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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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탁
가게라. 제랄딘의 말에 형진은 물론이고 황홀경에 빠져 있던 다른 이들도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상상했다. 형진이 만들 가게의 풍경을.
아마도 그 가게는 지금까지 보던 다른 음식점들과는 다를 것이다. 주방은 구석에 폐쇄되어 있지 않고 다른 이들이 그 안의 일거수 일투족을 볼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을 것이다. 중앙에는 활활 솟구치는 불길이 가득한 화덕이 있을 것이고, 그 화덕 앞에 선 한 남자가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리라. 손님은 처음 보는 형태의 식당에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남자가 불과 식재료로 만들어내는 화려한 마법에 홀리고, 이내 만들어진 요리의 맛에 취할 것이다. 그리고 감격하며 말할 것이다. 이제야 진정한 요리를 맛보았노라고.
하지만 그런 상상은 쓴웃음을 머금은 형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 대답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글쎄요.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완곡하긴 하지만 분명한 거절. 제랄딘은 다급한 목소리로 다시 권했다.
“그리칸이라면 몰라도, 이곳이라면 아무리 가격을 높게 책정한다 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자금은 걱정 마세요. 제가 모아둔 지참금을 털어서라도 그럴 듯한 가게를 만들어 드릴 테니.”
“아, 아가씨.”
지참금을 털겠다는 말에 시녀들은 물론이고 미엘마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제랄딘은 오히려 당당했다.
“왜? 어차피 그건 필요 없는 돈이야.”
“하지만…”
“결혼을 안 하겠다는 얘기가 아니야. 돈 따위에 묻혀 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결혼을 하겠다는 얘기지. 게다가 이건 투자야. 생각해봐. 진님이 하는 음식점이 망하겠어?”
“…”
그렇다. 투자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경우, 형진이 하는 음식점의 성공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제랄딘이 슬쩍 개점 행사에 모습만 드러내도 수도의 청년 귀족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고, 일단 한 번 맛을 보면 두 번 다시 빠져 나갈 수 없는 거미줄에 묶인 것 같은 신세가 될 테니 말이다. 일단 그렇게 트렌드를 확립하고 나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왕국 최고의 요리사가 될 수밖에 없다. 투자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때, 형진의 요리점만큼 확실한 성공이 보장되는 사업이 또 있을까.
이렇게까지 말하니 형진으로서도 살짝 마음이 동하기는 한다. 장인이 끝이라면 모르지만, 그 위에는 명장과 달인이 존재한다. 그 경지는 단순히 실력만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곳. 이런 식으로 자기 가게를 내서 이름을 알린다면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듯 여기에는 반대급부가 따르게 된다. 자칫 하면 다른 모든 것을 집어 던지고 요리에만 매진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요리를 수련한 이유가 무엇인가. 전투든 다른 생활 스킬이든 간에 좀 더 효율적이고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한 도핑이 필요해서였다. 하지만 요리점을 내고 그것의 관리에 집중하게 되면 단순히 끼니 때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단란한 식사를 나누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게다가 너무 얼굴과 이름이 드러난다는 문제도 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던 형진이었지만, 역시나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고맙습니다만, 역시 가게를 내는 건 현재로서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장은 보너스 기간이기도 하고.”
“…”
보너스 기간? 다른 이들은 이게 뭔 소린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집행자들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점은 언제든 낼 수 있지만, 업적 보상으로 받은 두 배 보너스 기간은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니 당장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 당장은 힘들어도 나중엔 가능하다는 뜻인가요?”
“언젠가는요.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필요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아…”
더 높은 경지라니.
형진의 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충격을 받았다. 지금의 요리 실력만으로도 이미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판인데, 이것보다 더 높은 경지라니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저…”
그때, 어느 틈엔가 테이블 한 켠을 차지 한 채 형진이 만든 스테이크를 오물오물 먹고 있던 유아가 입에 담긴 음식을 꿀떡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조신한 행동이라 카트린조차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자신에게 갑자기 시선이 쏟아지자 유아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이런 맛있는 음식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겨 봤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저만 해도, 진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곰팡내 나는 푸석푸석한 밀가루 덩어리를 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테니까요.”
“…”
과연 호구신의 사제. 이 상황에서도 흘러넘치는 저 박애 정신이라니.
하지만 그녀의 말은 의외로 큰 호응을 받았다. 바로 제랄딘이 데리고 온 시녀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차마 주인인 제랄딘이 있어서 직접적으로 말은 못하고 있어도, 주먹을 불끈 쥔 채 틀림없는 얘기라는 듯이 단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은 어쩐지 좀 무섭게 보일 정도다.
유아의 말에 형진은 역마차를 타고 그리칸으로 오던 중에 맛 봤던 스티로폼 씹는 느낌의 빵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 빵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끔찍하다.
“흠…”
유아의 말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형진은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요?”
“수도 라야에 체재하는 동안, 점심시간에만 잠깐 노점을 해보는 겁니다. 전야제가 취소되었다고는 해도 토너먼트를 구경하기 위해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있을테고,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점심은 밖에서 해결을 할 겁니다. 저녁 시간은 너무 붐비는 데다 제가 일정이 있어서 힘들고, 점심시간 때 간단한 식사를 판매하는 정도라면 작은 노점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보통 사람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메뉴라면 더욱 좋겠죠.”
이거다.
형진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조금 안타까워하고 있던 제랄딘은 형진의 말을 듣는 순간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형진의 실력으로 초라한 노점 같은 걸 여는 건 아까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간단한 음식이라 해도 일단 맛을 보면 누가 있어 형진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앞서 말한 대로 이 시기에는 지방에서 많은 이들이 토너먼트를 관람하기 위해 상경한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취향의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얘기. 그들 중에는 수도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즐기고자 하는 귀족들도 있을 것이요,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고 싶은 돈 많은 상인도 있을 것이다. 모처럼 돈을 모아 큰맘을 먹고 상경한 평민이 있는가 하면, 토너먼트라는 대목을 노리고 힘들게 상경한 소상공인들도 있으리라.
그들이 형진의 요리를 맛본다면 어떻게 될까.
백이면 백, 형진이 만들어낸 요리의 추종자가 되어 버릴 것이다. 자신이 이미 그렇게 된 것처럼. 그것은 다시 말해 인맥이 만들어진다는 얘기고, 앞으로 형진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그 인맥은 도움이 되면 모를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독점적으로 투자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형진이라는 인물의 앞날을 생각한다면 그게 더 좋은 일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제랄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좋아요. 관청의 허가나 수속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최대한 빨리 처리될 수 있도록 할게요.”
“네?”
형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제랄딘은 곧바로 주방을 뛰쳐나가려다, 아직 접시에 음식이 남아 있음을 깨닫고는 얼른 다시 앉아 그것을 마저 비운다음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당황해서 허둥대는 시녀들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못 말려. 아가씨도 참.”
미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보이고는 우아하게 마지막 남은 구운 야채를 이용해 접시 바닥에 흐른 육즙까지 말끔히 먹어치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가 직접 나선다면 늦어도 내일부터는 바로 영업을 할 수 있을 거에요. 따로 뭔가 필요한 것은 없으신가요?”
형진은 얼떨떨한 와중에도 바로 대답했다.
“일단… 적당한 크기의 수레가 필요합니다. 대충 이 정도 넓이면 되겠죠.”
대충 손으로 크기를 어림잡아서 설명해 보이자, 미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점을 직접 꾸미실 생각이신가 보군요. 목재와 공구, 그 외에 필요한 재료도 적당히 챙겨서 보내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저로선 편하죠.”
미엘은 대화가 끝나자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제랄딘보다 훨씬 우아한 걸음걸이로 별채를 떠났다.
-스승님! 그럼 저희도 돕는 건가요?
곧바로 림이 그렇게 물었지만, 형진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건 좀. 일단 넌 일전의 일 때문에라도 너무 눈에 띄고, 유아 역시 사람들의 눈에 많이 띄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으니, 노점은 나 혼자 하는 편이 낫겠다.”
-우… 아쉬워요.
아쉬워도 할 수 없다. 모습을 바꿀 수 있다 해도 림이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왕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고, 형진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다 해도 유아가 지닌 호구신의 매료와 후광 역시 공연한 문제를 일으키기 딱 좋은 능력들이니까. 물론 제랄딘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는 하겠지만, 공연히 진상 귀족과 구태의연한 이벤트가 벌어지는 건 사절이다.
어쨌든 그렇게 조금 소란스럽던 점심시간이 끝나자, 형진은 주방의 정리를 두 크고 작은 메이드에게 맡기고는 혼자서 총괄 지부장 탁스 두겐을 찾았다. 스킬과 내구도 복구에 대한 것을 문의하기 위해서다.
“블러드러스트라… 스킬 마스터에게서 습득 가능한 스킬 목록에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습득 조건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습득한 집행자가 아직 공개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그렇군요.”
산의 주인이라 불리던 멧돼지 녀석과 싸웠던 때를 생각하면 상당히 쓸 만한 버프 스킬일 것 같은데, 좀 아쉽게 되었다. 단점이 있는지는 몰라도 체력, 이속, 공속의 삼단 버프 스킬이 그리 흔한 건 아니니 말이다.
“내구도 복구는 현재까지 두 가지 방법이 알려져 있습니다.”
“두 가지나요?”
“네. 하지만 한 가지는 조건을 맞추기가 까다로워서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이고, 다른 한 가지 방법도 쉽게 쓰긴 어려운 편입니다.”
“어떤… 조건이길래.”
“첫 번째 방법은 동일한 아이템을 소유한 상태에서 가공 기술을 장인 단계까지 숙달한 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희귀급 이상 아이템을 두 개 이상 소유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괜히 구하기도 힘든 희귀급의 아이템을 수리로 날리느니 새로 가공을 시도하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파는 것이 이득이죠. 설령 그런 식으로 수리를 할 마음이 있다 해도 필요한 가공 기술을 장인 단계까지 숙달한 사람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요.”
“…”
탁스 두겐은 사실상 의미 없는 일이라는 듯이 설명하고 있었지만, 형진은 속으로 쾌재를 올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형진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화석을 이용한 강화는 액세서리와는 달리 단숨에 파괴되거나 하지 않는다. 즉, 내구도 복구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면, 실패를 하더라도 계속해서 무한정 도전해 볼 수 있다는 얘기다.
형진은 그 아이템을 드랍하는 개체만 있다면 인스턴트 킬로 얼마든지 희귀급 이상의 아이템을 습득할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요리 스킬을 충분히 올린 상태이므로 도핑을 통해 가공 스킬 역시 빠른 시일 내에 장인 단계까지 상승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즉, 다른 이들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 것이다.
“남은 한 가지 방법은, 공헌도를 소모해서 내구도 복구용 물품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흔히 장인의 혼이라고 불리는 아이템인데, 상급 성도 이상의 계급을 가진 자라면 공헌도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지요. 다만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나당 공헌도 천이 소모되니까요.”
공헌도 상점의 사용 조건이 상급 성도부터였구나. 장인의 혼에 대한 것은 그냥 참고만 하기로 했다. 형진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형진은 원하는 정보를 얻자 인사를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문득 매번 익혀야지 하면서도 깜빡하던 스킬 하나를 떠올렸다.
“아차차, 온 김에 스킬 하나만 익혔으면 합니다만.”
“말씀하십시오.”
“단검 숙련 스킬을 배우고 싶습니다.”
“여러모로 유용한 스킬이지요. 손을 잠시 내주시겠습니까.”
“여기.”
형진이 손을 내밀자, 탁스 두겐은 가만히 자신의 손등을 내밀어 각인끼리 마주보게 하고는 스킬 전수를 실행했다.
[축하합니다! 스킬 ‘단검 숙련’ lv.0을 습득했습니다!]어차피 스킬 전수야 그리 어렵지 않은 과정이다. 이제부터 그것을 수련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실질적인 문제일 뿐.
“감사합…”
스킬 전수가 끝나자 그렇게 인사를 하려는데, 문득 형진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난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사용자의 능력을 참조하여 ‘단검 숙련’의 스킬 레벨을 재조정하는 중입니다.]“응?”
이게 뭔가 하고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 하나의 메시지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