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is a dimensional bag RAW novel - Chapter 148
148화
띠링, 띠링.
또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ID 워치를 들어 상대방을 확인하는 퍼미셀카사,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림워커.
‘이런, 몇 번 어울려 줬더니.’
어제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마법적 자문 운운하며 화상 대화를 받아 준 것이 실수, 심심하면 전화질이다. 정말 기다리고 있는 전화는 신탁자 운호인데…….
‘잘하고 있겠지.’
사실 그를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능력으로만 따져도 드래곤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운호가 이룩한 새로운 세계수의 영역, 이곳에서 엘프들은 정령들과 함께 자신들의 터전을 만들고 있었다.
아직 어린 세계수였다. 그러나 제대로 영성을 갖추기만 하면 본격적인 엘프들의 번영이 시작될 것이다. 그때까진 자신이 이곳을 지켜야지.
‘점점 엘프다워지는군.’
이곳에 오기 전 엘프들은 불안해 보였고, 날카로웠다.
원래 엘프들은 평화의 상징이라고 할 만큼 유순하고 온화한 종족, 멸족의 위협에 처하자 그들은 본성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당장 살 곳이 생겨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희망이 생겨 그런 거지.
종족의 영속적인 번영을 약속받은 엘프들, 신도 약속하지 못했던 것을 이계에서 온 젊은이가 베풀었다.
순간!
“응?”
스스슥.
변질 마나로 오염된 대수림의 숲이 흔들리면서 걸어 나오는 한 명, 하이 엘프 클라벤이 제일 먼저 목격했다.
“메이린.”
“클라벤.”
이미 칠흑으로 변해 버린 메이린의 모습에 클라벤은 안쓰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동정심?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녀를 엘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정체성이 사라져 피부색마저 변한 엘프를? 정령조차 메이린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린은 그런 클라벤의 태도가 고깝다.
“그 눈초리는 뭐냐? 건방진… 감히 날 동정하는 건가?”
“그래, 맞아. 동정하는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러니 일족들을 이끌고…….”
“죽엇!”
순식간에 단검을 양손에 역수로 꼬나 쥔 메이린.
스팟!
주저 없이 클라벤에게 짓쳐 들어갔다.
처연한 저 눈빛, 정말 꼴 보기 싫다.
하지만.
휘릿, 서거거걱!
그녀의 전신을 휩쓸어 오는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 실프였다.
“칫!”
뜻하지 않은 방해에 메이린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정령에게 공격을 받다니, 엘프가… 정령에게?
“이제 깨달았나? 메이린, 넌 동정을 받아 마땅한 처지야. 정령들도 더 이상 너희를 엘프로 보지 않아. 다크 엘프는 종족이 아니야. 질병이지.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야.”
“허, 헛소리하지 마!”
그녀의 가슴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정령에게서 공격을 받았다는 충격,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을 것만 같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지만 메이린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왕 버림받은 몸, 아무렇게나 되라지.
그때!
거역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클라벤과 메이린을 제약했다.
“그만! 세계수가 힘들어하고 있다. 물러나라.”
파르르 떨리고 있는 세계수의 잎사귀, 눈으로만 봐도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
“겉보기엔 다 자란 성체 같지만 아직 어린 묘목이시다. 같잖은 다툼은 어디 가까운 던전 안에 들어가서 해라.”
드래곤의 경고에 클라벤과 메이린은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퍼미셀카사가 메이린에게 물었다.
“껌둥아, 여기 온 이유가 무엇이냐? 설마 한판 붙으려고 오진 않았을 테고.”
“세계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클클클, 세계수라… 웃기는군. 하나 광휘 그놈도 세계수라면 세계수겠지. 어디 말해 봐라. 그 새까만 나무가 네게 뭐라고 명했나?”
“변질 마나 흡수 도중에 이상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탁자를 데리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게 안 되면 퍼미셀카사 님이라도…….”
“지금?”
“상황이 급박합니다.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데리고 오라 하셔서.”
퍼미셀카사는 깊이 고민했다.
지금 신탁자 운호는 자리를 비웠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야 하는데…….
진실의 눈으로 꿰뚫어 본 메이린의 심상, 최소한 거짓은 없었다.
‘별일 없겠지.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제까짓 게 뭘 한다고?’
또한 궁금하기도 하다.
최초의 신탁자이자 아크 리치, 지금은 칠흑의 세계수로 변해 버린 광휘.
그러고 보니 놈과 말로써 대화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다. 고양이의 몸에 빙의해 몸의 대화를 나눈 적은 있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은 있다. 그러나 결국 태생이 드래곤인지라 한껏 피어오른 호기심을 이길 순 없었다.
“내가 가지.”
“길을 열겠습니다.”
우드드득
대수림 한가운데로 커다란 길이 열렸다.
스르륵!
변질 마나도 영향이 없도록 길 양옆으로 물러났다.
덕분에 편하게 대수림 안으로 발을 들이는 퍼미셀카사.
사실 광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운호가 이미 타 차원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그래서 지금 현재 에론 대륙에 없다는 것을.
광휘, 칠흑의 세계수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블랙 드래곤 퍼미셀카사였다.
* * *
드라쿠스 미스틸이 네르구이에게 되물었다.
“농업용 기계라고? 그걸 부탁하셨단 말인가?”
“그래요. 드라쿠스.”
“으흠, 그러면 우리 미스틸 시에 방문하셨어야지.”
보통 농업용 중장비는 사마르 시에서 생산하지만 실제 사용은 미스틸 코퍼레이션에서 한다.
“기다리지 마시고 우리가 운용하고 있는 장비들을 먼저 가지고 가시면 편할 터인데…….”
“그거 중고품이잖아. 신상을 갖다 대령해도 모자랄 판에 이미 사용한 걸 넘길 생각이었나?”
“으음…….”
한심하다는 듯 드라쿠스를 보며 이죽거리는 안드레이 코헨.
네르구이 사마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드라쿠스 님 말도 맞습니다. 수량이 많이 필요하시다고 해서 중고 장비도 가져다가 정비를 한 후 우노 님에게 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
“그것 봐! 내 말이 맞지?”
“끄응.”
차원 거래자가 가지고 왔다는 드래곤 하트 10개, 그걸 직접 눈으로 목격한 안드레이와 드라쿠스는 정말 깜짝 놀랐다. 이 정도라면 지금 당장 테리포밍 프로젝트에 착수해도 무리가 없을 터.
“세상에! 평생을 안식처에서만 살아갈 줄 알았는데…….”
“껄껄껄, 최소한 우리 아이들은 이 지긋지긋한 던전을 벗어나 살 수 있겠어.”
“아이들만? 나는? 나도 말년은 무조건 바깥에서 보낼 거야.”
“그럼 오래 살아야지.”
프로젝트는 이미 착수에 들어갔다.
과학자들이 총동원되어서 그 일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장비 생산에 필요한 인원들은?”
“그렇지 않아도 인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결점을 보완한 신형 장비 생산에 들어갈 생각이라.”
“가용 인원을 총동원해 주지.”
“미스틸 시에선 중고 장비들과 농업 전문가, 정비 기술자들 보내 주시고 안드레이 님은 합성 결정석과 마나 회로도 연구원들을 파견해 주십시오.”
“그러지.”
“바로 보내겠네. 그런데 자원은 충분한가?”
“비축 자원 다 털어 버릴 생각입니다. 일단 경운기부터 시작해서 트랙터, 자동 파종기, 수확기, 액화 비료 살포용 드론, 곡식 건조기, 양수기, 선별기, 도정기, 제분기…….”
“자세한 건 말하지 않아도 돼.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허허, 뭔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이리도 좋을 줄 누가 알았겠나?”
“동감이네.”
* * *
안식처에서의 볼일을 끝낸 운호는 바로 에론 대륙으로 넘어갔다.
‘기계화 농업이라는 것이 뭔지 확실하게 보여 줘야지.’
정령들과 힘을 합치면 거기서 발생되는 시너지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차원 거래를 재개했으면 어쩔 뻔했나?
그 농업 장비들 하나하나에 관세가 매겨졌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나저나 이제 광휘는 어떡하지?’
놈의 소용 가치는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설사 광휘가 글리제 외부의 변질 마나를 흡수하지 않더라도 테라포밍은 성공할 것이다.
지구에서 드래곤 레이드가 생각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끝났기 때문. 솔직히 10개나 되는 던전 드래곤 하트를 획득할 줄 자신도 몰랐다.
‘…그래도 버리면 되나!’
불쌍한 놈이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 자신의 차원을 위해 뭐라도 해 보려는 놈의 노력도 가상했고.
그리고 하나 더, 놈이 사라지면 그를 따르는 다크 엘프들은 또 어떻게 되나.
‘일단 세계수 숲으로 가서 퍼미셀카사를 만나 보고.’
아마도 적절한 조언을 해 주겠지. 현명한 드래곤이다.
블랙 드래곤이라고 해서 음흉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선입견. 하긴, 색깔로 대상을 판단하는 건 인간 말고는 없다.
그래서 서둘러 제트 드론을 타고 세계수에 도착했지만.
“드래곤은?”
자리를 비운 퍼미셀카사.
아직 어린 세계수라 꼭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 엊그제인데…….
클라벤이 부리나케 달려와 말했다.
“칠흑의 세계수… 아니, 광휘가 드래곤님을 호출했습니다.”
“호출?”
“네, 변질 마나 흡수 도중에 이상이 생겼다고 해서……. 처음엔 구원자님을 찾았지만 자리에 안 계셔서 대신 가셨습니다.”
이상이라니, 대체 무슨 이상이 생겼길래.
또 이상이 생겼다고 해도 문제다. 아무리 권능을 가진 드래곤이지만 그 문제는 그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
‘…이거 혹시?’
글리제 차원의 테라포밍 계획, 거기에 필요한 재료인 드래곤 하트, 하지만 던전산이라 품질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 그런데 마침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진짜 드래곤이 바로 곁에 있고…….
“…미친 새끼가 설마!”
바로 그 순간!
스우우웅.
츠츠츠츳!
거대한 변질 마나가 대수림에서 어린 세계수 쪽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크헉.”
“무, 무슨!”
파르르르르.
변질 마나의 공격에 애처롭게 떨리는 줄기와 가지 잎사귀.
어린 세계수가 비명을 질렀다.
* * *
메이린이 칠흑의 세계수 앞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제, 제발…….”
문제가 생겨 드래곤과 신탁자 둘 중에 아무나 데리고 오라는 광휘의 명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속였다.
세계수가 거짓말이라니! 하긴 그녀도 몰랐다. 광휘가 처음부터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네 할 일은 끝났다. 이제 그만 일족을 이끌고 떠나라.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신탁자의 분노를 혼자 감당하시겠다는 말씀이옵니까?”
-걱정 마라. 그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절대 나를 죽이지 못한다. 최소한 난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아아아…….”
-결국 선택하겠지. 어린 세계수를 살릴지, 아니면 드래곤을 살릴지. 나는 전자라고 생각한다만.
폴리모프도 풀지 못한 채 인간의 육신으로 칠흑의 세계수 가지에 목이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퍼미셀카사.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광포한 변질 마나를 자유롭게 다루는 세계수 앞에선 나약한 도마뱀이나 다름없었다.
-여길 떠나라! 메이린, 나는 그렇다 쳐도 너와 일족들이 위험하다. 신탁자의 분노가 너희들에게 돌려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살아남아라! 이것은 명령이다.
“…….”
메이린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직은 살아 있는 드래곤이지만 광휘가 마음만 먹으면 죽은 목숨.
“알겠사옵니다.”
결국 메이린은 일족을 이끌고 대수림을 빠져나갔다. 이제야 광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증언을 해 줘야 한다. 자신이 글리제 차원을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말이다.
이미 신탁자에게 차원 이동의 자격을 받은 메이린, 들은 바로는 에론 대륙와 글리제의 차원 이동 게이트는 상시적으로 열려 있다고 했다.
-그럼 신탁자 없이도 홀로 안식처에 넘어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
확보한 진품 드래곤 하트를 들고 그곳의 권력자에게 넘기는 것이 광휘가 생각한 메이린의 임무. 그리하여 자신의 존재를 그곳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이건 절대 질투가 아니다.
정당한 권리다.
안식처 인류들에게 고마움을 들어야 할 존재는 정운호가 아니라 자신이 되어야 하고.
이윽고.
쿵! 쿵!
저 멀리서 들리는 육중한 소리.
-이제야 왔구나. 신탁자여.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쿠쿠쿠쿠쿵!
이곳으로 오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음? 대, 대체……. 뭐지?
* * *
차폐막 장갑으로 둘러싸인 전차가 대수림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콰쾅! 콰콰콰콰콰쾅! 쾅!
더불어 상부에 달린 세 개의 포신에서 뿜어지는 화염, 전차 앞을 막아 오는 숲의 식물들이 너무나 무력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사람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옛말 틀린 것 하나도 없지.
‘절대 협상은 없어!’
운호는 그렇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