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106)
현진해운 정리매매가 시작되었다.
거래가 재개되자 주가는 하루만에 90퍼센트 이상 폭락하며 75원을 찍었다. 다음날에는 또 폭락해 11원이 되었다. 그리고 6원의 종가를 끝으로 거래소에서 퇴출되었다.
한때 해운업계 7위까지 올라섰던 현진해운은 경기불황, 잘못된 경영, 경영자의 각종 비리 등으로 파산했다.
마지막까지 주식을 들고 있던 소액주주들은 배와 함께 침몰했다. 하지만 배를 몰던 선장은 짐까지 다 챙겨 혼자 무사히 구명보트를 타고 빠져나갔다.
그나마 소액주주들이 조금이라도 배상받을 수 있는 길은 채영은 회장이 약속한 대로 사재출연하는 것뿐이다.
당장 돈을 내놓으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채영은 회장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거주중이던 삼성동 주택을 매각했다.
이제까지 드러난 혐의만 해도 최하 징역 10년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금융범죄에 매우 관대한 나라.
특히 재벌들은 웬만한 비리를 저질러도 전부 집행유예로 빠져나온다. 그러나 횡령과 배임은 어떻게든 무마한다 치더라도 내부자거래가 문제다.
아무리 정앤김이 달라붙어 변호를 하더라도 실형을 피하기는 힘들 것이다. 몇 년을 살든 소액주주들이 잃은 돈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현진해운이 망한 건 안타깝지만, 덕분에 살 집을 구했다.
난 매각대금을 치르고, 취등록세를 지불했다. 고가주택인 만큼 세금도 엄청났지만, 미리 배당을 받아놓은 덕분에 대출은 필요 없었다.
난 택규와 현주 누나, 그리고 엘리와 함께 집을 보러갔다. 차를 타고 가니 회사에서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조용한 주택단지에 위치한 집은 두 면을 도로와 접하고 있었다. 높게 쌓은 벽돌담 때문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 힘들었다.
평평한 도로와 접한 대문은 정원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고, 경사진 도로 쪽의 대문은 바로 지하주차장으로 이어져 있어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도 출입이 가능했다.
리모콘을 누르자 대문이 열렸고, 나는 차를 몰고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지하는 2층으로 되어있고, 주차장, 창고, 보일러실 등이 있었다. 주차는 총 12대까지 가능했다.
차에서 내린 택규는 깜짝 놀랐다.
“이야! 집 안에 엘리베이터가 있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니 신기하다. 하긴 지하까지 포함하면 네 개 층이니, 매번 걸어 다니기 힘들겠지.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는 감탄했다.
“와아! 너무 예뻐요.”
실내는 영화에서나 보던 펜트하우스 같은 모습이었다.
천장이 높아 시야가 탁 트였고, 바닥에는 흰색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통유리를 통해 햇살이 집 안으로 들어왔고, 거실에 앉은 채 정원을 볼 수 있었다.
택규는 거실 한쪽에 있는 벽난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진짜일까?”
옆에 장작이 쌓여있는 걸 보니 진짜인 것 같다.
“거실이 너무 넓어 휑한 느낌이네요.”
엘리는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구가 없어서 그럴 거예요. 소파와 테이블을 잘 배치하면 될 걸요.”
우리는 1층부터 천천히 둘러보았다.
실내는 호화스럽기 그지없었다. 침실은 안방을 포함해 총 네 개, 그 외에 서재, 집무실, 응접실, 회의실, 영화감상실, 헬스장 등이 갖춰져 있다.
아일랜드식 구조로 된 1층 메인 주방에는 와인바가 딸려있고, 서브 주방은 따로 있었다.
“주방 넓네. 요리하기 좋겠는데.”
“어차피 라면 끓여먹거나, 짜장면 시켜 먹을 텐데.”
“그건 그래.”
화장실은 총 여섯 개로 1층에 세 개, 2층에 세 개가 있었다.
오븐, 인덕션, 싱크대 같은 주방제품은 전부 독일제에, 화장실 타일과 욕조도 전부 최고급 수입제품들이다. 서재와 회의실에 있는 붙박이 가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얼마나 돈을 쓴 거야?
부잣집 사모님들이 인테리어 새로 할 때마다 논현동 수입가구전문점에 수십억씩 결제한다는 게 농담이 아닌 모양이다.
건물이 지어진지 5년이 지났지만, 상주인력이 계속 관리해온 만큼 새 집이라 해도 좋을 만큼 깨끗했다.
“어때요, 진후? 새 집은 마음에 들어요?”
엘리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네요.”
보지도 않고 샀지만, 이 정도로 괜찮을 줄은 몰랐다.
조명등, 벽지, 바닥재, 심지어는 화장실 수도꼭지와 문손잡이까지도 집 분위기와 잘 어우러졌다.
인테리어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품격이 느껴진다.
“경영은 더럽게 못했어도 집 꾸미는 데는 재능이 있었나 보네요.”
현주 누나는 피식 웃었다.
“몰랐어? 채영은 회장 원래 현대미술 전공이야. 전시회 경력도 있고. 미적감각은 뛰어난 편일 걸.”
“…….”
그럼 현진해운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미술 쪽 일이나 계속할 것이지, 왜 직접 경영해서 멀쩡한 기업을 망하게 만든 거야?
우리는 현관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갔다.
본 건물과는 별도로 우측에 2층짜리 작은 건물이 있었다. 경호와 집안일을 하는 상주인력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정원까지 꼼꼼하게 둘러본 엘리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사는 언제 할 거예요?”
“글쎄요.”
몇 군데 손 보고, 가전이랑 가구 들여놓고 하다보면 연말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집 사이즈가 워낙 달라서 웬만한 가구와 가전은 전부 새로 사야할 판이다.
택규는 연신 감탄했다.
“진짜 돈을 많이 벌긴 했나보다. 이런 집을 사다니.”
“그러게 말이야.”
처음으로 내 명의로 산 내 집이다. 예전 집은 택규가 샀으니.
사옥으로 5천억 원짜리 빌딩도 샀지만, 집을 사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현주 누나는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현진해운이 망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지. 기업이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잘나갈 때일수록 조심해야 돼.”
코닥이나 노키아 같은 세계적인 기업도 흐름을 읽지 못해 한 순간에 몰락했다.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할게요.”
현주 누나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둘 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새 집 산 거 축하해.”
* * *
그 사이 몇 가지 소식이 들려왔다.
첫째는 은성차가 보안업계 6위인 JD캡스를 3천억에 인수했다는 소식이었다.
“꿩 대신 닭인가?”
“이 정도면 닭도 아니고 메추리지.”
보안업계는 상위 3개 업체가 80퍼센트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JD캡스는 규모, 매출, 영업이익 모두 엑스캅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엑스캅 인수에 실패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소형업체를 인수해 키우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둘째는 은성차그룹 기조실 감시팀이 감사를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상엽 선배가 말했다.
“단지 경쟁에서 밀린 거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누가 봐도 정보가 새나간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이잖아.”
“감사를 벌인 이상 조용히 끝나지는 않을 텐데요.”
내 말에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겠지. 아마 서상원 팀장은 자리를 지키기 힘들 거야. 엄밀히 말해 이번 인수전을 지휘한 건 한찬영이지만, 차기회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니…….”
“결국 서상원 팀장에게 화살이 돌아가겠네요.”
“서상원뿐 아니라 인수합병팀 전원이 감사대상에 올랐어.”
통화내역, 거래내역, 핸드폰 위치정보 등은 영장이 있어야만 들여다볼 수 있다.(국정원 불법사찰은 예외) 때문에 감사팀에서는 본인들이 알아서 관련 자료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다른 업체와 접촉한 적은 없는지, 돈을 받은 건 없는지, 최근 어디를 갔는지 등을 다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회사가 이렇게 나오면, 직원은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결백하다면 제출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테고, 제출하지 않는다면 결백하지 않다는 뜻이 되니까.
당사자들의 자존심은 완전히 짓이겨지겠지만.
택규는 날 보며 말했다.
“네 잘못으로 한 집안의 가장이 누명을 뒤집어썼구나.”
“……그게 왜 내 잘못이니?”
멋대로 오해한 은성차 잘못이지.
감사가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서상원 팀장을 포함한 인수협상팀 관계자 전원이 사표를 제출했다.
수리여부는 감사가 끝난 후에나 결정되겠지만, 배신자로 몰리는 분위기 속에서 계속 회사에 남아있기는 힘들 것이다.
금융권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취업자는 넘쳐난다. 하지만 조 단위의 돈을 다를 수 있는 최고급인력은 한정되어 있다.
서상원은 레드스톤그룹 한국사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다. 당시 한국시장에서 동인생명을 포함한 여러 건의 인수합병을 성사시키며 이름을 알렸다. 그를 은성차그룹으로 영입하기 위해 한찬영이 직접 삼고초려 했을 정도다.
그런데 이제는 배신자 취급을 받고 감사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연하지만,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난 입찰장에서 인사를 나눴던 40대 중반의 남자를 떠올렸다.
“한 번 만나봐야겠는데.”
* * *
연락은 했지만 별 기대는 안 했다. 그런데 바로 만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난 택규와 함께 회사 근처 일식집에서 서상원을 만났다. 마음고생 때문인지 입찰장에서 봤을 때보다 많이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눈 다음 자리에 앉았다.
“뭐 드실래요? 여기 참치가 맛있다던데.”
서상원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식사는 됐습니다. 제가 여기에 온 건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요?”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로 저희 쪽에서 정보를 빼간 게 맞습니까?”
그게 궁금해서 한달음에 달려온 건가?
“팀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입찰가를 알고 있었던 것은 한찬영 부회장님과 저를 제외하면 세 명뿐이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뒷돈을 받고 입찰가를 팔았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서상원 팀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다 같이 의심받는 처지지만, 끝까지 팀원들을 믿고 있는 건가?
마음에 든다.
난 메뉴판을 덮으며 물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그 금액을 썼을까요?”
“그걸 알고 싶은 겁니다. 그날 입찰장에서 대표님 쪽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은성차 입찰가가 발표되었을 때 오현주 지사장님은 분명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전혀 놀라지 않으시더군요. 마치 그 금액이 나올 걸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난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표정에 안 드러났을 뿐이지, 속으로는 많이 놀랐어요.”
옆자리에 앉은 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좀 포커페이스에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원래 저희 쪽 상한가는 29억2천만 달러였어요. 그런데…….”
난 금액을 쓰게 된 경위를 적당히 꾸며서 설명해주었고, 서상원 팀장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단지 우연이었다는 겁니까?”
택규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원래 세상에는 별 일이 다 일어나기 마련이죠.”
난 슬쩍 얘기를 꺼냈다.
“사표를 제출했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아직 계획은 없습니다.”
“저희 쪽으로 오는 건 어떤가요?”
이런 얘기가 나올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모양이다.
서상원 팀장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가 OTK컴퍼니로 가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글쎄요. 배신한 대가로 한 자리 챙겼다고 생각할까요?”
“평생 명예롭게 살지는 못했어도 부끄럽게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역시 쉽지 않구나.
난 본격적으로 설득에 나섰다.
“생각해보세요. 입찰결과는 이미 다 알려졌어요. 은성차뿐 아니라 다른 업체들도 비슷한 의심을 하고 있을 겁니다.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속으로는 찝찝하게 생각하겠죠.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 시선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아니면 이대로 은퇴하고 낙향이라도 하실 건가요?”
감사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미 그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금융인로서든 직장인으로서든 일종의 사형선고를 당한 셈이다.
“이 업계에서 서상원 팀장님이 결백하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저 뿐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직접 그 입찰가를 썼으니까요.”
“…….”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OTK컴퍼니로 가면, 대표님께서도 비난을 피하실 수 없을 겁니다.”
경쟁업체 직원을 매수해 입찰가를 빼내는 건 불법행위다.
처벌은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할 수 있지만, 비난은 심증만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난 피식 웃었다.
“상관없어요. 제가 욕먹은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브렉시트 때는 외환시장 털었다고 영국인들에게 욕먹고, 로날드 당선 때는 다이앤을 지지하던 미국 유권자들에게 욕 얻어먹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는 정권과 한바탕 하는 바람에 여당과 정부 지지자들에게 욕먹는 중이고.
“본인만 당당하면 그만이에요. 남들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B2C(Business to Consumer) 기업들은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광고도 열심히 하는 거고.
하지만 OTK컴퍼니는 금융투자회사. 소비자와 직접 접촉하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여론이나 세간의 시선쯤은 가뿐하게 무시해도 된다.(그렇다고 쓰레기 같은 짓을 해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상원 팀장에게 말했다.
“어떤 심정인지 이해가 되지만, 미안하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 둘 다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고 스스로에게 떳떳하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약속드릴게요. 저와 함께 일하시면 반드시 팀장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어떻게 말입니까?”
난 자신 있게 말했다.
“앞으로 제가 하는 일들을 보면, 3조짜리 매물을 1억 차이로 가져간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