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322)
화보촬영은 GJ미디어 소유의 상암동 스튜디오에서 이뤄졌다.
촬영을 맡은 사진작가는 패션계에서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 포토그래퍼 장은호. 메이크업과 의상 팀은 베스터 본사에서 파견했다.
엘리가 혼자 촬영장소에 도착해 대기실로 들어가자,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헤어디자이너가 달라붙어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연신 감탄하며 칭찬했다.
“어쩜. 정말 너무 예쁘세요. 피부도 깨끗해서 기초화장만 하고, 립스틱과 아이쉐도우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할 건 다 했다. 메이크업이 끝나자 엘리는 의상 스탭들의 도움을 받아 화장과 머리가 상하지 않도록 래쉬가드로 갈아입었다.
긴 과정을 끝마친 뒤 드디어 카메라 앞에 섰다.
“촬영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자연스러운 표정 지어보세요.”
오랫동안 사진을 찍다 보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모델로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한 장만 찍어 봐도 알 수 있다.
역시나 셔터를 누르는 순간 느낌이 왔다.
장은호는 연신 셔터를 누르며 작은 목소리로 본사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 여자 정말로 모델이 아니라 일반인이야?”
“예. 화보촬영도 오늘이 처음이라는데요.”
“대체 어디서 이런 마스크를 어디서 찾은 거야?”
“일 때문에 우연히 만난 거래처 회사 직원이래요. 베스터 황민아 사장님께서 직접 섭외하셨다는데.”
“회사원이라고? 본격적으로 모델 해볼 생각은 없대? 다른 일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듯하자, 본격적으로 컨셉을 바꿔가며 촬영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저를 노려보는 느낌으로!”
“활짝 웃어 봐요. 빅 스마일!”
“오! 방금 표정 좋았어요. 그 표정 그대로 손을 좀 더 위로 뻗어 봐요!”
패션화보의 모델들은 세련되고 우아하다. 그러나 실제 촬영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수백 장을 찍으면, 그중에서 간신히 한두 장 건지는 식이었다.
엘리는 쉴 새 없이 래쉬가드, 레깅스, 티셔츠, 아우터 등을 갈아입고 카메라 앞에 섰고, 그때마다 옷에 맞게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도 조금씩 수정해야 했다.
미리 촬영계약서에 적어놓은 대로 노출은 별로 없었고, 스포츠웨어에 걸맞게 주로 활동적인 포즈를 취했다.
카메라 셔터가 터지는 동안 자세와 표정을 취하는 것이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게다가 피부가 뜨거울 정도로 내리쬐는 조명도 고역이었다.
체력은 웬만큼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몇 시간을 촬영하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몇 끼를 걸렀더니 배도 많이 고프고.
‘모델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구나.’
엘리는 골든게이트의 명예, 그리고 예쁜 사진을 남기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촬영에 임했다.
오전 일찍부터 시작된 촬영은 저녁이 되기 전에 끝이 났다. 완전히는 아니고, 일단 찍은 사진을 확인한 뒤 추가촬영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엘리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대기했다. 식사 대신 미리 준비해놓은 주스를 마시며 진후에게 톡을 보냈다.
* * *
한국재벌들은 주로 제조업과 건설을 통해 성장했다. 그런데 GJ그룹은 특이하게도 유통, 서비스, 미디어로 성장했다.
특히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자랑했다. 거느리고 있는 케이블채널만도 13개고, 자회사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영화, 음악, 공연, 방송 플랫폼을 가지고 있고, 이를 기반으로 매년 아시아에서 대규모 공연과 시상식을 개최한다.
유진욱은 바로 그 GJ미디어의 예능총괄팀장을 맡고 있었다.
이 좁은 땅에 TV에 한 번 나오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예능총괄팀장이라는 지위는 원하는 사람을 출연시켜줄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그 권한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주말임에도 일정이 있어서 스튜디오에 들른 유진욱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긴 뒤, 느긋하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러던 도중 촬영장에 앉아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와우! 저 여자 뭐야?’
이제까지 여자라면 질리도록 만나봤고, 유학시절 외국 여자도 꽤 만나보았다. 현재 만나고 있는 애인들도 한둘이 아니다.
단지 인형처럼 예쁘기만 한 여자라면 연예계와 기획사에 널려 있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뭔가 달랐다.
미모와 함께 강렬한 생기가 풍겼고, 지성과 기품이 느껴졌다. 마치 톱스타나 가질 법한 압도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지시를 내리자 뒤를 따라다니던 정우영 실장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바로 여자에 대해 알아보았다.
“베스터 광고모델입니다. 오늘 화보촬영했다고 합니다.”
“소속사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유진욱은 잘됐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럼 좋은 일자리 소개시켜줘야겠네.”
대형기획사나 에이전시는 소속 연예인들 관리가 철저하다. 나중에 괜히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힘없는 중소기획사나 개인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쉽게 덮을 수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앉아서 쉬고 있는 외국인 모델에게 다가갔다.
“Hello, good to see you.”(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외국인 모델…… 엘리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나이는 30대 초반. 훤칠한 키에 제법 잘생긴 얼굴이다. 헤어스타일은 단정했고, 은테안경을 꼈다. 입고 있는 양복을 비롯해 구두와 시계 모두 명품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Yes. What do you want?”(무슨 일이죠?)
“Do you have a time for talk with me?”(잠깐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옆자리에 앉았다.
엘리는 한국어로 물었다.
“누구시죠?”
유진욱은 반색했다.
“아! 한국어 할 줄 아시네요.”
‘한국어 패치 돼있으면 나야 땡큐지.’
젊은 시절 유학을 다녀왔지만, 사실 그의 영어실력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혹시 전문 패션모델이신가요?”
“아니요. 촬영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신인이시군요. 아! 전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지갑을 꺼내 명함을 내밀었다. 엘리는 그 명함을 받아서 보았다.
거기에는 GJ미디어 예능총괄팀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유진욱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예능총괄팀장님?”
“예. GJ미디어 채널에서 방송하는 모든 예능을 총괄하고 있고, 주로 예능 편성과 출연자를 섭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하는 일 없는 명예직에 가까우나, 드라마 단역이나 게스트 정도는 쉽게 집어넣을 수 있는 위치기도 했다.
“대단하시네요. 젊은 나이에 이런 큰 업무를 맡다니.”
“하하, 사실은 아버지께서 GJ그룹 회장님이십니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이쪽 일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엘리는 머릿속으로 GJ그룹 가계도를 떠올렸다.
‘유병문 회장에게 늦둥이 막내아들이 있다고 하더니, 이 사람인 모양이네.’
“그렇군요. 무슨 일이시죠?”
“지금 예능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외국인을 찾고 있었는데, 그쪽을 섭외하고 싶어서요. 혹시 ‘스트리트 트럭’이라는 프로그램 아시나요?”
“들어봤어요.”
스트리트 트럭은 외국에서 푸드트럭을 타고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외국인들에게 한식을 파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듣기에는 별 거 없어 보이지만,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시즌1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지금은 시즌2 제작을 준비 중이다.
“아실지 모르시겠지만, ‘스트리트 트럭’은 평균 시청률이 15퍼센트가 넘고, 12개국에 수출되는 예능프로그램입니다. 만약 출연하시면 전 국민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을 겁니다.”
스트리트 트럭 시즌2의 제작 일정이 잡힌 것은 맞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주요 출연진을 마음대로 밀어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되든 안 되든 알 바 아니지. 안 되면 그냥 적당한 예능 게스트로 밀어주면 되는 거고.’
“요즘은 모델들의 연예계 진출이 활발합니다. 한국말도 이렇게 잘하시니 데뷔만 하시면 연예인으로 크게 성공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어떠신가요?”
그는 말을 하며 몸을 가까이 붙인 다음, 은근슬쩍 한 손을 허벅지에 슬쩍 올리고 다른 손으로 어깨와 등을 터치했다.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떤 의도로 접근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엘리는 표정을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
“됐으니까, 손 치우시죠. 한 번만 더 제 몸에 손대면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튕기는 것도 매력적이네. 하긴, 순순히 넘어오면 재미없지.’
유진욱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좋네요. 그 정도 성격은 있어야 예능에 잘 적응할 수 있거든요. 시청자들이 모델을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바로 허리라인인데…….”
그러면서 보란 듯이 손으로 엘리의 허리를 감쌌다.
무명 모델이나, 연예인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진 만큼 좋은 싫든 넘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
그 순간, 눈앞에서 뭔가 번쩍하고 지나갔다. 이어서 얼굴에 강렬한 고통이 밀려왔다.
유진욱은 코를 부여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내 코! 코가 부러졌어!”
양쪽 콧구멍에서 코피가 쏟아졌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우영 실장은 재빨리 달려와 지혈을 해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이런 씨발! 이게 지금 괜찮아 보여!? 이 미친년이 날 때렸다고!”
“지, 진정하십시오.”
그가 주먹을 쥐고 여자에게 달려들려는 것을 정우영 실장이 겨우 뜯어말렸다. 소란이 일자 촬영팀과 베스터 본사 사람들, 그리고 경비원들이 달려왔다.
한 대 맞으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지, 유진욱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다.
“감히 나에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엘리는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무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유진욱은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넌 끝장이야! 다시는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일 줄 알아!”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GJ미디어 눈 밖에 나면 끝장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 이 일은 본업은커녕 부업도 아니다.
다시는 발 못 붙여도 앞으로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었다.
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요. 저도 이 바닥에 발붙일 생각 없는데.”
경고가 전혀 먹히지 않자, 유진욱은 더욱 분노했다.
“뭘 보고만 있어, 새끼들아? 당장 경찰에 신고해!”
정우영 실장은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경찰에 신고하면 일이 커지게 될 텐데.’
다들 머뭇거리는 사이 엘리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소리칠 것 없어요. 제가 신고할 테니까.”
엘리는 바로 112에 전화를 걸었다.
“경찰서죠? 방금 성추행을 당해서 신고하려구요.”
* * *
신고한지 15분 만에 경찰이 도착했다.
유진욱은 부은 코를 부여잡은 채 계속 소리를 질렀고, 정우영이 대신 상황을 설명했다. 가장 먼저 유진욱이 GJ그룹 유병문 회장의 아들이라는 점을 알렸다. 그러자 경찰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저 여자가 날 때렸다니까! 뭐해? 경찰이 범죄자 안 잡고!”
한쪽은 여자모델이고, 한쪽은 재벌가 자제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는 생각해볼 필요조차 없었다.
경찰들은 엘리에게 다가가 말했다.
“폭행 피의자로 체포하겠습니다.”
예전이었다면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에서 지낸 지도 몇 년 되다보니 이제는 이런 상황이 별로 놀랍지도 않다.
엘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신고자인데요.”
“폭행 사실을 부인하시는 겁니까?”
“성추행에 대한 정당방위였어요.”
유진욱은 다시 소리쳤다.
“뭔 성추행이야? 그냥 다가가서 말만 걸었을 뿐인데.”
엘리는 천장에 있는 CCTV를 가리켰다.
“저기 CCTV가 있네요. 영상만 확인해 봐도 금방 나올 텐데.”
정우영 실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CCTV는 지금 점검 중이라 화면이 녹화가 안 되고 있었습니다.”
‘빨리 보안팀에 연락해서 영상 삭제하라고 지시해야겠군.’
경찰이 말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서에 가서 하시죠.”
“그건 상관없는데, 어째서 저만 체포하는 건가요? 하려면 저 사람도 같이 해야 하지 않나요?”
“추행이 있었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잘못하면 무고죄까지 추가될 수 있어요.”
“이상하네요. 피해자가 고소를 한다는데, 무고죄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뭐죠? 공정하게 조사해야 할 경찰이 이래도 되는 건가요?”
“저쪽 분은 피해도 확실하고, 증인도 있지 않습니까?”
“그 증인이 부하직원이잖아요.”
“자꾸 이러시면 수갑을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경찰이 물었다.
“외국인이죠? 신분확인하게 외국인등록증 좀 보여주세요.”
엘리는 외국인등록증과 명함을 꺼내서 내밀었다. 그것을 본 경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벼, 변호사시네요. 골든게이트 한국지사에서 일하시는.”
유진욱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이 여자가 변호사라고?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는 경찰 손에 들린 명함을 빼앗아 들었다. 거기에는 정말로 골든게이트 법무1팀장이라는 직함이라는 적혀 있었다.
“이, 이게 진짜일 리가…….”
이런 얼굴로 골든게이트 변호사를 하고 있다고? 누가 봐도 모델 같이 생겼는데. 이게 말이 되나?
“못 믿겠으면, 회사에 전화해보세요.”
수갑을 꺼내들던 경찰은 멈칫했다. 그냥 외국인 모델이라면 부담 없이 체포해도 되지만, 직업이 골든게이트 변호사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엘리는 경찰에게 말했다.
“그런데 한국 경찰은 체포할 때 미란다원칙 고지 안 하나요?”
“아, 그게 그러니까…… 묵비권을 행사하실 수 있고…….”
“무슨 내용인지 아니까, 들은 걸로 할게요. 그보다 저 남자를 성추행으로 고소할 테니까, 현행범으로 체포하세요. 설마 저만 체포하는 건 아니겠죠?”
경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유진욱에게 말했다.
“같이 서로 동행하셔야할 것 같습니다.”
“뭐? 때린 건 저 년인데 내가 왜 경찰서를 가?”
“어차피 피해자 진술도 하셔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새꺄?”
엘리는 경찰에게 말했다.
“잠깐 전화 좀 해도 되죠? 상황을 좀 알려야 할 것 같아서요.”
“누구한테 말입니까?”
엘리는 부러진 코를 부여잡은 채 길길이 날뛰는 유진욱을 보며 말했다.
“남자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