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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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탁
너무 늦게 자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무겁다. 이래서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건가.
대충 세수부터 한 뒤 아침 운동을 하려고 뒤뜰로 나갔다. 천천히 몸을 풀고는 매크로 수련을 하려는데, 문득 인기척이 들리면서 간편한 복장을 입은 유아가 밖으로 나온다.
“운동하려고?”
“네…”
“흠.”
어째 표정이 이상하다. 하기야 수련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옷이 갈아입혀진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상황이 어리둥절했겠지. 어제 유아의 상태가 일부러 정신을 잃은 척 한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기 때문에, 설마 자신이 한 행동을 전부 알고 있으리라고는 형진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오늘은 다른 걸 알려주지.”
체력 수련만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수련도 그런건지 알아보기 위해 오늘은 민첩 수련을 가르쳐 보기로 했다.
형진이 천천히 동작을 시연해 보이자 유아는 한 걸음 물러선 채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곧잘 따라했다. 어느 정도 동작을 이해시켰다고 판단한 형진이 본래의 속도로 수련을 시작하자, 유아 역시 그대로 따라한다. 하지만 어제 밤과는 달리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체력 수련이 문제였던 건가.
“어때. 해 볼만 해?”
“네.”
“혹시 모르니까 나 없을 때 혼자 수련하고 그러지 마. 나도 없는데 어제 같은 일이 벌어지면 여러모로 곤란하니까.”
“그, 그럴게요.”
“좋아. 씻고 주방으로 나와. 오늘도 할 일이 많다.”
“네.”
뭔가 상당히 고분고분해졌다. 말투는 물론이고 행동까지도. 그래봐야 조금 지나면 또 까불거리겠지만.
-스승님!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 제자야. 좋은 아침.”
-운동하시는 동안 간단하게 집 안팎을 청소해 뒀습니다. 자,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훌륭해. 자, 그럼 오늘도 활기차게 시작해 보자!”
-넵!
과연 가사의 요정. 아침 운동을 하는 동안 청소까지 끝마쳐 두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오늘은 무슨 요리를 보여줄 것인지 기대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조, 조금 부담스러울지도.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자, 어김없이 미엘이 방문했다. 바로 동굴곰 때문이다.
“별채의 주방에서는 곤란할지도 모르겠는데요. 공간이 부족할 것 같아요.”
“그렇군요. 어쩐다. 뒤뜰에서 해야 하나.”
“차라리 오늘은 저택에 들러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곳 주방이라면 가능할텐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요리사들은 영역 개념이 강해서 자신의 주방에 누군가가 들어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실력 있는 요리사들에게 있어 주방은 자신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인 공간이다.
“물론이죠. 어차피 오늘도 어르신들은 대부분 왕궁에 가 계시니까, 아가씨가 그렇게 결정하시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어요.”
“그래도 좀 꺼려지는 군요. 공연히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그냥 뒤뜰에서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쪽이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미엘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순순히 형진의 의견에 따랐다.
뒤뜰에 짚으로 된 깔개를 가져다 넓게 펼쳐 놓았다. 뭘 하려고 그러나 싶어 카트린이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다가왔지만 잘 달래서 집 안에 머물도록 했다. 죽은 동물의 사체를 처리하는 과정은 어린 아이에게 너무 충격적인 장면일 테니까.
“넌 괜찮아?”
유아에게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전에 있던 신전에서 돼지 잡는 거 많이 봤어요.”
“…”
도대체 그 신전은 사제들을 어디다 부려먹는 거냐. 하기야 먹일 입이 많았을 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렇게 대충 준비가 끝나자 미엘은 마침내 동굴곰을 꺼내 놓았다.
“우와… 도, 동굴곰이네요?”
-이렇게 큰 녀석은 처음 봐요!
동굴곰을 본 유아와 림은 먼저 그 크기에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군침을 흘린다. 미엘도 그러더니만.
“이거 맛있나요?”
“물론이죠! 보통의 냄새 나는 곰고기랑은 완전히 달라요.”
“그래요?”
그러고 보니 동굴곰은 보통의 곰과는 다르게 완전히 초식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보통의 곰고기와는 차이가 나는 건가.
산에서 자란 곰은 특유의 냄새가 강해서 좋은 식재료라고 하기 어렵다.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대중적이지는 않은 느낌이랄까. 하기야 지구에서는 함부로 잡을 수도 없는 짐승이라 먹어본 사람 자체가 드물고, 솔직히 형진도 현실에서는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다.
흔히 곰고기라고 하면 팔진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곰발바닥을 많이들 떠올리지만, 팔진 자체가 사실 근거 없는 미신에서 유래한 것이 대부분이라 실제로 먹어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원숭이 입술이나 낙타 발굽 같은 것이 동급으로 취급되었으니 말 다한 얘기. 실제로도 곰발바닥은 조리가 까다롭고 잘 조리된 것도 양념 맛을 제외하면 재료 자체의 맛은 잘 해야 돼지비계 정도 느낌이라는 평이 많다.
“후우…”
형진은 일단 가공 관련으로 간단하게 도핑을 한 뒤, 동굴곰의 해체를 시작했다. 배의 중심선을 따라 가죽을 가르고 내장을 꺼낸 뒤 가죽을 벗겨 널어놓는 작업이 물 흐르듯 이어지자, 마치 옷을 벗는 것처럼 순식간에 거대한 동굴곰의 가죽이 벗겨져 저택 뒤 응달에 걸린다.
“와… 대단하네요. 가죽 벗기는 것도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닌데.”
지켜보던 미엘은 물론이고, 일을 돕고 있는 유아와 림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닙니다.”
가죽은 쉽게 벗겨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부위 별로 고기를 해체하여 보관하기 좋게 가공을 해야 하고, 가죽 역시 본격적인 무두질 공정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형진은 오전 시간 내내 곰고기를 자르고 무두질을 해야만 했다.
대충 작업을 마치고 씻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가자, 언제 와 있었는지 드레스를 곱게 차려 입은 제랄딘이 시녀들과 함께 응접실에서 나와 그를 맞이한다.
“고생하셨어요. 한창 바쁘신 듯 해서 기별도 없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그랬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일단 좀 씻고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욕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나오자,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주방으로 모여든다.
“그런데 어쩐 일로…”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어서 왔나 하고 제랄딘에게 물어보자,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싶어서요.”
“…”
“안 되나요?”
“그럴 리가요. 하하.”
괜찮다고 웃기는 했지만, 큰일이다. 아무래도 동굴곰 고기로 만든 요리를 기대하는 모양인데, 지금껏 다뤄 본 적이 없는 재료라 뭘로 요리해야 할지 딱히 생각이 나질 않는다.
흔히 곰고기 요리로 유명한 것은 전골이다. 하지만 이것은 재료를 준비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본 요리로 들어가기 전에 곰고기를 손질하는 데만 거의 이삼일은 소요되니 지금 상황에서는 써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곰고기 특유의 냄새를 없애기 위한 전처리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이라 동굴곰의 고기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할 지는 알 수가 없다. 애초에 동굴곰이라는 동물의 고기 자체를 다뤄보는 것이 처음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형진은 보통의 냄새 나는 곰고기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미엘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아니라도 뭐… 장인 스킬로 어떻게 커버가 되지 않을까. 다소 안이한 발상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
먼저 부채살 부위를 가져다가 두툼하게 썰어 놓고 힘줄을 제거한다. 그렇게 준비된 고기에 올리브유를 손으로 넉넉하게 펴 바르고는 포크를 양손에 들고 사정없이 찌르기 시작한다. 야생 동물의 고기라 좀 질길 수 있으니 사전에 육질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어야만 한다. 찌르다가 심심하면 올리브유를 한 번 더 발라주고, 또 다시 마구 찌르고.
포크를 들고 찌르는 과정이 끝나면 이제는 소금과 후추를 뿌려 밑간을 해줄 차례다. 조금 과할 정도로 팍팍 뿌려서 밑간을 마치면 준비 끝.
“림, 손님들께 애피타이저를.”
-네! 스승님!
림이 만든 카나페를 먹으며 손님들은 형진이 불을 지피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릴이 충분히 달구어졌는지 확인한 형진이 고기 덩어리들을 그곳에 올려놓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린다.
치지지지직! 화아악!
그릴에 고기가 닿는 순간 치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거기에 무언가를 뿌리자 순간 불꽃이 확 하고 터져 나온다. 형진은 손을 한 번 휘둘러 고기 위에 피어오른 불꽃을 날려버리고는 마늘과 야채들을 준비했다.
껍질을 까지 않은 채 마늘장아찌처럼 두껍게 썬 통마늘로 고기 덩이 위를 슥슥 문지른다. 그렇게 마늘을 문질러서 향이 배이도록 한 뒤 뒤집어 준다. 그리고 야채들을 함께 올려 굽는다.
“유아, 큰 접시!”
“여기요!”
유아가 가져온 접시에 그릴 위의 고기를 얹어 두고는 구운 야채들로 장식을 한다. 이로써 곰고기 스테이크 완성.
“와아…”
“냄새가… 끝내주네요.”
스테이크는 이곳에서도 많이 먹는 요리다. 하지만 형진이 구워낸 스테이크는 지금까지 그들이 먹어본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산야를 뛰어 다니던 거대한 동굴곰의 야성이 느껴지는 것 같은 그런 강렬한 느낌이 전해질 정도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가장 맛있어지는 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꿀꺽.
이건 고문이다. 먹음직스런 요리가 눈앞에 놓여져 있는데 구경만 해야 하다니. 모두들 둘러 앉아 꼴깍꼴깍 침만 넘기는 모습이 은근 귀여워서 형진은 피식 웃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고기덩이를 일단 다른 접시에 옮겨 담고는 거기서 흘러나온 육즙에 올리브유를 살짝 섞어 흔들었다. 그렇게 육즘과 올리브유가 섞이자, 형진은 허브 잎사귀가 달린 줄기로 그것을 묻혀서 다른 접시에 옮겨둔 고기덩이에 먼지를 털 듯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칼을 들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 일단 맛을 본다.
“으음!”
이건. 이건 대단하다!
처음 다뤄보는 재료라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일단 기본적인 스테이크를 시도해 봤는데, 정말 그 풍미가 상상 이상이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흘러나오는 육즙의 그 풍부한 향미에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전율했다. 살살 녹는 부드러운 육질은 또 어떠한가. 대단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야성의 맛!
괜히 미엘이 안절부절 못했던 것이 아니었구나!
익숙하지 않은 식재료였던 탓에 특제 요리로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일단 한 번 맛을 보고 나니 이 재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마구 발상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송로버섯. 그래, 송로버섯이라면 이 강렬한 야성의 풍미를 더욱 강하게 살려줄 수 있을 터!
“크흠, 죄송합니다.”
정신이 들고 보니 자신이 만든 요리에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모양인지 앞에 앉은 손님들이 가만히 웃고 있었다. 형진은 쑥스러운 기분에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얼른 커다란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의 접시에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
“우으음!”
“아후우우…”
형진의 모습을 보고 웃던 손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어떻게 말로 표현해 볼 틈도 없이 입 안에서 미쳐 날뛰는 격렬한 야성의 맛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 대단해요.”
“흔히 볼 수 있는 스테이크라 솔직히 좀 실망했었는데, 이건… 정말 엄청나네요.”
제랄딘을 따라와서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시녀들은 이제 거의 형진을 신처럼 우러르며 바라보고 있다. 잘하면 요리의 신으로 추앙이라도 할 모양새다.
제랄딘은 안타까운 듯한 탄식과 함께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문득 형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님.”
“네.”
“혹시, 가게를 내 보실 생각 없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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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1-소제목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