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71
00970 [여행] =========================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이 머물고 있던 휴양지는 난리가 났다.
-저는 지금 필리핀의 휴양지, 보라카이에 나와 있습니다. 보시는 것과 같이 이곳에는 지금 갑작스럽게 섬 전체의 식물들이 모두 꽃을 피우는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본래 일 년 내내 기온이 거의 일정한 곳이기는 해도, 이처럼 모든 식물들이 일시에 꽃을 피우는 것은 매우 보기 드문 현상이라고 합니다.
조금은 흥분한 느낌으로 캐스터가 말을 하는 동안 카메라는 섬 전체가 수없이 많은 꽃들로 뒤덮여 있는 모습을 세계 각지로 내보내고 있었다. 화단에 심어진 꽃들부터 시작해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잡초들에 이르기까지. 보라카이에 존재하는, 꽃을 피울 수 있는 모든 식물이 일시에 개화한 그 광경은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로 하여금 절로 경탄을 자아내게 할 만큼 신비로운 것이었다.
-정말 대단해요. 큰 맘 먹고 여행을 온 보람이 있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아요.
-너무 아름다워요!
-이건 기적입니다! 이건 축복이에요! 달리 뭐라고 표현하겠어요?
간혹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이상 기후 때문에 벌어진 생태계 교란으로 인한 현상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이것은 일반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신의 권능에 의한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기적과의 차이점이라면, 그러한 현상을 유발한 당사자조차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정도다.
“음…”
신뢰와 헌신이 정신을 차린 것은, 창가로 붉은 노을이 비쳐 들어오고 있던 시점이었다. 잠깐 몽롱한 기분을 느끼던 그는, 부드럽고 따뜻한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덮듯이 감싸고 있음을 깨달았다.
꽃과 바람은 그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역시 정신을 잃고 있었다.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으로부터 풍겨지는 은은한 꽃향기를 느끼자, 그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화들짝 돌아왔다.
맙소사. 도대체 이게 무슨.
곧바로 주마등처럼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일들이 떠오른다.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서로의 몸을 탐닉하던 그 시간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새록새록 떠올라 버린다.
큰일이다.
누가 봐도 이 상황은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아무리 궁합이 좋아도, 이렇게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열락에만 빠지는 상황이 벌어지기는 쉽지 않은 탓이다. 더구나 그들은 일반적인 인간조차 아닌 신. 인간조차도 약에 취하거나 하지 않으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건만, 아무런 이유 없이 신이 그런 일을 겪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제서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던 형진의 모습을 떠올리고 아차 싶은 생각이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게다가 그는 분명히 말했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평범한 인간의 맹세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법인데, 하물며 신뢰와 헌신이라는 신격을 가진 자신의 말이라면 더 이상 따질 필요도 없는 일이다.
“으응…”
어떻게 해야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미처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녀가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고민과는 별개로, 전신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촉감과 코끝을 자극하는 매혹의 향기를 인식하는 순간 그의 몸은 다시금 기운을 되찾았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맹위를 떨치며 기세를 회복하는 그의 신체가 잔뜩 민감해진 속살을 자극하는 느낌에 그녀 역시 깨어나 버리고 만 것이다.
신뢰와 헌신은 순간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면서 식은땀마저 흘리기 시작했지만, 꽃과 바람 역시 광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열락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 비록 깨어나긴 했어도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굳은 채로 그녀를 안고 있기를 얼마나 했을까. 영겁과도 같은 그 시간은 마침내 그녀가 조금 부스스한 모습으로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이 되어서야 끝을 맺었다.
“그렇게 하고도… 아직 성이 차지 않은 거에요?”
“…”
신뢰와 헌신은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아직 그녀와 자신이 서로의 몸을 결합시킨 상태이고, 또한 그녀의 촉감과 향기에 자신의 신체가 성을 내고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욕정이 끊이지를 않다니,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냐.
“할 수 없네요. 그대로 있어요.”
“읏!”
꽃과 바람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입으로 빨아들이는 것처럼 자신의 신체를 감아오는 느낌에 신뢰와 헌신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성을 잃고 몰아치기 바빴던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그 광란에 가까운 열락 속에서도 착실하게 경험치를 쌓았던 모양이다.
설마 그 열락의 폭풍 속에서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너무나도 서로를 갈구한 나머지 벌어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둘의 호흡은 금새 가빠지기 시작했고, 신뢰와 헌신은 가파르게 치솟아 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하지만 마침내 정상에 도달하기 바로 직전, 꽃과 바람은 행동을 멈추고는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
조금만 더 하면 올라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갑자기 멈추어버린 그녀를 올려다보던 신뢰와 헌신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말해 봐요. 도대체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
“말해주지 않으면 가게 해주지 않을 거에요.”
자기가 말해놓고도 어쩐지 부끄러웠던 모양일까. 아니면 그를 옭아매는 와중에 스스로의 몸 역시 달아올라 버린 탓일까.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말을 할 때마다 살짝 거칠어진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왔지만 그런 모습과는 달리 또한 말투는 지극히 냉정했다.
그녀는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이미 눈치 채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토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상황으로 자신의 몸을 이용해 몰아넣고는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직접 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식의 심문이나 고문이 있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그건… 크읏!”
예상외의 상황에 처한 탓에 잔뜩 당황해버린 신뢰와 헌신을 내려다보며 꽃과 바람은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이런 일을 꾸밀만한 신이 아니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아요. 아마도 누군가의 입김이 닿은 거겠죠. 그리고 십중팔구, 배후에 있는 것은 진님일테고요.”
“…”
세상에. 순식간에 그런 것까지 알아차린 것인가.
하지만 사실 이건 그리 어려운 추리도 아니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깡패신이라고 일컬어지긴 하지만, 그건 그만큼 신뢰와 헌신이 단순명쾌한 성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또한 이런 식의 계략에 아주 능수능란한 이마저 존재한다.
“아마도 내가 청혼을 거절한 것 때문에 당신은 진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을 테고, 그 결과 지금의 상황이 벌어진 거라면 앞뒤가 아주 잘 맞아요. 그렇지 않나요?”
“그, 그게… 흐우읏!”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절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가 절묘하게 몸을 옥죄고 있는 탓에 꼼짝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이미 대부분의 전모마저 추측해 버린 상황. 도대체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하면 좋단 말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신뢰와 헌신을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던 꽃과 바람은 작게 한숨을 쉬며 다시 이렇게 말했다.
“말해요. 그렇지 않으면, 난 당신에게 실망할지도 모르니까요.”
순간 신뢰와 헌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둘을 휘감았던, 그 끝도 없는 열락의 폭풍이 멈추었다는 것은 어쨌든 목적은 달성되었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미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상태라는 뜻. 하지만 그가 바라던 대로 아이를 가졌다 한들, 그녀가 자신에게 실망해서 얼굴조차 보지 않으려 든다면 말짱 헛일이다. 여신 혼자 잉태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낳는다는 식의 선택지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이런 식의 파국을 맞이한 인물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마, 말하겠소.”
꽃과 바람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안에서 폭발할 것만 같았던 그의 신체가 급속하게 기세를 잃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실망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심리가 크게 타격을 받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은…”
신뢰와 헌신은 머뭇거리며 자신이 형진을 찾아가 하소연했던 것부터 시작해서, 일주일간 어떤 특훈을 했는지, 그리고 그녀가 지금 착용하고 있는 머리핀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 머리핀이 그저 우리 둘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균형을 맞춰주기 위한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어. 정말 이런 식으로 정신없이 열락에 빠지게 만드는 물건일 줄은 생각도 못했어. 믿기 어렵겠지만, 이건 사실이야. 내 신격을 걸고 맹세해.”
신격을 걸고 맹세한다는 말은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의 신격 가운데 하나는 신뢰. 형진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을 했더라도 빠져 나갈 구석을 마련해 두었겠지만, 이 남자는 그런 식의 꼼수를 쓸 수 있는 이가 아니다.
“후…”
꽃과 바람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아랫배로 손을 가져갔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 신뢰와 헌신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진다.
바보다. 이 남자는.
남자를 스스로의 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차했을 때 그 남자의 아이를 낳을 각오까지 하고 있다는 의미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꽃과 바람은 그랬다. 결혼이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말자는 말은 정말로 액면 그대로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신뢰와 헌신이 몰랐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꽃과 바람 역시 자신의 내심을 그에게 확실하게 전달하지 않은 책임은 분명히 있다. 그저 잠깐 즐기고 마는 사이로 지내자는 식으로 들렸어도 사실상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어쩌면 그녀는 그런 식으로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자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의 심리를 알아차린 그가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심정으로 형진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나와 결혼하고 싶었어요?”
다시 이어진 그녀의 질문에 신뢰와 헌신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깟 형식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구애받는 것인가 싶다가도, 반대로 그깟 형식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댔던 자신의 모습 역시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버린다.
바보다. 나 역시도.
꽃과 바람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토록 격렬한 행위 중에도 떨어지지 않은 머리핀으로 손을 가져가더니, 그것을 빼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신뢰와 헌신은 이내 그 머리핀이 가루가 되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꽃과 바람은 그것을 잘 보관해 두는 쪽을 선택했다.
“어째서…”
신뢰와 헌신의 말에 꽃과 바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째서 부수지 않느냐고요?”
대답대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꽃과 바람은 가만히 손을 뻗어 여전히 자신의 밑에 깔려 있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런 중요한 증거를 그렇게 간단히 없애 버릴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역시 화가 난 건가. 하긴, 자신이라도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화가 날 것이다.
어리석었다.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에 휘둘려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러 버렸다.
신뢰와 헌신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모습을 보며 꽃과 바람은 그가 자책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너무 정직하다, 이 남자는. 하긴 그래서 자신 역시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이지만.
“게다가…”
그녀는 이내 작게 웃으며 다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둘째를 가질 때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둘째?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신뢰와 헌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키득거리던 꽃과 바람은 가만히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사실대로 다 털어놓았으니, 이제 가게 해줄게요.”
“허윽!”
모르겠다. 여자는 정말 모르겠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란 말인가.
신뢰와 헌신은 그렇게 속으로 울부짖으면서도, 농염한 향기를 발산하며 자신의 몸을 감싸오는 그녀에게 다시금 매혹당하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땡땡땡!
K.O!
You 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