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80)
호텔방에는 팩스와 컴퓨터, 프린터기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다 같이 모여앉아 밀려드는 서류를 처리했다.
협상을 주도한 현주 누나가 모든 서류를 꼼꼼하게 살펴보았고, 엘리는 법적 문제가 없는지 일일이 체크했다.
난 최종결정자로서 검토를 마치고 올라온 서류를 읽어본 다음 승인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우리가 다 하는 것은 아니다. 카로스의 본사 이전에 대해서는 골든게이트 본사의 컨설팅을 받기로 했고, FCA그룹과의 협상은 골든게이트 M&A 전문 인력이 이탈리아로 날아가 실무진과 접촉했
다.
그리고 남에게 맡길 수 있을 만한 자잘한 일에는 K컴퍼니가 동원되었다.
난 오랜만에 상엽 선배와 통화했다.
상엽 선배는 반가워하며 말했다.
[너희 소식은 로날드 SNS 통해서 듣고 있어.]“······.”
로날드는 다이앤과는 달리 선거에 SNS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어찌나 OTK컴퍼니를 언급해 대는지 검색창에 로날드를 치면 자동적으로 OTK컴퍼니가 연관검색어로 뜰 정도다.
우리 좀 작작 팔아먹어라······.
뭐, 그렇게 해서라도 당선이 된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쪽은 좀 어때요?”
[얼마 전, 이사 끝냈어. 한국에는 언제 돌아와?]“마무리 되는 대로 다 같이 들어갈 거예요.”
[얼른 돌아와. 혼자 한국에 있으니 심심하다.]“알았어요. 자세한 얘기는 가서 할게요.”
그나마 우리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편이지만, 현주 누나는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잠 잘 시간도 없어서 15분 간격으로 쪽잠을 자며 일에 매달렸다.
보다 못한 택규가 말했다.
“회사도 아닌데 옷이라도 좀 편하게 입어.”
트레이닝복이나 청바지를 입은 우리와는 달리 현주 누나는 평소처럼 하이웨스트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도 단정하게 묶어서 핀으로 고정시킨 상태였다.
자세 역시 흐트러짐 없이 허리를 꼿꼿하게 새운 채 일했다.
“긴장이 풀려서 안 돼.”
정말이지 자기관리가 철저하다. 보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막상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확인해 봐.”
“예.”
현주 누나가 건네준 협정서 조항을 하나씩 확인하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이잉!
액정에는 모르는 번호가 떠있었다.
설마 다이앤 캠프 쪽은 아니겠지?
내가 받지 않고 머뭇거리자 엘리가 말했다. “왜 안 받아요?”
엘리는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혹시 그 유리인가 뭔가 하는 여자애는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유리면 유리지, 유리인가 뭔가 하는 여자애는 대체 뭐야?
번호를 보니 미국에서 걸려온 것 같은데.
난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강. 제임스입니다.]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골든게이트 CEO인 제임스 C. 골드맨이었다.
나한테 무슨 일로?
“예. 안녕하세요.”
[미국 정계가 OTK컴퍼니 때문에 시끌시끌합니다. 다이앤 쪽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역시 소문이 빠르다.
난 그에게 물었다.
“누가 대통령이 될 거라 생각하세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다이앤이겠지만, 사람들이 항상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요.]다이앤은 이성적이고 차분하다.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고 상대방을 설득한다.
반면 로날드는 감성적이고 저돌적이다. 제대로 된 근거보다는 그냥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오죽하면 로날드가 연설하고 난 직후에는 그의 말의 오류를 지적하는 기사들이 올라오겠는가?
그러나 자신이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논리적인 설득보다 감정을 자극하는 외침이 더 잘 먹히기 마련이다.
설사 사소한 오류가 좀 있다고 한들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만약 OTK컴퍼니가 로날드 진영에 서지 않았다면, 저 역시 다이앤이 승리할 거라고 확신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군요.]“이번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만약 제임스가 아니었다면, 로날드와 접촉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저도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무슨 부탁인가요?”
“예?”
예상치 못한 취업청탁에 난 속으로 당황했다.
“딱히 저한테 배울 건 없을 텐데요.”
투자자란 변호사나 의사처럼 자격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돈만 있으면 누구든 금융시장에 뛰어들 수 있다.
때문에 오랜 기간 체계적으로 금융투자 교육을 받은 엘리트가 있는 반면, 어쩌다 보니 투자를 하게 된 사람도 있다.
나는 당연히 후자다.
투자에 왕도와 사도가 있다고 한다면, 난 완전히 사도에 속할 것이다. MBA는커녕 아직 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으니까.
내 얘기를 들은 제임스는 웃음을 지었다.
[많이 배웠다고 똑똑한 것은 아닙니다. 삶이든 투자든 교과서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니까요.]현주 누나를 보면 알겠지만, 골든게이트에는 전세계에서 모인 유수의 인재들이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든게이트가 아닌 나에게 부탁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헨리도 알고 있나요?”
[본인 역시 원하고 있습니다. 전설적인 투자자와 같이 일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이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하기가 마땅치 않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헨리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금융지식 역시 월등히 앞설 것이다.
설마 나중에 손자 망쳐놨다고 원망 듣는 건 아니겠지?
[그보다 미스터 강에 대해 너무 많은 게 드러났습니다. 슬슬 준비하는 게 좋을 겁니다.]미국에 온 뒤로 여기저기 정체를 밝히고 돌아다녔다. 어느 쪽에서 얘기가 흘러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OTK컴퍼니 CEO가 20대 동양인이라는 것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대체로 ‘카더라 통신’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20대 청년이 이 정도로 큰일을 벌였을 거라고는 믿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정체가 드러나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자, 택규가 물었다.
“누구야?”
난 방금 전 통화내용에 대해 얘기하고, 현주 누나에게 의견을 구했다.
“헨리를 받아도 괜찮을까요?”
누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쁜 제안은 아니야. 제임스 C. 골드맨이 후계자로 점찍었을 정도면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해낼 수 있겠지.”
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도 직원이 있어야 돼. 회사 규모가 50조가 넘어가는데, 딸랑 주주 셋이서 운영한다는 게 말이 되냐?”
“······.”
맞는 말이다.
헨리가 들어오면 드디어 첫 직원이 생기는 건가?
현주 누나는 피곤한지 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일단 데려와 봐.”
“예.”
헨리는 바로 옆방에서 경호원들과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난 그곳으로 찾아가 말했다.
“방금 얘기 전해 들었습니다.”
헨리는 웃음을 지었다.
“같이 일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우리는 같이 이동했다. 헨리가 안으로 들어오자 현주 누나는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OTK컴퍼니에 들어온 걸 환영해요.”
헨리는 얼굴을 붉히며 그 손을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현주 누나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바로 일을 시작하죠.”
“아, 알겠습니다.”
헨리는 허둥지둥 겉옷을 벗고 자리에 앉았다.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상체가 탄탄하다.
택규는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누나 밑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너무 공감 되는 말이라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게.”
* * *
브렉시트 사건으로 인해 K컴퍼니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금융회사가 되었다.
이제까지 한국 금융시장은 외국인들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외국계 IB와 PFE 등이 부동산, 주식, 채권, 파생상품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가는 동안, 한국 금융회사는 외국에서 별다른 수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설립 된지 채 2년도 안 된 회사가 전세계 파생상품 시장을 휩쓸며 5조 원에 가까운 돈을 쓸어 담았다.
언론은 그 사실을 대서특필했고, 대표인 박상엽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심지어는 한국의 워렌 보트라는 찬사가 따라붙었다.
벤처캐피탈을 할 때만 해도 중소회사에 불과했던 K컴퍼니는 어느새 대형 IB와 맞먹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재벌이라고 해도 5대 그룹을 제외하면 현금으로 그 정도를 가진 기업은 흔치 않다.
그 돈이 어떻게 쓰일지도 대단히 관심사였다. 이전처럼 벤처캐피탈이나 기업인수에 나설 것인지, 아니면 다시 금융시장에 투자를 할 건지.
사실 K컴퍼니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았다.
박상엽의 투자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초기 투자금의 출처가 불분명했다.
법인의 98퍼센트를 외국계 회사가 소유하고 있는데, 어떤 회사인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대체 누가 자금을 대주었을까?
언론뿐만이 아니라 재계와 정계도 K컴퍼니에 관심을 나타냈다. 금융계는 신흥 금융재벌의 등장에 잔뜩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적일까 아군일까?
경쟁자일까 동업자일까?
재벌들 역시 경계를 나타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건 K컴퍼니가 지분을 소유한 스타트업들이었다.
신산업에 진출한 스타트업들은 K컴퍼니의 지원을 등에 업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당장이야 모르겠지만, 향후 이들이 재벌들이 독과점하고 있는 국내 산업에 균열을 가져올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누구도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더 크기 전에 밟아서 없애거나, 인수를 해야 했다. 그런데 자금력을 가진 K컴퍼니가 뒤에서 버티고 있으니, 쉽지 않다.
재벌들은 일제히 정치권에 K컴퍼니에 대해 조사하고 규제해야 한다는 압력을 넣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청와대가 움직였다.
현 대통령인 박시형은 재계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당선되었고, 집권하고 있는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대통령은 국정원장인 윤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K컴퍼니라는 곳에 대해 알아보세요.”
국정원은 원래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수사하는 기관이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휴전국가의 특성상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좀 달랐다.
이전 정부 때부터 대통령의 측근이 국정원장 자리에 앉았고, 정권의 충견 역할을 도맡아했다.
국정원은 비밀리에 K컴퍼니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대표인 박상엽은 물론 직원 전체가 감시 대상에 올랐다.
조사라기보다는 불법사찰이었지만,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여러 차례 불법사찰 문제가 불거졌지만, 전부 다 무혐의로 넘어가거나 검찰에서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모든 게 다 국가를 위한 일인데, 불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자금 출처가 북한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이유면 모든 게 용납었다.
조사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사실들을 밝혀낼 수 있었다.
K컴퍼니는 설립 당시부터 미국계 IB인 골든게이트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모든 금융거래를 골든게이트를 통해서만 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투자하는 것과는 별개로 OTK컴퍼니의 업무를 위탁받아서 처리했다. 이는 K컴퍼니가 OTK컴퍼니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설마······ OTK컴퍼니가 K컴퍼니에 자금을 지원해준 건가?”
직원들 명단에는 오택규와 강진후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둘은 억대의 연봉을 받으며 정작 회사에 출근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택규의 누나는 다름 아닌 골든게이트 한국지사장인 오현주다.
뭔가 꼬리가 잡히는 듯했다.
“얘들은 대체 뭐지?”
그 시점에서 OTK컴퍼니가 공화당 후보인 로날드와 손을 잡고 미국 자동차산업에 200억 달러를 투자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모든 게 오택규와 강진후가 미국으로 출국한 후 벌어진 일이다.
이어서 나온 기사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OTK컴퍼니 CEO가 20대 동양인이라는 것이다.
국정원에서는 박상엽의 통화내역을 뽑아서 확인했다. 그는 여러 차례 번호를 바꿨고, 강진후와 오현주와 수시로 통화했다.
브렉시트 직전과 직후는 물론, 최근까지도 통화한 내역이 확인되었다.
“오택규와 강진후를 계속 파봐.”
통화내역도 모자라 금융거래내역까지 조사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다. 재작년에 OTK컴퍼니가 국내로 송금한 내역이 확인된 것이다.
강진후에게는 두 차례에 걸쳐 13억을 보냈고, 오택규에게는 무려 130억을 보냈다!
오택규는 그 돈으로 강남에 단독주택을 사고, 외제차를 사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리고 강진후는 그 집에서 얹혀살고 있다.
온갖 불법적 수단으로 수집한 정보 덕분에 윤세원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OTK컴퍼니가 오택규 컴퍼니였어!”
어째서 박상엽이 K컴퍼니 대표를 맡게 되었는지도 납득됐다. 강진후가 학교 선배인 박상엽을 오택규에게 소개시켜준 것이다.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들었다.
“오택규가 OTK컴퍼니의 CEO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