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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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탁
“헐?”
느닷없이 레벨 42라니?
잠시 얼떨떨해 하던 형진은 뒤늦게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했다. 갑자기 레벨이 보정되어 나타난 것은 요리에 사용하는 칼을 단검으로 인식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사실 단검이란 건 그 구분이 애매한 점이 있다. 날이 한쪽만 있는 것과 양쪽 다 있는 것을 단도와 단검으로 구분한다든가, 생활용의 단검은 나이프로 부르고 전투용의 단검은 대거로 부르는 식의 분류도 있고, 날이 고정되어 있는 것과 접을 수 있는 것, 그리고 투척용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이 모든 것을 단검으로 칭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부엌칼이든 장미칼이든 짧은 길이를 지닌 날붙이라는 면에서는 결국 단검으로 분류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어쩌면 이건 공포와 죽음께서 고심 끝에 결정한 사항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형태의 무기들마다 전부 숙련 스킬을 따로 만들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테니까. 비수 숙련, 은장도 숙련, 커터칼 숙련, 쿠크리 숙련, 스틸레토 숙련… 이런 식으로 모든 칼 종류마다 스킬을 붙이기 시작하면 배우는 입장에서도 짜증나고 관리하는 입장에서도 짜증나는 일이다.
“뭔가 잘못되었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땡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상급 성도가 되기 위한 스킬 숙련도를 어떻게 채우나 고민했는데, 생각지도 않은 40레벨 스킬을 하나 주운 셈이다. 혹시 그 외에도 이런 식으로 보정을 받을 수 있는 스킬이 없을까.
잠시 그렇게 주워 먹을 스킬이 없나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탁스 두겐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일단 감사부터 드려야겠군요.”
“네? 무슨…”
“대장장이 길드의 신물을 찾아주신 것이 진님이시죠?”
“아…”
“실질적으로야 어찌 되었든, 현재로선 저도 대장장이 길드의 말단 직원에 속하니 감사드립니다. 그 일 덕분에 상사들의 심기가 많이 너그러워져서 꽤 일하기가 편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얘기를 나누기 시작한지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다그친다든가 호통 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하,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글쎄요. 그게 과연 운일까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씩 웃던 탁스 두겐은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또한 이것은 수도 라야의 총괄 지부장으로서 드리는 감사의 인사입니다. 덕분에 오랜 시간 동안 미해결로 남았던 의뢰가 명쾌하게 해결 되었습니다. 또한 대장장이 길드와 집행자 사이의 관계도 덕분에 상당히 친밀해졌습니다. 왕국에 계신 동안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총괄 지부장의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탁스 두겐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시 물지게를 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로써 다시 새로운 방향성이 정해졌다. 그것은 바로 가공 장인. 그렇지 않아도 그리칸에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하려고 했던 분야이니 딱 적절하다.
별채로 돌아가자 미엘이 보내온 수레와 판자, 그리고 각종 공구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공 장인이라는 목표를 설정한 상태라, 형진은 워밍업도 할 겸 옷을 갈아입기가 무섭게 제작을 시작했다.
형진이 살던 곳에서는 이미 손수레 형태의 노점은 거의 사라졌다. 대부분의 노점이 허가를 받고 한 곳에서 고정적으로 영업을 하게 되면서 굳이 포장마차 같은 것을 끌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고, 기동성이 필요한 경우에도 사람 손으로 끌기 보다는 차량을 개조한 푸드트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일단 형진은 대충 어떤 형태로 만들지 구상했다. 가스 버너가 없으니 화덕이 들어갈 자리가 우선 필요하고, 손질된 재료가 차지할 자리, 양념이 놓여질 선반의 크기라든가, 완성된 음식을 놓을 선반의 크기 같은 것을 간단하게 스케치 한다.
폭풍 같은 것이 몰아치면 어쩔 수 없지만, 추적추적 내리는 적은 양의 비 정도는 막아낼 수 있을 정도의 대비도 갖추어야 한다. 날씨가 추워지니 바람을 막을 수 있으면 더욱 좋다. 간단하게 지붕을 만들고, 모서리에는 등불을 달아 조명을 대신하고 분위기도 살려보는 편이 좋겠다.
혼자서 요리부터 서빙까지 전부 도맡아야 하니 손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동선도 고려해야 한다. 점심 한 때만 영업할 테니까 재료는 유아에게 손질을 맡겨서 수레에 담아가도 신성력의 힘으로 충분히 신선도가 유지될 것이다.
대략의 개념 설계가 끝나자 본격적인 제품 설계에 들어간다. 먼저 토대가 될 수레의 크기를 재고, 그것을 토대로 화덕의 크기를 계산한다. 괜히 불이 나면 큰 일이므로 일단 철판으로 에워싼 다음 안쪽에 벽돌을 쌓고 그 안에 화로를 놓으면 될 것 같다. 연기가 심하게 나도 곤란하니까, 연료는 질 좋은 숯으로 하면 되겠지. 화로는 두 개를 들여 놓고 번갈아 쓰면 될 것 같고.
그렇게 궁리를 하며 도면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 미엘이 다가와서 그것을 흘끔 쳐다본다.
“벌써 시작하셨네요.”
“네. 준비를 잘 해 주셔서 금방 끝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혹시 용접하실 수 있으십니까?”
“네? 용접이요?”
미엘은 처음 듣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화덕의 기초를 만들기 위해 철판을 가공하는데 굳이 용접까지 필요하진 않다. 다만 앞으로의 일을 감안하면, 이런 식의 가공 방법도 미리 마련해 두는 편이 좋다. 볼트나 너트, 리벳 가공 같은 방법이 있긴 해도 용접에 비하면 효율이 떨어질뿐더러 특히나 미엘이라는 수준급의 마법사가 있는데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바보 같은 짓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철판과 철판을 뜨거운 열로 녹여서 이어 붙이는 작업입니다.”
“헤에… 잘은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볼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형진은 곧바로 얇은 철판을 함석가위로 잘라 재단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긴 했지만 꾸준하게 매크로 수련으로 힘을 단련한 덕분인지 어렵지 않게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철판을 잘라냈다면 다음은 구부려서 원하는 형상을 만들어야 한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판재를 구부려서 형태를 만들어내는 절곡기 같은 전용의 공구가 필요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없으니 최대한 수작업으로 비슷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망치로 두들겨 가며 대략의 형태를 잡아내는 일이 끝나자, 비로소 미엘의 차례가 되었다.
“여기 이 모서리를 녹여서 연결해 주시면 됩니다.”
“네.”
미엘은 잠시 정신을 집중하는가 싶더니, 최대한 얇은 형태로 뿜어내지는 강한 불꽃을 만들어내었다. 캬아. 그야말로 인간 산소 용접기다.
“잠시만요. 불꽃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눈에 안 좋습니다.”
“아, 그렇겠네요. 잠시만요.”
미엘은 자신과 형진에게 선글라스를 낀 것 같은 느낌의 마법을 걸고는 다시 불꽃을 만들어내 용접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소 버벅거리나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정도 감을 잡았는지 순식간에 용접 작업을 끝마치고 말았다.
이런 걸 보면 마법도 배워보고 싶어진다. 어디 용접만 가능한 수준으로 속성 마법을 가르쳐 주는 곳 없으려나.
“됐나요?”
“네, 아주 잘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일단 철판으로 만든 화덕 자리를 수레에 옮겨 싣는다. 그리고 철판을 못으로 때려 박아 수레에 고정 시킨 형진은 안에 벽돌을 채워 넣고 황토로 고정 시켰다. 내화 벽돌이 있다면 좋겠지만, 포장마차에 불가마나 용광로를 달 것도 아니니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화덕의 모양새가 갖춰지자, 화로를 가져다가 들여 놓았다. 제법 그럴 듯 하다.
가장 중요한 화덕이 완성되었으니 이제는 외장을 갖출 차례. 우선 상판을 올리고 그 위에 도마 역할을 할 깨끗한 판자를 배치한다. 화덕 주위의 모서리는 철판으로 둘러싼 후 못을 박아 고정했다.
상판 다음에는 지붕을 올릴 차례다. 우선 간단한 형태로 지붕의 얼개를 만든 다음, 판자를 엇갈리게 겹쳐서 자연스럽게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연기 같은 것이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지붕 상단을 이중 구조로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크루그. 좀 도와줘.”
“네.”
-저도 도울게요. 스승님.
“저도요.”
“고마워.”
구경만 하고 있기가 뭐했는지 유아와 림도 지붕 올리는 일에 참여했다. 미엘도 돕고 싶은 눈치였지만, 드레스를 입고 있는지라 참고 있는 모양새다.
그런 식으로 한 나절을 뚝딱거리자, 이내 그럴 듯한 포장마차가 완성되었다. 만들다 보니 제법 부피가 커져서 사람이 끌고 다니려면 고생 깨나 할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어차피 직접 끌 것도 아니고 놀고먹는 당스바겐 녀석에게 끌라고 할 생각이니 문제될 것도 없다.
“자, 그럼 시험을 해볼까요?”
“지금요?”
“어차피 저녁 시간도 되어가니 오늘은 여기서 요리를 해보도록 하죠.”
수레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 장치를 내려서 단단히 고정시킨 다음, 접대용 선반을 내리고 손님용의 긴 의자를 내려놓았다. 네 귀퉁이에 등을 달고, 모험가들이 흔히 쓰는 방수포를 지붕에서 풀어 내리자 꽤 아늑한 분위기로 변한다. 요리용의 화로를 들여 놓으면 추운 겨울에도 문제가 없을 듯 하다.
곧바로 카트린과 크루그, 유아, 그리고 미엘이 긴 의자에 순서대로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아가씨 모셔 오지 않아도 될까요?”
형진이 냄비와 팬, 그리고 양념통 등을 주방에서 옮겨 놓고 있을 때, 문득 유아가 그렇게 말했다.
“음… 예정이 새로 생겼을지도 모르니 제가 알아보고 올게요.”
아차 싶었던지 미엘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으로 향한다.
“음? 미엘님은?”
양념통을 주방에서 들고 온 형진의 물음에 유아가 바로 대답했다.
“제랄딘 아가씨한테 가셨어요. 모셔올 수 있으면 모셔 오시겠다고.”
“그랬군.”
하긴, 둘은 한 세트니까.
숯을 가져다가 화로에 담고 불을 붙인다. 한쪽은 국물이나 찜 같은 요리를 할 냄비를 걸고, 한쪽은 구이나 튀김 같은 것을 하는 용도로 활용할 생각이다.
어디 보자. 그나 저나 오늘은 뭘 해먹는다.
노점을 할 때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분식 종류를 시도해 볼 생각이지만, 지금은 저녁 시간이니 뭔가 든든한 걸 먹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잠시 뭘 할까 고민하던 형진은 앞서 도축해 두었던 곰고기 중에 뱃살 부위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름 하여 곰고기 삼겹살, 줄이면 웅삼겹이다.
본래 곰고기는 냄새 때문에 이렇게 바로 직화로 구워먹는다든가 할 수 있는 고기가 아니지만, 동굴곰의 고기는 그런 단점이 없으니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고기를 굽기 전에 우선 쌀을 씻어서 솥에 담은 후 밥을 시작한다. 다른 사이드 메뉴를 곁들여도 좋겠지만, 역시 삼겹살은 밥이랑 같이 쌈을 싸 먹는 게 최고 아니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밥을 앉히자, 이제 고기를 손질할 시간이다. 두툼한 삼겹살을 꺼내 놓은 뒤 세심하게 칼집을 넣는다. 이른바 벌집 삼겹살이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단검 숙련을 찍은 탓인지 칼질이 훨씬 매끄럽고 빨라진 듯한 기분이 든다.
“저 왔어요.”
순식간에 몇 덩이의 고기에 칼집을 내고 있자니, 발소리와 함께 방수포가 걷혀지며 제랄딘이 미엘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막 시작하려던 참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시녀분들은 데리고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내 정신 좀 봐. 미엘, 들어오라고 해줘요.”
“네.”
미엘의 부름에 네 명의 시녀들이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들어와 포장마차의 모서리 자리에 앉았다.
“림, 잎채소들을 좀 씻어와 주겠어?”
-네!
칼질은 마치고 간단하게 밑간을 한 형진은 고기를 맥주에 담가 놓았다. 그리고 림이 돌아오기 전에 재빨리 양파 몇 개를 꺼내어 잘게 채를 썰기 시작한다.
“와아…”
이제까지 시녀들은 주방에서 식사에 함께 참여해도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형진의 요리모습을 지켜봤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탄스러웠지만 이렇게 바로 코앞에서 형진이 칼을 쓰는 모습을 보니 절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파파팍하더니 투명하리만치 얇게 저며진 양파채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은 차라리 신기에 가까운 솜씨였다.
-스승님! 여기 잎채소에요!
“수고했다. 유아, 힘 좀 써봐.”
“네!”
유아는 림이 씻어온 잎채소에 신성력 샤워를 시전 했다. 그러자 시녀들은 다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전에 유아와 림이 재료 손질 전쟁을 벌이는 것을 보긴 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그녀가 자신들과 같은 시녀나 메이드가 아니라 사제임을 눈치 챈 것이다.
형진은 양파를 모두 채 썰자, 식초와 설탕을 꺼내 냄비에 담은 뒤 물에 풀고는 그릴 위에 얹어 덥히면서 그것을 저었다. 그리고 완전히 설탕이 녹아들자, 그 안에 채 썬 양파를 담았다. 이렇게 놔뒀다가 고기가 다 구워질 때쯤 미엘의 마법으로 식혀서 내놓으면 바로 즉석 양파 초절임이다.
양파 초절임 준비가 끝나자 비로소 본격적인 고기 굽기에 들어갔다.
치이이익!
숯불로 잘 달궈진 그릴 위에 프라이팬이 놓여지고 칼집을 낸 곰고기가 얹어지자, 앞서의 스테이크 때와는 또 다른 풍미가 확 하고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한다. 두툼한 뱃살과 비계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익어가는 그 절묘한 냄새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