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145)
헨리가 현주 누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을 줄이야!
생각해보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현주 누나도 엘리 못지않게 충분히 매력적이니까.
그런데 왜 난 당연히 엘리라고 생각했던 거지?
설마 백인이니 당연 백인을 좋아할 거라는(엘리는 혼혈이지만) 인종적 편견이 작용했던 건가?
“혹시 한국어를 필사적으로 익힌 것도 현주 누나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덕분에 헨리의 한국어 실력은 비약적으로 늘었다. 애초에 몇 개 국어를 할 정도로 언어에 소질이 있기도 하고.
이런 게 사랑의 힘이라니 놀랍구나.
“나이 차이가 좀 날 텐데.”
헨리는 나보다 세 살이 많다. 그러니까 현주 누나와는 일곱 살 차이가 나는 셈이다.
내 말에 헨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죠.”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마음이 중요한 거지. 요즘 같은 시대에 일곱 살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난 헨리와 현주 누나가 같이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의외로 굉장히 잘 어울린다.
골든게이트 CEO 손자와 골드게이트 한국지사장. 만약 둘이 잘 되면, 금융계에 세기의 커플이 탄생하게 되는 건가?
어쨌거나 엘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헨리가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예?”
순간 ‘제가 왜요?’라고 물을 뻔했다.
“제가 부탁드릴 수 있는 사람은 진후밖에 없습니다.”
“…….”
하긴,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누구에게 부탁하겠는가?
모른 척하기에는 헨리의 표정이 너무 간절했다.
문득 손자를 잘 부탁한다는 제임스 C. 골드맨의 부탁이 떠올랐다. 그 할아버지도 손주며느리 볼 나이가 되셨지.
그런데 도와달라고 해도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 거야?
마침 전화가 울렸다.
“잠깐만요.”
[왜 연락이 없어? 맞고 있는 중이야? 경찰에 신고해줄까?]“됐으니까, 좀 와봐.”
택규가 순식간에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내 옆에 앉아 경고하듯 말했다.
“친구를 대신해서 말하는데, 좋은 말로 할 때 엘리에게 손 떼세요.”
“……그거 아니야.”
이 자식은 앉자마자 뭔 헛소리야?
내가 상황을 설명하려 하자 헨리는 당황했다.
난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괜찮아요. 이 친구가 비밀은 잘 지키거든요. 그리고 기왕 도움을 청하려면 저보다는 친동생이 낫지 않겠어요?”
내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헨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택규에게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 우리 누나를 좋아한다고?”
“조용히 좀 해.”
동네방네 광고할 일 있냐?
그러자 이번에는 지나치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금발 미녀들이 줄줄이 따를 텐데, 왜 하필 우리 누나야?”
헨리는 외모, 학력, 집안 등 어느 모로 보나 1등 신랑감이다. 할리우드 여배우나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과 염문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회사 내에서도 헨리를 좋아하는 여직원들이 한둘이 아니다. 인기투표하면 당당하게 1등을 차지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너도 우리 누나 좋아했잖아.”
“…….”
지금 그 얘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대체 중학생 때 일을 왜 끄집어내는 거냐?
헨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겠죠.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난 화제를 돌렸다.
“현주 누나가 좋아하는 게 뭐지?”
“일이지.”
“그래. 그게 문제네.”
워커홀릭도 병이라면, 현주 누나는 중증이다.
헨리가 물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신 겁니까?”
“골든게이트 들어간 뒤부터요. 우리 누나가 대학생 때는 남자도 잘 만나고 다녔어요.”
그 말대로 현주 누나가 연애를 끊게 된 건 전부 골든게이트 탓이다. 잠잘 시간도 없는데, 연애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헨리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사귀고 있다면 얘기가 편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일이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택규는 자신 있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 테니 저만 믿으세요.”
그 말에 헨리는 반색했다.
“정말입니까?”
“예. 제가 또 연애는 빠삭하니까요.”
“감사합니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정작 본인은 모태솔로에 연애를 게임으로 배웠다는 얘기는 안 해줘도 될 것 같다.
난 잔을 채워주었다.
“일단 오늘은 술이나 마시죠.”
헨리는 평소 자기 절제가 강해 절대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꼭꼭 숨겨놨던 속마음을 털어놓은 탓인지 잔을 채우기가 무서울 정도로 빨리 마셨다.
“천천히 마셔요.”
“전 괜찮습니다.”
“…….”
우리가 안 괜찮아서 그래.
그러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현주 누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영어로 표현 가능한 온갖 미사여구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이러다가 애너벨 리라도 읊을 기세다.
어찌나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는지, 듣다 못한 택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누나 외모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으음.”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는데 어쩌겠어?
혼자 울고 웃으며 떠들던 헨리는 결국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우리는 완전히 뻗은 헨리를 부축해 호텔방까지 데려다줬다. 취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사랑이 뭐기에.
* * *
저축은행 사태 후폭풍은 계속 이어졌다.
문을 닫은 저축은행이 투자하던 사업들은 올스톱되었다. 그중에는 굵직굵직한 프로젝트 파이낸싱과 재개발 사업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저축은행 부실로 건설경기까지 악화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론에 따라 정치권도 술렁였다.
사위일가가 비리를 저질렀다고 해서 그게 대통령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작년에 4개월에 걸쳐 실시한 저축은행 정밀감사와 현장실사에도 불구하고 분식회계를 눈치채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박시형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금감원장, 감사원장, 예금보험공사장 등이 줄줄이 잘려나갔다. 정부에서는 조직이 정비되는 대로 은행, 저축은행, 증권사, 보험회사 등에 대해 합동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겠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박시형은 그동안 공천권을 무기로 한국가당을 장악해왔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친박계가 힘을 잃으며 당내에서 당권경쟁이 본격화했다. 당연히 당청 간의 연결고리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시형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당선됐다.
실제로 재임기간 내내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을 펼치며,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현실이야 어떻든 사람들은 모두가 잘 살 수 있게 해준다는 대통령의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그 믿음이 깨진 것이다.
괜찮다는 정부의 말을 믿고 예금하고, 아무 문제없다는 대통령의 말만 믿고 기다렸는데, 그 결과가 어땠는가?
한 사람 당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씩 피해를 입었다. 1조가 넘는 서민들 돈이 날아갔지만, 배상받을 길은 막막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제일 먼저 탈출했고, 구속된 경영진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으로만 일관했다.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분노한 피해자들은 한국가당 당사와 국회, 그리고 광화문에서 연일 시위를 벌이며 대책을 촉구했다.
그러자 부모님연합 등의 보수단체에서는 보란 듯이 맞불시위를 벌이며 ‘누가 저축은행 이용하라고 했냐?’, ‘금리 더 준다고 저축은행 이용한 게 잘못이다’, ‘왜 정부에게 돈 달라고 징징 대냐?’,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라고 소리쳤다.
* * *
중국집에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TV를 보던 택규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부모님연합은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야? 누가 일당이라도 주나?”
“2만 원씩 준다는 얘기가 있던데.”
“돈이 어디서 나서? 시위한다고 돈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
일당을 주지 않더라도 시위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박시형 집권 이후 부모님연합은 마르지 않는 자금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전국을 돌아다니며 시위를 벌였다.
자기들 말로는 노인들이 폐지 팔아 한푼 두푼 모은 돈을 기부 받아서 운영한다는데, 그런 것 치고는 시위 때마다 전세버스를 대절하고 도시락까지 지급해주며 질서정연하고 기동성 있게 움직이고 있다.
당연히 어디선가 자금을 지원해주고 있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상엽 선배가 한마디 했다
“더 이상 회사 앞에서 안 보여서 다행이네. 볼 때마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는데.”
“그거 하나는 다행인데…….”
그래도 피해자들 앞에서 저러고 있는 꼴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막상 자기 돈 날아갔으면, 제일 먼저 눈이 뒤집어지지 않았을까?
“박시형이 가만히 있을까?”
“아마 이를 갈고 있겠죠.”
지금이야 사태수습에 정신이 없겠지만, 나중에 또 뭔 수작을 부릴지 모르지.
음식이 도착할 때에 맞춰 난 헨리를 CEO실로 불렀다. 술병이 났는지 얼굴이 핼쑥했고,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았다.
“속은 좀 어때요?”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직 울렁거리는 모양이다. 심지어는 오늘 지각도 했지.
헨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어제 실수한 건 없습니까?”
어제 어떤 추태를 보였는지 말해주면, 당분간은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것 같아서 별 일 없었다고 말해주었다.
헨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그렇게 마신 건 처음이라서요.”
사랑 참 어렵지.
택규는 짬뽕 그릇을 내밀었다.
“삼선짬뽕 시켰으니, 이거 먹고 해장해요.”
미국인도 짬뽕으로 해장이 되려나? 매워서 오히려 속병 나는 거 아니야?
비닐을 뜯는데, 뉴스는 이번에 호성저축은행 본점을 비췄다. 문 닫힌 본점 앞에는 여전히 피해자들이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택규는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 배상받을 방법은 전혀 없나?”
“아마도.”
박시형은 대책을 세우라며 국회로 공을 떠넘겼다. 한국가당을 중심으로 특별법을 만들어 구제해주자는 얘기가 나왔지만, 형평성 문제 때문에 불가능했다.
“아예 이번 기회에 예금자보호 한도를 1억까지 올리자는 얘기도 나왔는데, 별로 가능성 없는 얘기야. 설사 된다 하더라도 어차피 소급적용은 안 되고.”
상엽 선배가 말했다.
“후순위채권의 경우 불완전판매인 만큼 소송하면 승소할 수 있을걸. 그런데 돈을 물어줄 주체가 파산해버린 게 문제지.”
이래저래 답이 없다.
몇몇 직원들은 피해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눈물로 사죄했다. 난 직원 한 명이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는 얘기를 떠올렸다. 이런데도 정작 윗대가리들은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으니.
“기부라도 좀 하는 게 어떨까? 라스트 판타지M 흥행 덕분에 여유가 좀 있잖아.”
택규의 말에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통령이고 국회의원이고 지들 돈 귀한 줄만 알지, 남의 돈 귀한 줄 모른다. 우리가 먼저 나서서 기부에 나서면 자기들도 돈을 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만약 안 내고 버틴다면, 그건 그거대로 욕먹게 될 테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 * *
[OTK컴퍼니, 저축은행 피해자들을 위해 100억 기부!](전략) OTK컴퍼니 정기홍 홍보팀장은 비록 적은 돈이지만,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기부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한다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치권이 한 마음으로 나서서 기부에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기사가 나가자, 여론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오오! 갓타쿠!
-국회의원들 뭐하냐?
-한 마음 한 뜻으로 지갑 좀 열어라.
-불법출금한 돈부터 반납해라 개객끼들아.
-각하 얼마 내실지 개궁금.
여론이 빗발치자 한국가당은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당 차원에서 무기명으로 모금하고, 총액만 공개하겠다고 해서 또 다시 빈축을 샀다.
청와대 역시 모금에 나섰고, 박시형 대통령은 3천만 원을 기부금으로 내놓았다.
-ㅋㅋㅋ3천만 원. 장난 하냐?
-각하 스케일에 진심 지렸다!
-사돈댁이 3조를 넘게 해먹었는데, 3천억도 아니고 3천만 원이라니!
-작년 공직자 재산공개에서 각하 재산 109억으로 등록됐습니다.
-뭐가 그렇게 많아?
-정치하기 전에 기업인이었잖아. 은성중공업 사장까지 하다 나왔는데.
-진짜 양심도 없다.
-기부하기 싫으면 싫다고 그냥 말씀하세요. 괜히 돈 쓰고 욕먹지 말고.
-너무 그러지 마세요. 각하 성격상 저 3천만 원도 아까워서 피눈물을 흘리셨을 겁니다.
-아마 먼저 기부한 강진후부터 죽이고 싶었을 거임.
-누가 경제 대통령 아닐까봐 정말 꼼꼼하시네요.
-요즘 PAS 장사도 잘 되는 것 같던데, 인간적으로 3천은 좀…….
-그래서 PAS는 누구 겁니까?
?청와대 게시판에까지 비난이 폭주했다.
박시형 대통령은 부랴부랴 2천만 원을 더해 총 5천만 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혔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그 여파 때문인지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3퍼센트 추가 하락해 24퍼센트까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