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124)
난 지점장에게 보고 하겠다는 직원을 말렸다.
지점장이 오면 깎아줄 것도 아닌데, 만나봐야 뭐하겠는가?
어머니 선물은 동탄 집으로 배송시켰고, 나머지는 들고 나왔다. 엘리는 뿌듯한 표정으로 계속 손목에 찬 시계를 이리저리 보았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그럼요. 진후가 처음 사준 선물인데.”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나도 참 무심했다. 돈만 벌줄 알았지, 주위 사람들 생일이나 선물 하나 제대로 안 챙겨구나.
난 엘리에게 물었다.
“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12시까지는 생일이니, 그 전까지는 소원 들어줄게요.”
엘리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꼭 신데렐라가 된 것 같네요.”
“시곗바늘이 12시를 가리키면 이 차가 경차로 바뀔 수도 있어요. 그러니 얼른 말해 봐요.”
내 말에 잠시 키득거리든 엘리는 손뼉을 쳤다.
“아! 하나 생각났어요.”
“뭔데요?”
“가보면 알아요.”
* * *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잠실에 있는 리테타워 전망대.
작년에 완공 된 리테타워는 한국 최대의 초고층빌딩이자 랜드마크였다. 총 124층으로 된 건물의 최상층부는 전망대로 구성되어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리테그룹은 주력사업은 제조업이 아닌, 식품, 유통, 호텔, 백화점, 서비스 등.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서울 한복판에 이런 엄청난 마천루를 세운 것이다.
그동안 소문은 몇 번 들었지만, 직접 와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창가 쪽으로 다가서자 서울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강남은 물론 한강과 강북까지도 시야에 들어왔다.
엘리는 창밖을 보며 감탄했다.
“서울의 야경은 아름답네요.”
좋아하는 걸 보니,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도 그 말했던 거 알아요?”
내 말에 그녀는 눈을 찡긋했다.
“기억하고 있네요.”
예전에 함께 올림픽대로를 타고 돌아오며 한강의 야경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엘리는 나중에 놀러오면 홍콩 야경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했다.
이후 나는 택규와 함께 홍콩에 갔고, 엘리와 현주 누나와 다 같이 빅토리아 피크에서 야경을 감상했다.
타워를 중심으로 360도 전망을 볼 수 있기에, 우리는 시계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둘러보았다.
난 엘리가 구경하는 사이 전망대 안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샀다.
“마셔요.”
“고마워요.”
난 의자에 걸터앉았고, 엘리는 내 옆에 앉았다. 자리가 좁아 어쩌다 보니 앉은 자리에서 서로의 손이 살짝 맞닿았다.
엘리는 굳이 손을 빼지 않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계속 그렇게 앉아있었다.
* * *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엘리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처음에는 문화차이나 표현방식에서 생기는 착각일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그동안의 행동들을 볼 때 단순한 착각은 아닐 것이다.
외모는 물론 성격이나, 직업 등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여자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잘 믿기지가 않는다.
설마 나 혼자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연애를 한지 너무 오래 되다보니, 감이 잘 잡히질 않는다.
생각을 하는 사이 차는 삼성역에 있는 그랜드 데이턴 호텔 앞에 도착했다.
엘리는 문을 열며 말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자, 잠깐만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엘리는 당황했다.
“왜 그래요?”
“그, 그게…….”
일단 잡긴 했는데 뭐라고 말해야 돼?
“저한테 조금만 시간을 줄래요?”
“예?”
기승전결 없이 이런 말을 하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음, 그러니까…….”
내가 당황해 제대로 말을 못하자, 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뭘 알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알았다고 하면, 다행인 거지.
그녀는 내 표정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돼요.”
“예. 그럼요.”
엘리는 차에서 내려서 손을 흔들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조심히 가요.”
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호텔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금방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나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대체 내가 방금 뭔 소리를 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난 잠시 핸들에 머리를 박고 반성의 시간을 가진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갔다.
택규가 거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뭐하다가 이제 와?”
“일이 좀 있었어.”
난 택규에게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현주 누나 선물. 백화점 간 김에 샀어. 니가 전해줘.”
“내 선물은 없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니 건 니 돈으로 사.”
돈도 많은 놈이.
* * *
팀장들과 회의를 끝마치고 나오는데, 뜻밖의 손님이 회사로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CEO실로 올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20대 초중반의 여자가 들어왔다.
몸매가 드러나는 짧은 베이지색 원피스, 그 위에 트렌치코트를 입었고, 적당힌 키에 하이힐을 신었다.
얼굴은 평소 관리를 잘 받았는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이목구비는 미인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들고 있는 가방부터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패션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몸에 걸친 게 전부 명품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강진후 대표님.”
“반갑습니다, 한효린 전무님.”
자리에 앉자, 비서가 커피를 내왔다.
“OTK컴퍼니 대표님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마침 회의가 끝나서요.”
한효린은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망 좋네요. 이 건물 OTK컴퍼니 소유죠?”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그녀는 은성카드 한정구 사장의 딸이자, 한찬영의 사촌여동생이다.
나와 은성차의 악연은 재계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일. 그런데 은성차 쪽 사람이 날 찾아올 줄이야.
단지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녀에게는 별 다른 감정이 없었다. 다만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 좀 궁금하긴 하다.
나 물음에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쪽 때문에 파혼하게 되었는데, 알고 있나요?”
만약 서성SB가 임승용에게 넘어갔다면, 그녀는 그와 결혼했을 것이다. 혼인만큼 확실한 결합은 없으니까.
하지만 임승용은 서성SB를 손에 넣기는커녕 가지고 있던 서성중공업과 서성엔지니어링마저 빼앗겼다.
정략결혼을 추진할 만한 이유가 없어진 만큼, 혼담은 자연스럽게 파기된 모양이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정략결혼이라니.
이런 걸 보면 진짜 우리나라 재벌들만 중세시대에 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요?”
한효린은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요. 그 사람 별로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난 장례식장에서 본 임승용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당사자가 들었으면 서운해 했겠네요.”
딱히 잘생긴 건 아니지만, 흠잡을 데가 있는 얼굴도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딱 재벌 3세처럼 생겼다랄까?
“임진용 회장님께 찍힌 이상 어차피 이 바닥에서 얼굴 볼 일도 없을 텐데요.”
말하는 걸 보니, 성격이 보통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 한국대 동기인 건 알아요?”
그 말에 난 속으로 놀랐다.
나랑 비슷한 나이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같은 학교 같은 학번일 줄이야.
“경영학과라고 들었는데. 전 현대미술학과에요.”
“그러고 보니…….”
나 입학했을 때 은성카드 사장 딸이 입학했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바로 기억 못한 건 우리 학교에 재벌가 자녀들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대체 재벌가에는 내 동문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학교에서 한 번 쯤은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요.”
참고로 경영대와 미대 건물은 한참 떨어져 있다.
뭐, 정문에서 오가는 길에 잠깐 스쳤을 수는 있겠지만…….
“제가 학교를 1년 반 밖에 안 다녀서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하네요. 대학도 졸업하지 않고, 이런 거대한 회사를 세우다니.”
그렇게까지 신기한 일은 아니다.
“빌 게이츠는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를 차렸죠. 페이스노트 창업자 마이크 골든버그 역시 하버드대 중퇴고.”
“거긴 미국이잖아요.”
맞는 말이다.
대학 중퇴하고 성공하는 건 미국에서나 가능하지 한국에서는 턱도 없는 일이다. 저 둘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공무원 시험이나 대기업 취업 준비했겠지.
한효린은 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잘 마셨어요. 바쁠 텐데, 이만 일어나야겠네요.”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나가기 전에 한마디 했다.
“아! 혹시 카드 하나 안 만들래요? 얼마 전, VVIP 전용카드가 새로 나왔어요. 연회비 300만 원인데, 특별히 좀 깎아줄게요.”
난 고개를 저었다.
“은성카드가 은성차그룹에서 분리되면, 한 번 생각해보죠.”
한효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명함 놓고 갈 테니까, 나중에 생각 바뀌면 연락해요. 혼자 술 마시기 심심할 때 연락해도 괜찮구요. 어차피 동기인데 다음에 만나면 편하게 말 놓을게요.”
그녀는 자신의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갔다.
난 그 명함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지금쯤 내 동기들도 취업준비 하느라 정신없을 텐데.”
남들 신입사원으로 입사할 때 벌써부터 전무라니.
역시 재벌들은 출발선부터 다르구나.
* * *
휴일이라 간만에 늘어지게 잤다.
거의 점심때가 다 되서 일어난 나는 1층으로 내려갔다. 어차피 요리를 거의 안 해먹는지라 주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난 커피를 한 잔 뽑아서 거실로 나갔다.
택규는 거실 소파에 뻗어서 자고 있었다.
“…….”
이 자식은 자기 방 놔두고 왜 맨날 여기서 자는 거야?
테이블 위에는 먹다 남긴 치킨과 맥주가 널려 있었다. 어젯밤에 같이 먹다가 내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었지.
난 TV를 켜고 CNN 채널로 돌렸다. 마침 정치 관련 뉴스가 한창이었다. 커다란 화면 가득 잔뜩 찌푸린 로날드의 얼굴이 보였다.
다른 사진도 많을 텐데, 꼭 저 사진을 가져다 쓰는 이유가 있나?
“오늘도 CNN은 열심히 로날드를 씹는 모양이네.”
난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느긋하게 뉴스를 보았다.
전 세계인들의 걱정과 우려 속에 출범한 로날드 행정부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로날드는 후보시절 온갖 말도 안 되는 공약들을 남발했다. 이민을 막겠다, 보호무역을 하겠다, 멕시코에 장벽을 세우겠다, 의료보험개혁안을 폐기하겠다 등등.
한국이든 외국이든 정치인은 당선되고 나면, 공약을 어느 정도 쌩까고 말을 바꾸기 마련. 그런데 놀랍게도 로날드는 자신의 공약을 다 지킬 기세였다.
TPP를 폐기한 걸 시작으로, 반이민 행정명령을 서명하고, 전임정부가 만든 의료보험개혁안을 폐기한 다음 새로운 개혁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반이민 행정명령은 대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고, 로날드가 내놓은 의료보험개혁안은 하원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국회에서는 민주당이 장악한 상하원과 싸우고, 기자회견장에서는 언론과 싸우고, 나라 밖에서는 무역과 각종 협정탈퇴 때문에 싸우고…….
로날드가 대통령이 된 뒤로 미국 정치권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정치 상황과는 별개로 미국 경제는 완만하게 상승 중이다. 작년에 3퍼센트 경제성장률을 달성했고,올 1분기 역시 무난하게 3퍼센트 달성이 가능할 걸로 예측되었다.
중국이나 신흥국들이 워낙 고성장을 하다 보니, 3퍼센트가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 정도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가 3퍼센트씩 꾸준히 성장하는 건 실로 엄청난 일이다.
미국은 전 세계 GDP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때문에 미국의 성장이 곧 세계의 성장이다.
비유를 하자면, 1억 가진 사람이 10퍼센트 수익을 올려봐야 1천만 원이다. 하지만 100억 가진 사람이 3퍼센트 수익을 올리면 3억이다.
경기회복세에 힘입어 다우, 나스닥, S&P 미국 3대 지수가 연일 사상최고가를 경신했다.
로날드는 이게 다 자기가 대통령이 된 덕분이라고 자화자찬했지만, 전임정부가 잘한 덕분이지 그와는 별 관계가 없었다.
뭐, 법인세 감세안에 대한 기대감이 없는 건 아니다만.
어쨌거나 중국 성장이 점차 둔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경제가 본격적인 성장세에 들어섰다는 것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TV를 보며 어제 먹다 남은 치킨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임진용 회장이다.
“여보세요.”
임진용 회장은 친근하게 말했다.
[주말인데 뭐하고 계십니까, 후배님?]“아, 집에서 쉬고 있어요.”
[시간 괜찮으면 같이 야구 보러 가는 게 어떤가요? 오늘 서성드래곤즈와 CL기간트의 시범경기가 있는데.]“그래요?”
지금 서성그룹 회장이 나랑 야구 보러 가자고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