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11)
기홍 선배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IMF 때 수많은 국내기업들이 외국자본에 헐값에 팔려나갔지. 그때 3만 원, 5만 원에 쓸어 담은 서성전자가 지금은 140만 원이 넘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외국 IB들은 구조조정 끝마치고 다시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는데, 한국 IB들은 지금 뭐하고 있냐는 거야.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하는데? 4차 산업혁명이다, 핀테크다, 블록체인이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고 있어. 금융이 그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지면 또다시 예전과 비슷한 일이 반복되게 될걸.”
기홍 선배는 반쯤 꼬인 혀로 계속해서 말했다.
“위대한 기업가는 있어도 위대한 투자자는 없어. 그게 이 나라의 현실이야.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야 돼. 그래서 외국 자본과 당당하게 경쟁해야 한다고. 다른 나라 언론에게 먹튀 했다고 욕도 좀 처먹고!”
이는 단지 돈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선진국들은 수백 년에 걸친 자본주의의 역사와 문화가 있다. 반면 우리나라 금융은 이제 걸음마를 벗어난 수준이다.
“그런 날이 오긴 올까요?”
내 물음에 기홍 선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크크, 글쎄다. 혹시 모르지.”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는데,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렸다.
띠리링!
유리는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
“지금 기홍 선배님과 다른 선배들과 함께 한국포차에 있어요. 예. 안으로 들어오시면 돼요.”
짧은 통화가 끝나고 유리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누구야?”
경일이의 물음에 유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선아 선배요. 원래 오늘 보기로 했었는데, 선배들과 술 마신다고 하니까 여기로 오겠대요.”
“뭐!?”
그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민영이는 질책하듯 말했다.
“선아를 여기로 부르면 어떡해?”
유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왜요? 부르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그, 그게······.”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향했다.
사실 지금 가장 당황한 사람은 나였다.
아이씨! 어떡하지? 그냥 도망갈까? 화장실에 숨을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술집 문이 열리며 흰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치고는 큰 키에 늘씬하고 굴곡진 몸매,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 새하얀 피부와 긴 생머리.
난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고, 그녀 역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윤선아······.”
“강진후?”
헤어진 후 첫 만남이었다.
* * *
술자리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탁탁!
기홍 선배는 젓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분위기가 왜 이래? 한 잔 하자. 건배!”
짠!
잔이 부딪혔다.
난 소주를 마시는 척하며 선아를 힐끔 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괜히 나만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차라리 취하기도 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난 계속 술을 들이켰다.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르는데, 선아가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내 쪽으로 슬쩍 내밀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커피 마시러 갈래?]* * *
술자리를 빠져 나온 나는 24시간 카페에 앉았다.
늦은 시간임에도 자리가 제법 차있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이 토익책을 펼쳐놓은 채 공부 중이었다. 아마 오늘 밤새 같이 공부할 생각인 듯했다.
주문한 커피 두 잔을 받아온 선아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난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복학하면 학교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다.
과내에서 서로 사귀고 헤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만약 그런 걸로 서로 안 볼 사이가 된다면, 매년 상당수는 자퇴했겠지.
애초에 신성한 지성의 전당에서 연애를 한 것 자체가 문제다. 비싼 등록금 내고 다니는 건데 공부만 열심히 할 걸.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선아였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따져보면 거의 2년 만이다.
“군대는 잘 다녀왔어?”
“그럼. 잘 다녀왔지.”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온 것 같긴 하지만.(한 번은 진짜 죽을 뻔 했고)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신입생 환영회에서였다. 이제 갓 미성년자 티를 벗은 동기들 사이에서 선아는 확실히 눈에 띄었다.
단지 예쁜 걸 넘어서 선아에게는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동기고 선배고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다. 아마 다들 그녀와 사귀기를 원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나였다.
우리는 과내 공식커플로 학기 내내 붙어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참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아버지 회사에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어머니는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셨다. 회사 상황을 잘 모르는 나라도 상황이 안 좋게 치닫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결국 회사는 부도가 났고, 아버지는 쓰러지셨다.
부도에, 병중에, 상중에, 이사에······ 뭐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잘 모르겠다. 선아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 것은 그쯤이었다.
나는 붙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중간에 몇 가지 안 좋은 일었던 걸 빼면, 그냥 다른 연인들처럼 잘 만나다가 잘 헤어진 셈이다.
“그 선배랑은 잘 지내?”
난 학교 축제 때 잠깐 놀러왔던 남자 선배의 모습을 떠올렸다. 직접 본 건 그날이 처음이지만, 그 전부터 얘기를 많이 전해 들었다. 그만큼 유명한 선배였기 때문이다.
고준형.
대기업 계열사 중 하나인 GH건설사의 셋째 아들이다. 잠깐 봤지만, 잘생기고 성격도 좋았던 것 같다.
학교를 휴학하고 입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영이에게 전해 들었다.
선아가 그 선배와 사귀고 있다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 지내.”
으음, 잘 지내는구나.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얘는 언제부터 그 선배와 사귀었던 거지? 설마 나와 헤어지기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왼손에 껴진 반지를 보고는 그만두었다.
이제 와서 안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녀의 얼굴은 예전 그대로였다. 다만 옷과 가방 액세서리 등은 전부 바뀌었다.
화장과 복장은 세련돼졌고, 시계, 가방, 구두 등은 전부 명품으로 보였다.
“많이 변했네.”
선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대학생에게 2년이면 꽤 긴 시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난 뭘 했더라?
“······.”
열심히 나라를 지켰구나.
국방의 의무를 다한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젠장.
잠시 머뭇거리던 선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 힘들 때 헤어지자고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뭐, 다 지난 일인데.”
선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후야. 난 널 정말 좋아했어.”
이 말을 들으니 갑자기 울컥한다.
난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너는 다른 애들과 달랐던 것 같아. 항상 생기가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졌어. 그래서 널 좋아했던 거고.”
“그럼 왜 헤어지자고 한 건데?”
듣지 않아도 대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집이 망했기 때문이겠지.
“그저 기회가 왔을 때 잡았을 뿐이야.”
“무슨 기회? 부잣집 도련님과 사귈 기회?”
선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비난해도 할 말은 없어.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나니까. 하지만 난 꿈을 이루고 싶어.”
“······꿈?”
이게 대체 뭔 소리야?
그녀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표정을 본 선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은 웃음을 지었다.
“먼저 일어날게.”
선아는 가방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난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다가 멈칫했다. 대신 질문을 던졌다.
“네가 말하는 그 꿈이 뭔데?”
선아는 고개를 돌려 날 보며 짧게 대답했다.
“성공.”
* * *
난 술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근처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를 사서 파라솔 아래 앉았다.
“하아.”
밤공기가 쌀쌀한지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난 홀로 소주를 마시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장례식도 치르기 전에 집이 넘어갔다.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았다. 그리고 선아는 이별을 통보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어머니는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다행히 며칠 전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중학생 때 팔았던 게임 캐릭터는 12억4천만 원이 되어 내 품으로 돌아왔다.
“성공이라······.”
대체 뭐가 성공이지?
그 순간.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
이게 뭐야?
OTK컴퍼니는 택규가 조세회피처에 만든 페이퍼컴퍼니. 1인 법인인 만큼 CEO는 당연히 택규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CEO라는 거야?
난 멍하니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내가 택규가 만든 회사의 CEO가 된다는 건가?
홀로그램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난 직감적으로 이게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무슨 수를 써도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내 선택에 따라 미래는 얼마든지 바뀐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선택의 순간이다.
“OTK컴퍼니 CEO 강진후······.”
이게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인가?
강렬한 확신이 머리를 때리는 것만 같았다. 그 과정이 어떨지, 그 끝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 *
택시에서 내린 나는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택규는 불을 다 켜놓은 채 소파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야! 일어나 봐! 얼른!”
몇 번을 흔들자 택규가 억지로 눈을 떴다.
“으어어! 잘 자고 있었는데, 왜 깨워?”
택규는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술을 얼마나 퍼마신 거야? 취했으면 너네 집으로 가, 임마.”
“손 내봐.”
“응?”
택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손을 꽉 붙잡았다.
“악! 뭐하는 거야?”
“잡았으니까, 우리 같이 하는 거다.”
자다가 뭔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하긴 뭘 해?”
“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