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76)
우리는 호텔 방에서 영상통화를 했다.
잔뜩 화난 표정의 현주 누나 뒤에서 엘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비록 영상이지만, 얼굴을 보니 반갑다.
“로날드를 지지하겠다고? 제정신이야?
택규는 당황하며 현주 누나를 달랬다.
“누, 누나. 일단 진정해.
누나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우리가 얘기했기 때문…… 이 아니라, 언론에 기사가 떴기 때문이다.
난 테이블 옆에 놓인 뉴욕타임즈를 보았다.
[로날드 스탬퍼, OTK컴퍼니와 비밀 접촉]공화당 대선 후보 로날드 스탬퍼는 LA에서 유세를 마친 후, 본인 소유의 호텔에서 OTK컴퍼니 측과 비밀리에 접촉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예정된 일정까지 미뤄가며 한 시간 이상 대화를 나눴다. 이때 수천만 달러의 후원금 얘기가 오고 갔다고 전해진다.
OTK컴퍼니는 벤처캐피탈, 외환시장과 파생상품에 투자를 가리지 않는 전문투자회사로 알려져 있다. 최근 있었던 브렉시트 사태 때 파운드를 매도해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여 벌쳐펀드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로날드는 평소 월스트리트 금융인들이 다이앤의 선거캠프를 후원하고 있다며 비난해왔다. 그런데 본인이 정작 OTK컴퍼니로부터 거액의 후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며 여론의 질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로날드 선거캠프 측에 확인을 요청했지만…….
우리가 로날드를 만난 게 이 정도로 이슈가 될 줄은 몰랐다.
주류언론들은 대부분 다이앤의 편이었다. 그 때문인지 마치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부정적인 논조로 보도했다.
로날드 측에서는 해명 대신 일부러 의혹을 키우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언론의 비난을 극적인 반전 장치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광고비 한 푼 안 쓰고 언론을 이용해 먹다니. 역시 비즈니스맨답다고 해야 하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로날드를 만난 거야? 지금 미국 대선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나 있어?”
현주 누나의 말에 택규는 보란 듯이 트럼프를 꺼내들었다.
“대선을 포커판에 비유하면…….”
“트럼프를 왜 꺼내? 그거 안 집어넣어?”
“넵!”
택규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왜 나한테 그래? 진후가 결정한 일인데.”
역시 이 자식은 누나한테는 꼼짝을 못하는구나.
현주 누나는 화면 밖으로 손을 뻗더니 이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엘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을 붙여주었다.
“후우.”
현주 누나는 긴 숨을 내쉬었다. 담배연기가 화면을 뚫고 여기까지 퍼지는 듯했다.
“카로스를 만나서 자동차산업에 투자하겠다더니, 왜 갑자기 남의 나라 대선에 끼어든 거야?”
난 화면을 향해 말했다.
“미국이 그만큼 중요한 시장이니까요. 로날드가 당선되면, 미국 내에 생산거점을 두고 있는 자동차회사들이 유리해지고, 다른 지역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회사들은 불리해질 거예요.”
예를 들어 은성차라던지.
은성차는 조지아에 공장을 운영한다.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멕시코에 세 곳의 공장을 운영하고, 현재 한 곳을 추가로 짓는 중이다.
만약 로날드가 대통령이 되면 대미 수출량이 많은 은성차는 직격탄을 맞게 될 것이다.
반면 우리는 차기정부의 온갖 혜택과 지원을 받으며 미국시장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산한 자동차가 시장성이 있냐는 다른 문제겠지만.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건 로날드가 대통령이 됐을 때 얘기지.”
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로날드가 대통령이 될 거예요.”
엘리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돼요.”
“제가 언제 없는 소리 한적 있어요?”
“그건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자신하는 이유는 예지를 봤기 때문이다.
만약 예지가 뜨지 않았다면, 나 역시 로날드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현주 누나는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꾹꾹 눌렀다.
“대체 어떻게 로날드가 대통령이 된다는 거야? 지금 지지율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득표를 많이 한다고 해서 대통령이 되는 건 아니죠.”
우리가 미국대선이라고 부르는 선거는 엄밀히 말해 대통령을 뽑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사는 주의 선거인단을 뽑는 선거다.
그렇게 뽑힌 주별 선거인단이 다시 모여서 투표해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선출한다.
여기서 재밌는 점 중 하나는 득표율과 상관없이 이긴 쪽이 각 주의 선거인단을 전부 가져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총 득표수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하느냐다. 득표수가 아무리 높게 나와도 선거인단수에서 밀리면 결과적으로는 패하게 된다.
실제로 표는 적게 받아도 다수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당선된 사례는 과거에도 몇 차례 있었다.
“다이앤은 현재 350명의 선거인단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어.”
선거인단의 수는 총 538명.
대통령이 되려면 이중 270명을 확보해야 한다.
“대체 무슨 수로 로날드가 저기서 80명을 빼온다는 거야?”
주에 따라 민주당이 강세인 지역이 있고, 공화당이 강세인 지역이 있다. 그 주의 선거인단은 어차피 각 후보가 이미 확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1퍼센트 차이로 지나 90퍼센트 차이로 지나, 결과는 똑같기 때문에 이런 곳은 아예 포기해도 상관없다.
대신 접전주를 하나라도 더 손에 넣기 위해 계속 유세를 펼치는 중이다.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승리가 정해질 것이다.
“러스트벨트가 로날드에게 넘어갈 거예요.”
“뭐?”
현주 누나와 엘리는 동시에 깜짝 놀랐다.
난 로날드와 한 시간 동안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말해주었다.
* * *
미국의 오대호 주변 인근에는 거대한 공업단지가 이어져 있다.
위스콘신, 일리노이, 인디아나, 미시건,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뉴욕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이 지역은 이제 녹슨 지대(Rust Belt)라는 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과거 미국은 세계 최고의 제조업 국가였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을 제치고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대량생산체제를 만들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압도적인 공업 생산량으로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리며, 아시아에서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일본은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포함한 공산품을 미국에 수출했고, 이후에는 한국이, 그 다음에는 중국마저 수출대열에 가세했다.
무역규제가 차례대로 철폐되며, 20세기 말부터 미국 제조업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동차산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융위기를 겪으며 미국 자동차회사들은 줄줄이 파산했다. 이후 구제금융 덕분에 간신히 부활에 성공하긴 했지만, 공장폐쇄와 감원이 잇따랐다.
캐빈 루이스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자동차 공장의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그러나 그가 다니던 공장은 재작년에 멕시코로 이전했다. 그곳의 인건비가 더 싸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날 캐빈을 포함해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들은 전부 일자리를 잃었고, 정부에서 주는 실업급여를 타먹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꿈은 소박했다.
크게 성공은 못하더라도 가정에서만큼은 훌륭한 남편, 자랑스러운 아버지이고 싶었다. 그러나 실직은 그러한 꿈마저 빼앗아갔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를 것이다. 평일에도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으면 쓸모없는 존재라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멍하니 TV를 보는 것밖에는 없었다. 가끔은 실직한 친구들과 펍에서 만나 맥주를 마시며 좋았던 시절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는 컨베이어 벨트가 쉼 없이 돌아갔고, 밀려드는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정신없이 일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차도 사고, 집도 사고, 결혼도 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들이 태어났고, 가족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상점은 문을 닫았고,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났고, 집은 내놔도 팔리지 않았다.
빈집 정원에는 ‘For Sale’ 이라고 적힌 팻말이 붙어있을 뿐이다.
민주당 집권 8년 동안 제대로 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금융위기 이후 삶은 계속 어려졌지만, 언론에서는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은 매일 같이 돈 잔치를 벌였고, 실리콘밸리에서는 IT인력을 못 구해서 안달이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가?
자신은 실직자가 되었고, 도시는 죽어가고 있는데.
다시 선거철이 돌아왔고, 민주당의 후보 다이앤은 여전히 똑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공화당 후보 로날드만은 달랐다.
그는 다른 정치인들과는 달리 미국의 현실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했다.
노동자 계층이 많은 디트로이트는 오래 전부터 민주당의 텃밭이었다. 캐빈 역시 성인이 된 이후부터 단 한 번도 민주당 외에 다른 후보를 찍은 적이 없었다.
로날드가 미국 제조업을 살려야 한다고 외치며 러스트벨트에 유세를 다니는 동안, 다이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민주당은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왜 민주당을 찍어야 하는가?
이 도시에는 변화가 필요했다.
그날 캐빈은 집 마당에 로날드의 이름이 새겨진 팻말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지역 공화당원으로 가입했다.
캐빈은 로날드에게 표를 줘야한다며, 주변 친구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대부분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로날드야말로 부패한 기업가잖아.”
“다이앤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지만, 로날드는 더 문제야.”
“로날드가 대통령이 된다고 달라질 게 뭔데?”
그러던 도중 로날드가 또다시 디트로이트에 유세를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유세 장소인 풋볼 경기장에는 공화당원만이 아니라 선거권을 가진 미국 시민이라면 누구든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러자 디트로이트 시민뿐 아니라 인근 도시와 시골에서까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4만 석이 넘는 관중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찼다. 민주당 우세지역답게 반대 지지자들도 꽤 모였다.
언론취재 열기 역시 뜨거웠다. 곳곳에 카메라가 돌아가며 현장분위기를 생중계했다.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드디어 로날드 스탬퍼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
“우우우!”
함성과 야유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로날드는 이런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경기장 한가운데에 마련된 단상에 선 로날드는 마이크를 붙잡고 연설을 시작했다.
“이곳에 훌륭한 미국시민들이 많이 와계시는군요. 와우! 그리고 저쪽에는 다이앤이 보내서 온 사람들도 보입니다. 이곳에 와서 피켓을 들고 있으면 돈을 준다고 하던가요? 하긴 민주당은 선거자금이 많지요. 왜냐하면 그녀가 부패한 기업가와 금융인들과 놀아나고 있으니까요.”
누가 로날드 스탬퍼 아니랄까봐 시작부터 막말이다.
“우우우우!”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졌지만, 로날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과거 디트로이트는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었습니다. 미국 3대 자동차회사인 GM, 포드, 크라이슬러의 공장이 밀집해 있는 자동차산업의 메카였고, 한때는 모터시티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들은 지금 다 어디 갔습니까?사람들이 자동차를 안 타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겁니까? 다들 마차를 타나요? 아니면, 원시인들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니나요?”
그는 허리를 숙인 채 마이크를 돌도끼처럼 휘두르며 원시인 흉내를 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날드는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전 그 이유를 압니다.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우리의 자동차산업은 한국과 일본에 의해 완전히 강간당했습니다! 은성과 토요타는 매년 수백만 대씩 미국시장에 팔아치우며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국 자동차를 사주지 않는데, 왜 우리가 그 나라 차를 사줘야 합니까?”
그의 말에 지지자들 사이에서 분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로날드! 로날드!”
캐빈 역시 목이 터져라 로날드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반대 지지자들 역시 소리쳤다.
“다이앤! 다이앤!”
“부패한 졸부는 꺼져라!”
“디트로이트는 민주당을 지지한다!”
평소였다면 당장 유세장 밖으로 쫓아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을 더욱 빛내줄 조연이었다.
“민주당이 대체 8년 동안 한 게 뭡니까? 그들은 미국을 완전히 망쳤습니다. 그런데 다이앤은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과 사이좋게 악수하며 미국의 미래를 얘기합니다. 그녀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앞줄에서 다이앤의 피켓을 든 중년여성이 소리쳤다.
“당신도 금융인과 놀아났잖아!”
로날드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말을 하도록 일부러 유도했다고 봐도 좋았다.
“여기 계신 여성분께서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입니다. 저분한테 마이크를 주세요.”
스태프가 마이크를 건네주었고, 카메라가 여성의 얼굴을 비췄다.
중년여성은 로날드를 향해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얼마 전, 당신은 OTK컴퍼니를 만났고 수천만 달러를 받았지.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거짓말쟁이라고!”
로날드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저는 OTK컴퍼니 CEO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제발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취재진들은 깜짝 놀랐다.
그동안 로날드는 언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대답을 회피해왔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시인한 것이다.
다이앤 지지자들은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다.
“우우우!”
“꺼져라, 로날드!”
로날드는 두 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하며,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라는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한참동안 이어지던 야유가 조금 가라앉자 로날드는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제가 선거자금을 받기로 했다구요? 언론은 전부 사기꾼들입니다. 그들의 말을 믿지 마세요. 제가 받은 건 선거자금이 아닌 그저 한 가지 약속입니다.”
이제 폭탄을 떨어뜨릴 순간이다.
로날드는 유세장을 둘러보며 더욱 과장된 제스처로, 그리고 더욱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 OTK컴퍼니에게 200억 달러를 미국 자동차산업에 투자하겠다는 확답을 받아냈습니다! 디트로이트에 멈춰있던 공장을 다시 돌리겠습니다! 실업자들을 고용하고, 불법이민자들이 아닌 미국 시민을 고용하겠습니다! 문을 닫은 상점과 음식점을 열고, 도시를 살리겠습니다! 민주당이 이곳을 쇠락한 공업도시로 만들었다면, 제가 빛의 도시로 바꾸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