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72
00971 [여행] =========================
신뢰와 헌신이 다시 형진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무려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처음 하루 이틀이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일이 잘 되어간다며 껄껄 웃었던 형진이지만, 그 시간이 일주일이 되고 이주일이 되어 마침내 한 달이 가까워지자, 슬슬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괘, 괜찮냐.”
그리고 마침내 한 달 만에 형진 앞에 모습을 드러낸 신뢰와 헌신의 모습은, 수없이 이어진 철야작업을 통해 프로젝트를 마치고 겨우 집으로 귀가하는 가장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신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피골이 상접해서 바람 불면 날아가 버릴 듯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가 특히 강골로 대표되는 신이라는 것을 감안해 보더라도 지난 한 달간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법한 일이다.
“꽃과 바람… 의외로 대단한 여자였군.”
아무리 힘의 차이가 있다 쳐도, 이 정도 되는 신을 이렇게 몰아붙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신뢰와 헌신은 눈에서 번쩍하며 빛을 발하더니 벼락같이 형진의 멱살을 잡았다.
“왜… 말 안했어?”
“응? 뭘?”
“그 머리핀… 진정한 효과에 대해 왜 말 안했냐고!”
그로서는 억울할 만도 하다.
엘리시온에서도 미녀로 손꼽히는 여신과 문자 그대로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시간을 보낸 건 처음 그가 의도했던 바가 맞다. 덕분에 그녀는 확실하게 아이를 잉태했고, 이제는 그렇게 잉태된 아이를 둘이서 정성스럽게 탄생시키고 키워내는 일만 남았다. 결혼이니 뭐니 하는 형식을 따질 것도 없이, 이 정도면 이미 명실상부한 부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속인 일로 인해 신뢰와 헌신은 안과 밖 모든 면에서 그녀에게 꽉 잡혀 버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아예 머리핀의 사용법까지 완벽하게 터득해 버린 그녀가 솔직히 그로서는 조금 무서울 정도다.
그 모든 일의 원흉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 신뢰와 헌신이 어찌 발끈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형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말했으면?”
“뭐?”
“말했으면, 네가 그녀를 속일 수 있었을 것 같아?”
“…”
신뢰와 헌신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형진은 실실 웃으며 자신의 멱살을 잡은 그의 손을 완력으로 풀어낸 뒤 말을 이었다.
“이 계획의 핵심은, 네가 진실을 모른다는 것에 있어. 여자를 우습게보지 말라고. 너 같이 단순무식한 녀석이 속이고 싶다고 해서 속여지는 존재가 아니니까.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해서 계획을 짠 거니까.”
“허…”
“바로 퇴짜 맞고 도망쳐 온 것이 아닌 이상, 계획은 성공적이라고 해야겠네. 예상보다 꽃과 바람이 더 정열적이었다는 사실이 좀 의외긴 하지만, 그런 예쁜 마누라가 적극적이기까지 하다니… 넌 정말 복 받은 거라고.”
형진은 그렇게 설명을 마치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뢰와 헌신을 향해 씩 웃더니 냅다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컥!”
갑작스런 형진의 주먹에 신뢰와 헌신은 속절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물론 형진이 전력을 다했다면 그는 통증을 느끼며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격에 손상을 입어 파편을 떨구었을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새 신랑에게 그 정도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이 잘 되어서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면 고마워할 줄을 알아야지. 어디서 성질이야? 너 그 성질 못 버리면, 나중에 아이를 낳고서도 그녀에게 버림받는 수가 있어. 알았냐?”
“미안…”
다짜고짜 멱살을 잡고 윽박지른 건 어쨌든 그의 잘못이라 신뢰와 헌신은 끽 소리도 못하고 사과했다. 형진은 그런 반응에 피식 웃었다. 어째서 꽃과 바람이 그를 선택한 것인지 조금쯤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일단 앉아봐.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뉴스 같은 걸 봐서 알고는 있다만, 그래도 경험담은 직접 당사자의 입으로 듣는 게 제일이니까.”
“뉴스?”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은 표정을 짓는 신뢰와 헌신의 모습에 형진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고 그와 동시에 지구 각지의 언어로 번역된 여러 가지 뉴스 동영상이 주위에 나타났다.
“아아… 이거 말이로군.”
뉴스들은 공통적으로 꽃이 만발한 휴양지의 모습과, 그곳에 다녀온 이후로 사이가 더 좋아졌다는 부부들의 증언을 담고 있었다. 꽃이 피어난 이상현상은 꽃과 바람, 사이가 돈독해졌다거나 하는 식의 현상은 아마도 신뢰와 헌신으로 인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정신줄을 놓고 있었으면 권능이 줄줄 새어나가는 것도 모르고 저 난리가 났겠나 싶긴 하지만, 앞서도 말했다시피 확실한 건 본인의 입으로 듣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아서.”
“크흠.”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 있어서는 꽃과 바람의 권능이 가장 눈에 띄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인 건 신뢰와 헌신 역시 같은 일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말보다 주먹을 선호하는 이 깡패신은 악명에 걸맞지 않게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왜? 말하기 부끄럽냐?”
“그건… 아니고. 사실 저런 부작용이 생기게 된 것 첫날의 일 때문이었어. 그때는 서로 다른 걸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오호? 그럼 이후로는 괜찮았다는 얘기야?”
“괜찮았다기 보다는… 그녀가 머리핀에 대한 걸 알아버려서 그걸 빼고 지냈거든.”
“헐.”
사실 머리핀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면, 이렇게까지 신뢰와 헌신이 초췌한 모습이 될 이유가 없다. 그것 자체가 서로가 지닌 힘의 균형을 맞춰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다시 말해 신뢰와 헌신은 머리핀의 도움도 없이 그녀의 맹공을 한 달 내내 버텨냈다는 뜻도 되는 셈이다.
“너… 의외로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감탄한 표정을 짓는 형진의 모습에, 신뢰와 헌신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
“뭐가 또 그런 게 아니라는 거냐?”
“한 달 내내 그 짓만 한 거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그런 거 아니라고.”
“헤에… 그럼?”
“나가서 밥도 먹고, 수영도 하고, 그… 마사지인가도 받고, 아무튼 그런 식으로 지내다 보니 시간이 가는 걸 몰랐을 뿐이야.”
“그리고 밤에는 다시 애를 만들고?”
“…”
하기야 리조트에서 묵는 것이니 시트도 갈고 청소도 해야 한다. 들어가서 몇날 며칠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면 뭔 일이라도 있나 싶어 일단 연락이라도 하고 보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미지 상으로도 그녀가 야수처럼 신뢰와 헌신을 몰아붙이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이 되질 않는다. 아름다운 꽃구름 속으로 끝없이 빠져드는 느낌이라면 몰라도. 하기야 결과는 마찬가지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슬슬 신뢰와 헌신을 구슬러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들으려고 하는데, 문득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형진이 허락하자 보호와 균형이 오랜만에 본신으로 그의 방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야?”
“그게… 꽃과 바람이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요.”
“헉!”
순간 신뢰와 헌신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려 했지만, 형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그의 손목을 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앉아 있어. 어차피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그, 그래도…”
“쯧쯧. 벌써부터 이러니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인다. 하기야 스스로가 원한 일이긴 하겠지만.”
“…”
형진이 혀를 차는 모습에 신뢰와 헌신은 다시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보호와 균형은 허락이 떨어지자 꽃과 바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꽃과 바람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신뢰와 헌신을 향해 살짝 눈을 흘기고는 어쩐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형진 앞에 마주 앉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보호와 균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 기묘한 대치를 지켜보고 있었다.
“즐거운 여행 되셨습니까?”
“덕분에요. 평생 다시없을 경험을 해버렸죠.”
“하하. 추억이란 건 좋은 거죠. 나중에 시간이 지났을 때 함께 되새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값진 일이니까요.”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꽃과 바람, 그리고 형진이 그렇게 뼈 있는 말들을 나눌 때마다 옆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는 신뢰와 헌신은 움찔움찔하고 있었다. 형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어쩐지 어릴 적에 실험 시간에 개구리 다리에 전극을 가져다 대던 일이 떠올라 버렸다.
“인사는 이쯤 해두고.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형진의 말에 꽃과 바람은 품에서 머리핀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것 때문이에요.”
“돌려주시려고요?”
“그것도 있고. 새로운 물품을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새로운 물품… 이라고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형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아까부터 무슨 얘긴지 몰라 눈치를 보고 있는 보호와 균형의 모습과 형진의 모습이 겹쳐서 꽃과 바람은 작게 웃고 말았다.
“덕분에 절대로 잊지 못한 경험을 해버렸지만, 사소하게 불만 사항이 있다고나 할까요.”
“호오, 어떤?”
“각 기능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기왕이면 저만 착용하는 식이 아니라 둘이서 같이 착용하는 식의 물품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보호와 균형이 함께 있는 관계로 핵심을 살짝 비켜가는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긴 해도, 역시 부끄럽기는 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당사자는 이미 아는 이들 사이에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변태로 소문 자자한 남자. 그런 이에게 남녀의 내밀한 일을 털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아무리 자유분방한 그녀라 해도 역시 부끄러운 기분은 저버릴 수가 없다.
“그렇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거듭된 형진의 말에 꽃과 바람은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신뢰와 헌신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기왕이면, 반지 같은 걸로요.”
“아…”
신뢰와 헌신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내밀한 관계의 남녀가 같은 반지를 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다.
사실 꽃과 바람은 아이를 낳아 주겠다든가, 둘째도 가져야 한다든가 하는 식의 말은 했지만 정작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주지 않고 있었다. 물론 아이를 함께 낳아 기르겠다는 말이 나온 시점에서 이미 대답을 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항상 그녀의 자유분방함이 두려운 신뢰와 헌신으로서는 어떻게든 확언을 듣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반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게다가 그것이 지닌 기능을 생각하면, 이것은 어떠한 형태의 말보다도 훨씬 큰 의미와 구속력을 지니게 된다.
“이제 안심했어요?”
“미안.”
옆에서 지켜보던 보호와 균형은 그제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아차리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둘 사이의 관계가 어느 정도는 공공연하게 알려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확정적인 관계가 정립될 정도로 일이 진전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제가 마다할 이유가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준비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그럼, 보상은…”
“아… 그런 건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모처럼 친구의 소망이 이루어졌으니, 그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두 분에게 드리는 선물이라고 해두죠.”
“감사… 합니다.”
꽃과 바람은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따지고 들기도 뭔가 미묘한 일이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하긴, 앞서의 머리핀에 대한 사죄의 의미라고 생각하면 그뿐일 수도 있는 일이고.
그렇게 꽃과 바람, 그리고 신뢰와 헌신이 조금은 화기애애하고 또 조금은 살기애매한 느낌으로 돌아가자, 형진은 여전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보호와 균형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아, 역시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어. 그렇지?”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둘 사이가 좀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일이 잘 해결되어서.”
보호와 균형은 이 모든 것이 형진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존경의 빛마저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또한 몰랐다. 자타공인 변태신이라고 불리는 형진이 이렇게 쉽게 다른 이에게 무료 서비스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신뢰와 헌신이나 꽃과 바람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기겁을 했겠지만 이미 배는 떠나 버린 뒤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변태혼은 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