가는 것이 가장 확실한 공략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이쯤되면 혹등거미의 독액 공격이 쏟아져 나와야 하는데, 그런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게다가, 당연히 탱커 옆에서 싸우고 있어야할 근딜 역시 앞서 사라진 뒤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헉!”
뭔가가, 폭풍을 몸에 휘감은 검은 빛의 무언가가 숲을 종횡하고 있었다. 손 끝에서 번쩍이는 빛이 한 번 나타나면, 목표를 잃고 우왕좌왕하던 거미들이 픽픽 쓰러져 버린다. 혹등거미들의 원거리 공격이 이어지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놈들에게 있어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바로 자신들 속에서 제멋대로 휘젓고 돌아다니는 검은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우와아…”
그냥 휘젓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자신에게로 거미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놓고 파티원들이 해치우기 적당한 수준으로 놈들 가운데 몇몇을 흘려보내고 있는 중이다.
사실 크루그 정도의 실력이면 어디든 고정 파티로 들어가서 편안하게 인던 플레이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절대 고정 파티 같은 것에 들어가지 않고 항상 공개 파티에 들어간다.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개 파티의 경우, 이른바 헬 파티가 될 확률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다른 인던과는 달리 거미숲을 선호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적당히 자신의 포지션만 지키면 대부분 무난하게 클리어하는 다른 인던과는 달리, 거미숲에서는 파티원 하나의 돌출 행동만으로도 순식간에 지옥이 연출되곤 한다. 물론 숙련된 파티원들이 우연찮게 모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경우엔 크루그가 직접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바로 지금처럼.
“헉헉…”
“뭐, 뭐야… 끝이 없어.”
원래는 이렇게 거미들이 끝도 없이 몰려들거나 하지 않는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웨이브가 진행되면 그 틈을 타고 휴식을 취한다거나 정비를 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번에는 거미들이 끝도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제껏 거미숲을 제법 많이 공략해본 그들로서도, 이곳에 이렇게 많은 거미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건 크루그가 일부러 거미들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전부 상대할 이유가 없는 거미들까지, 숲을 헤집고 다니면서 전부 몰아와 파티원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식이다. 본래대로라면 그런 미친 플레이를 할 경우 버티지 못하고 전멸해 버리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얄밉게도 크루그는 파티원들이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만 딱 숫자를 조절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악랄한 장난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행동. 하지만 이건 크루그에게 있어 나름의 수련이었다. 앞으로 수많은 자들을 이끌어가야할 그로서는, 누구 하나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그 모든 구성원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기를 원하고 있었다. 형진이 말로서 그 모든 것을 행한다면, 크루그는 행동으로서 이루어 내기를 원하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당하는 입장에서는 무슨 개소리냐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적어도 이것이 일반적으로 쉽지 않은 일임은 부정할 수 없다. 파티원들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전멸해버려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렇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채,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헉헉 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파티원들은 어느 순간 인던의 공략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내팽개쳐지듯 밖으로 나오자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두 발로 딛고 설 기운은 커녕, 말을 할 기운조차 남지 않은 탓이다.
“수고하셨습니다.”
크루그는 지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파티원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한 마디를 하고는 파티를 해제한 다음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득하게 차오른 경험치를 바라보며 요즘 은근하게 소문이 도는 인던의 유령에 대해 떠올렸다.
“마, 맙소사…”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경험치가 가득 채워진 건 좋은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진이 쏙 빠지는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파티원들은 크루그의 모습을 떠올리려 했으나, 뒤늦게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그의 인상착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아 버렸다.
그래서 악마가 아니라 유령이라고 불리는 건가.
정말로 유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은 다시 한 번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 작품 후기 ==========
눈이 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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