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92
00991 [사전보고] =========================
스킬 시스템을 수호신들에게 공개한다는 내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공포와 죽음의 이름으로 통보되었다. 물론 그냥 막 쓰게 해주는 건 아니다. 시스템은 물론이고 스킬의 사용에 이르기까지 공헌도라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수호신 몇 명에게 스킬 몇 가지를 사용하도록 해주는 것 정도라면 형진에게는 딱히 큰 부담이 아니다. 새로운 아바타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마당에 그 정도는 공짜로 줘도 되지 않느냐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장은 별 것 아닌 듯 보여도 수호신들이 개별적으로 추종자를 모으기 시작하면 거기에 드는 비용은 순식간에 천문학적인 수치로 늘어나 버린다.
비용이라는 측면 외에 다른 문제도 있다. 추종자를 모으고 교단을 운영하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다. 무작정 아무 사람이나 추종자로 끌어들여서도 곤란하다. 다소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겠지만, 정말로 필요한 장소에 정말로 필요한 요소를 배치하는 것도 수호신들이 장차 각자의 교단을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익혀야할 내용이다. 수급되는 공헌도와 지출되는 공헌도의 균형을 맞추는 것 또한 교단을 이끄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다.
어쨌든 스킬 시스템의 공개 소식은 안 그래도 막막해 하던 수호신들에게 있어 큰 안도감을 주는 내용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형진은 아바타만 덜렁 던져주고 각각의 나라를 보살피라는 식으로 일을 추진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츠크렌 왕가의 말예, 룩스 바츠크렌이 수호신께 인사드립니다.”
“반가워요.”
거짓된 천국에는 꽤 오래전부터 타나토스에 속한 나라의 왕족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본래는 버리는 말로서 보내진 자들이었으나, 현재는 각각의 나라에서 꽤 영향력 있는 지위를 구축한 실세로 발돋움한 상태. 물론 그래봐야 형진이나 그의 식구들에게는 왕족 나부랭이로 불리는 처지지만 말이다.
스킬 시스템의 공개가 이루어진 직후, 형진은 각각의 나라를 맡을 수호신들에게 이들을 소개시켰다. 지금까지는 이 왕족 나부랭이들이 형진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형진이 아닌 수호신들이 각각의 나라를 전담해서 보살피게 되니 서로 상견례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우선 간단하게나마 저희 바츠크렌이 어떤 나라인지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부탁드려요.”
룩스 바츠크렌은 제법 의젓한 소년이었다. 정확히는 크루그와 마찬가지로 아직 소년과 청년의 중간 어디쯤 속한 느낌. 일반적인 가정이었다면 아직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나이겠지만, 주변 환경의 영향 때문인지 이미 한 사람 몫을 하는 그럴 듯한 왕족이다.
형진에게서 나라를 보살피라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아직 바츠크렌이 어디에 붙어있는 어떤 나라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상황이라 탑와와 루벨라는 룩스의 브리핑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바츠크렌은 산악지대에 위치한 나라로서 지형이 험한 편이긴 하지만 배후에 자리 잡은 산맥의 만년설을 수원으로 하는 풍부한 수량의 하천 덕분에 상당히 풍요로운 토지를 가지고 있다. 영토 면적은 상당히 넓은 편에 속하지만 대부분이 험한 산악 지형이라서 인구의 절반 정도가 수도에 밀집해 있으며, 이 때문에 타나토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왕가의 힘이 상당히 강력한 편이다.
간단하게나마 바츠크렌의 지형과 문물, 그리고 풍습 같은 걸 설명한 룩스 바츠크렌은 브리핑을 마치며 간단하게 왕가의 상황을 전했다.
“사실 이번 조치로 인해 바츠크렌 왕가는 물론이고 귀족들 역시 상당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째서요?”
“나라의 안녕을 보살피는 수호신이라는 명분이긴 하지만, 결국 현재 바츠크렌의 국정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층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아…”
이미 타나토스에 속한 국가들은 비슷한 상황을 한 번 겪었다. 볼모 내지는 희생양으로 보내졌던 왕족 나부랭이들이 각국의 심층부에서 신의 의사를 전하는 대변인으로서 그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엔 무려 신이다. 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의, 그런 신이 있었나 싶은 그런 존재이긴 해도 엄연히 신이 각국의 국정에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움츠러들어 있던 그들로서는 기겁을 하고 놀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저를 별로 반기지 않겠군요.”
처음부터 쉬운 일이 어디 있겠나. 그 정도는 탑와와 루벨라도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막상 이렇게 상황을 듣고 보니 한층 더 막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일전에 공포와 죽음도 그런 말을 했었다. 나라의 흥망성쇠야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뒤집어쓰게 된다. 수호신의 역할은 그런 무고한 피해나 희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돌보는 일이라던가. 면전에서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런 거구나 싶었지만, 막상 이렇게 바츠크렌이라는 나라에 대한 것을 전해 듣고 보니 절대로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씁쓸한 표정을 짓는 여신의 모습에, 룩스 바츠크렌은 어쩐지 좀 미안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사실 자신도 처음 신의 의사를 전하는 역할을 부여 받았을 때 상당히 막막한 기분이었다. 변변한 권력 기반조차 없는 상태에서 오직 신의 힘에만 기대서 기존에 나라를 쥐고 흔들던 이들과 반목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둘은 사실상의 운명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권력은 부모 자식 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물며, 왕권이 강한 바츠크렌 같은 경우에는 더욱더 그런 경향이 심하죠.”
권력을 둘러싼 암투 같은 것에 대해서는 경험치가 없다고 봐도 무방한 탑와와 루벨라로서는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 거릴 정도다.
“그럼,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을까요.”
“주신 같은 분이라면 그냥 힘으로 밀어붙여도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은 일단 유화책을 써서 다독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를 들자면, 유력 귀족의 자식들을 추종자로 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죠.”
“추종자요?”
예상외의 제안에 탑와와 루벨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룩스 바츠크렌은 무엄하게도 그런 여신의 모습이 어쩐지 좀 귀엽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권력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수호신이라는 존재로 인해, 기존에 자신들이 누리던 것들을 잃는 것. 이런 저런 말을 구차하게 덧붙여봐야 결국은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추종자를 받아들인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왕가에서 저라는 존재가 신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유력 귀족들 또한 같은 역할을 할 추종자를 내놓는 것이죠. 이것은 단순히 그들을 다독이는 유화책을 넘어 다른 여러 가지 효과를 지니게 됩니다.”
“어떤?”
“첫째, 기존에는 왕가만이 독점하고 있던 신과의 연결 창구가 각각의 유력 귀족들에게도 주어집니다. 이건 다시 말해, 왕가의 권력이 귀족들에게로 분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있어, 이것은 새로운 권력을 나누어 받는 것과 같은 일로 여겨지겠죠. 그만큼 귀족들의 반발을 줄일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탑와와 루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 듯한 얘기다. 문제는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점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면 되는 일이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엔 권력을 나누어 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신님의 힘이 강화되는 효과를 지닙니다. 기존에 저라는 존재를 통해 왕가에만 전해지던 영향력이 각각의 유력 귀족 가문으로 넓혀지는 것이니까요. 이것이 두 번째 효과입니다.”
“아…”
“그렇게 영향력을 넓히게 되면, 현재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왕가에 대한 훌륭한 견제책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기존에는 왕가에서 독단적으로 추진되던 일들도, 한 단계를 더 거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죠. 그것은 그만큼 정책 결정에 있어 여신님의 의향이 중요하게 작용하게끔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이것이 세 번째 효과입니다.”
탑와와 루벨라는 감탄했다. 아직 완전히 어른이 되지도 못한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훨씬 더 높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대한 순수한 감탄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건 룩스 바츠크렌이라는 소년이 전부 생각해낸 것이 아니었다. 왕족 나부랭이들끼리 머리를 싸매고 앉아 고민한 결과이기도 하고, 그런 고민들을 듣고 형진이 건넨 충고들을 종합한 결과이기도 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지금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브리핑을 하는 것도 또래의 소년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정도 능력조차 없었다면 볼모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신의 대변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갈 수 없었으리라.
“마지막으로, 이들은 여신님이 실질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를 감춰주는 훌륭한 가림막이 될 것입니다.”
“가림막이요?”
“그렇습니다. 외부로 드러나 있는 만큼, 이들의 행동은 눈에 띌 수밖에 없죠. 그렇게 주변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여신님께서는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 움직이시면 됩니다. 이것이 네 번째 효과가 되겠군요.”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
사실 구체적으로 바츠크렌이라는 나라에서 뭘 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리는 건 아직 이른 일이다. 그녀가 바츠크렌이라는 곳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지금 눈앞의 소년이 간단하게 브리핑한 내용 몇 가지가 고작. 적어도 그녀가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서는 건, 좀 더 바츠크렌이라는 나라를 알고 난 뒤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유력 귀족에게서 추종자를 받아들이는 건, 그만큼 바츠크렌이라는 나라를 둘러보는데 필요한 시간을 버는 효과 역시 지니게 된다. 각각의 가문을 대표할 인물을 선별해 뽑는 과정이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질 수도 없고, 추종자를 보낼 가문을 선별하는 문제 역시 결정에 상당한 시간을 들이게 될 테니까.
“룩스님은 어떤 신을 모시고 계시죠?”
“저는 보호와 균형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아쉽다. 이 똘똘한 소년이 자신의 추종자였다면 좋았을텐데. 생각 같아서는 빼앗아 오고 싶은 마음마저 들 정도. 그러나 이미 대신의 반열에 든 보호와 균형을 섬기는 추종자를 대놓고 빼앗아 올 수는 없는 일이다.
탑와와 루벨라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짓자 룩스 바츠크렌은 살짝 쓴웃음을 짓더니 문득 이렇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 여동생을 소개시켜 드려도 되겠습니까.”
“여동생이요?”
“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아이지만, 여신님께서 원하신다면 추종자로 받아들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룩스 바츠크렌이라는 소년이 자신의 혈육을 새로운 수호신에게 인질로 내놓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소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룩스 바츠크렌이 신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되면서 그의 주위 인물들 역시 보다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다. 본래 그에게는 여러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오직 한 명의 공주만이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였다.
본래는 나이가 차면 어딘가의 귀족에게 팔려갈 운명이었지만, 그녀의 오빠가 신이라는 막강한 배후를 얻게 되면서 그녀의 위치 역시 덩달아 높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왕가 내에서의 위치가 높아졌다 하더라도, 결국 이전과 달라진 것이라고는 시집 갈 가문의 지위가 보다 높아질 것이라는 점 하나 뿐이다. 하지만 룩스는 이미 다른 이들이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이 여기는 바츠크렌이나 타나토스 외에도 다른 수많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여동생 또한 그런 세상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다른 신의 추종자로 만들어 자신과 같은 위치로 올려놓는 것이겠지만, 추종자라는 것도 그냥 되고 싶다고 생각해서 아무렇게나 막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새롭게 자신의 나라를 맡게 된 수호신의 존재는 그야말로 불감청고소원, 감히 청하지는 못하나 원래부터 몹시 바라던 일이라는 말 그대로다.
“저, 정말요?”
지금껏 교단은커녕 추종자 하나 거느려 본적이 없었던 여신에게 있어 그건 무척이나 기쁜 제안이었다.
물론 유력 귀족들의 자제들을 추종자로 받아들일 계획을 세우긴 했어도, 그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려야 이루어질 일인데다 어느 정도는 정략적인 측면이 가미된 결정이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었던 소년의 여동생을 추종자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감흥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아름다우신 여신님의 추종자라면, 제 여동생도 기뻐하며 받아들이겠지요.”
룩스가 미소 지은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자, 탑와와 루벨라는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얼른 말을 받았다.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언제…”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불러올까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도록 하죠.”
사실 룩스가 이번 만남에서 이루고자 하는 진짜 목적인 바로 이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기대 가득한 여신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바츠크렌이라는 나라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보다 넓은 세계를 알게 된 그에게 있어서 이 작은 나라는 굴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아직 어리다. 아직 그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좀 더 힘을 모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눈앞의 여신을 힘껏 도울 필요가 있다.
========== 작품 후기 ==========
추워요…
뭔 날씨가 계속 이 모양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