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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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턱 막힌다. 주저앉은 채 몸을 수그린 터라 이미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무언가의 시선으로부터 눈을 떼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몸의 소유권이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도대체 저들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오랜 세월 우주를 떠돌았음에도, 그들은 링월드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어 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수많은 세월이 지나버렸지만, 그런 위대한 선조의 뒤를 이은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그들은 이제껏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이질적인 존재들의 모습을 보며 그러한 자부심이 무너져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뛰어나다는 생각들이 마치 파도에 휩쓸려가는 모래성처럼 스러져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도면 됐어.”
“죄송합니다. 말씀도 여쭙지 않고 먼저 나서는 바람에…”
“그런 소리 말아. 누가 들으면 우리가 남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형진이 손을 뻗어 부드럽게 쓰다듬자, 규설은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의 다른 부인들과는 달리, 규설과 힐리에타는 본래 추종자로부터 관계 설정이 이루어진 터라 대하는 방식 역시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형진은 이미 부부가 되었으니 편하게 대하라 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규설에게 있어 형진은 여전히 자신이 모시는 신이라는 위치가 우선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이었던 시절부터 관계를 맺어왔던 유아나 미엘 같은 다른 부인들과는 상황이 다르다고나 할까.
어쨌든 형진이 그렇게 규설을 다독이자, 외부로부터의 침입자에 대응하기 위해 달려왔던 움리드들은 그제서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 속의 심장을 옥죄는 듯한 무형의 기운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무언가보다, 그 어깨 위에 자리를 잡은 얼핏 평범해 보이는 남자가 더 높은 위치의 존재라는 것도 역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는 움리드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형진은 담담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은 움리드인가?”
“그렇… 습니다.”
평대를 하려다가 문득 규설의 눈이 다시 번쩍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는 급히 존대로 고쳐 말한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어째서 다시 돌아온 것이지?”
“그건…”
움리드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냥 말을 해도 좋은 건지, 아니면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인지 그들로서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규설은 형진이 질문을 던졌음에도 그런 식으로 상대가 머뭇거리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어서 대답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 것이냐!”
“히익!”
잠시 약화되었던 그녀의 존재감이 다시금 증폭되며 그렇지 않아도 잔뜩 위축되어 있던 심령을 쥐어짜버린다. 움리드들은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은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감당하지 못한 채 다시금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들은 극한 두려움에 빠져 버렸다. 차라리 무기를 들고 쏘거나 휘두르는 상대라면 몰라도, 이런 식으로 정신 공격을 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달리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이제까지 단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생경한 상황에, 그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것을 대답할 수 있는 이에게 안내하라.”
“아, 아, 알겠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안 된다고 뻗대어 보기라도 했겠지만, 이미 규설에게 심령이 완전히 제압되어 버린 움리드들은 찍 소리도 하지 못한 채 형진의 말을 받아들였다.
“흠…”
외부로부터의 침입자를 잡으러 왔다가 도리어 포로가 되어 버린 모습으로 길 안내를 하는 입장이 되어 버린 움리드들의 뒤를 따라가며, 형진은 가만히 선내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서 정비한 흔적이 엿보이기는 했지만, 그 안에서 묻어나오는 세월의 흔적까지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고 있었다. 가려두기는 했지만 긁힌 흔적 같은 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되고 부식된 채 남아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흔적들은 우주선의 항행 자체에 문제를 줄 만큼 심각한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함선조차도 건조된 시간이 오래되면 금속 피로나 부식으로 인해 내구도에 문제가 생겨서 결국 해체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주선이라는 것도 결국은 내구연한이라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일. 잘은 모르겠지만, 이 우주선이 움리드의 멸망 전후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미 내구연한은 훌쩍 넘겨 버린 상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계속 우주를 떠돌고 있는 것 자체가, 대기권 진입 같은 위험성 높은 일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상태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앞서 가던 움리드들이 멈칫거리며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규설의 위엄에 짓눌려 일단 안내를 시작하긴 했어도 정말 이들을 책임자에게 데려가도 괜찮은 건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르면서 동향을 살피고 있던 규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뭔가 함정을 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함정이라. 어떤?] [아무래도 격벽 종류가 아닌가 싶습니다.] [호오. 하긴 가장 손쉽게 적을 가둬둘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 정도겠지.]규설의 위엄에 굴복하기는 했어도, 싸움 한 번 않고 적을 자신들의 심장부에 끌어들일 수는 없는 일이라는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어쩌면 형진이나 규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를테면 문자나 기호 같은 형식의 메시지 같은 것으로 책임자에게서 지시를 받은 것인지도 모르고.
[제압할까요?]규설의 말에 형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놔둬. 어차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소용없는 일이니까. 오히려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옥죄는 결과를 맞이하겠지.] [알겠습니다.]움리드가 만들어낸 구조물들은 확실히 지구나 타나토스의 그것에 비해 훨씬 견고하기는 했지만, 형진이나 규설의 힘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인 건 마찬가지다. 애초에 형진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물질 자체가 존재하는지부터 의문이긴 하지만. 아니, 차라리 움리드들이 신마저 가둬둘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형진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횡재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렇게 모르는 척 발걸음을 옮기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득 앞서가던 움리드들이 급히 몸을 날리는가 싶더니, 전후좌우에 격벽이 내려와 형진과 규설을 가두어 버렸다.
[부술까요?] [놔둬봐. 어떻게 나오나 지켜보게.] [알겠습니다.]형진과 규설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멈추어 있자, 잠시 뒤에 지직 거리는 노이즈가 가득 낀 입체 영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그들과 마주했던 움리드와 마찬가지로 전투복인지 우주복인지 모를 두터운 장비를 착용한 인물이었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런 식으로 영상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먼저 그들과 마주했던 다른 이들로부터 규설이 일종의 정신 공격을 가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생각해낸 대응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영상에 모습을 드러낸 움리드는 앞서의 다른 이들과는 달리 움츠러든 기색도 겁먹은 기색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영상과 마찬가지로 노이즈가 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의 목소리에는 마치 쇠못으로 벽을 긁어대는 것 같은 불쾌한 소음이 섞여 있었다.
“글쎄, 누굴까.”
“…”
형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하자 상대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다가 조심스럽게 경고를 했다.
“당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처지? 무슨? 아아… 설마 이 벽을 두고 하는 얘긴가?”
물론 그 경고에, 형진은 물론이고 규설마저 피식 웃어 버렸다.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이 격벽을 그냥 놔둔 건 이쪽이 좀 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야. 그냥 마주 보고 서서 대화를 나눴다면, 시선조차 가누지 못했을 테니까.”
“허세가 심하시군요.”
“허세라… 굳이 증명하기를 원한다면 못할 이유는 없겠지.”
형진이 그렇게 말하자, 규설은 기다렸다는 듯이 좌측의 벽을 향해 자신의 기운을 쏟아냈다. 산군의 힘은 흑요호의 그것처럼 강렬한 빛을 동반하는 대신, 좀 더 조용하고 은밀하게 목표를 파괴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보는 입장에서는 뭔가 그녀의 눈빛이 번쩍 하는 순간 벽이 녹아내리며 구멍이 뚫
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다.
“…”
별다른 움직임이나 도구를 사용한 흔적도 없이 격벽의 일부가 녹아내리며 구멍이 뚫리자, 영상 속의 인물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래도 허세라고 할 텐가?”
“…”
“그럼, 이번엔 내 차례겠군. 너희들은 이미 한 번 이곳을 떠난 자들이다. 돌아온 이유를 들어보고 싶은데.”
“그건…”
영상 속의 움리드는 잠시 주저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그동안 잠시 사정이 있어서 떠나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되찾을 때가 온 것뿐입니다.”
“그런 얘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숫자가 너무 적은데. 아, 혹시 다른 이들은 동면 중인건가? 너희들은 교대로 그들을 보살피는 중이고.”
“…”
영상 속의 상대는 말이 없었지만, 형진은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거대한 우주선이라 해도 결국 그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자는 제한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게다가 광속을 뚫지 못한 상태에서는 다른 정착지를 찾기 위해 이동하는 데만도 최소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물론 그런 식으로라도 적당한 다른 행성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결국 이렇게 돌아와 버린 건 탐사 가능한 영역 안에서 그들이 살 수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한 채 실낱같은 희망을 지니고 돌아왔다는 얘기 밖에 되지 않는다.
즉, 저들은 형진이나 규설을 보는 순간 놀랍고 걱정되는 한편으로 또한 안도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결국 무언가가 살아서 자신들과 접촉했다는 건, 바꿔 말하자면 그들의 고향이 어쨌든 생존 가능한 상황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다른 대답 없이 그대로 서있었지만, 형진은 어쩐지 헬멧 안쪽에 숨겨진 상대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내 말이 맞는 모양이네.”
“그건…”
“아아, 변명은 됐고.”
형진은 빙글빙글 웃으며 상대를 향해 다시 말했다.
“내가 궁금한 게 하나 더 생겼어. 대답해 주겠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상대가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묻자, 형진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질문을 던졌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아하니, 지금 네가 그렇게 내 앞에서 고개 빳빳이 들고 서 있을 계제가 아닌 것 같은데.”
“…”
“내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있나?”
“하지만… 저곳은 본래…”
“시끄러.”
그 순간 그의 몸으로부터 거대한 어둠이 뿜어져 나와 존재하는 모든 공간을 뒤덮어 버렸다.
“네 놈들이 저지른 그 모든 죄악을 내가 모르리라 생각하는 것인가. 그 모든 죄악들이 불러들인 파괴를 감당하지 못한 채 도망쳐 버린 네놈들의 과거를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히익!”
영상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있는 곳에까지 순식간에 침범해 들어와 사방을 채워 버리는 거대한 어둠에 움리드들은 크게 놀랐다.
이런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것은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목숨을 지탱해줄 안전 로프 하나 없이 우주 속으로 던져진 것만 같은 그러한 상황이 덮쳐 옴에도 움리드들은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겁에 질려 있는 그들의 귀에 다시 천둥과도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꿇어라.”
그 명령에 저항할 수 있는 자는, 이 공간 안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어쩐지 이어질 덧글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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