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is a dimensional bag RAW novel - Chapter 149
149화
밀려오는 변질 마나.
우우우웅.
사시나무 떨 듯 쉴 새 없이 진동하는 가지와 잎사귀.
어린 세계수가 고통받고 있었다.
이미 정령들은 역소환당한 지 오래, 그 아픔을 고스란히 공감하고 있는 엘프들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
“아아아아아!”
“세계수시여!”
클라벤과 엘프들은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엘프들도 변질 마나의 광포한 공격에 고통받고 있었지만 그들에겐 자신의 아픔 따윈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로지 세계수, 죽어 가는 세계수, 그에 대한 걱정뿐.
일족이 정착할 보금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소멸의 위협에서 벗어나 번영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터전, 그러나 지금, 희망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왜 우리는 생존이라는 이 단순한 소원도 가지면 안 되나? 그저 백일몽일 뿐이었나?
엘프들은 절망했다.
그리고 그 절망은 복수심으로 변했다.
으드득!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무는 클라벤.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메이린을 찾아라! 다크 엘프, 아니 그 껌둥이들은 이제부터 우리와는 한 하늘 아래서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철천지원수다.”
동의한다는 듯 다른 엘프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누구 하나라도 껌둥이와 마주치게 되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이것은 맹세코 어겨선 안 되는 철칙이며 이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절대 원칙이다.”
핏발 선 눈으로 클라벤의 선언을 다시 한번 가슴에 아로새기는 엘프들이었다.
* * *
광휘, 칠흑의 세계수에 붙잡혀 버린 퍼미셀카사는 죽지 않았다. 아직 한 가닥 의식의 끈을 잡고 있었다. 여전히 그에겐 기회가 남아 있다.
드래곤이 괜히 차원 최강의 생명체라 일컬어지는 게 아니다.
1만 년 이상을 훌쩍 넘는 무지막지한 수명, 그로 인해 지성을 가진 생명체 중 누구보다 지혜롭고 현명한 존재.
육체적인 능력도 최강이다. 날카로운 발톱과 꼬리의 물리 공격, 그 어떤 공격도 막아 내는 비늘을 가진 방어력, 모든 걸 녹여 버리는 무지막지한 브레스.
무엇보다 드래곤이 가진 최고의 능력은 바로 무한한 마나다.
결정석과 비교조차 불허하는 드래곤 하트, 그러나 단순히 마나를 많이 저장하는 기능만 가지고 있을까?
드래곤 하트는 컴퓨터와 비교하면 일종의 중앙 처리 장치인 CPU.
CPU는 데이터를 연산하고 처리하여 결과를 출력해 내는 역할을 한다.
드래곤 하트의 경우엔 마나다.
마나를 분석하고 해석한다. 그럼으로써 변환과 정화 과정을 거치면 온전한 드래곤의 마나가 되는 것.
변질 마나? 어차피 그것도 마나의 일종, 따라서 드래곤 하트가 그것을 처리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지극히 이질적인 것이라 시간이 걸릴 뿐이지.
망한 차원, 글리제의 사람들이 왜 그토록 그것을 원했을까? 아마도 드래곤 하트의 이러한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퍼미셀카사의 드래곤 하트가 변질 마나의 성질을 조금씩 해석해 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화된 마나가 조금씩 하트를 통해 드래곤 몸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거의 다 됐다.
‘이건 네놈이 실수한 거다.’
자신을 유인해 왔을 때부터 광휘는 전력을 다했어야 했다.
결국 이건 ‘양’의 문제.
처음부터 드래곤 하트도 감당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양의 변질 마나를 주입했더라면 자신은 힘도 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의 실수로 기회가 찾아왔다.
이제 곧 있으면 변질 마나 따위는 자신에겐 문제도 되지 않을 터.
‘조금만 더, 조금만…….’
그런데 바로 그때!
-애썼다. 꽤 길을 들였구나.
‘응? …길을 들여?’
끔찍한 변질 마나가 다시 드래곤의 몸을 덮쳐 왔다.
“허어어억!”
-내가 그리 허술해 보였더냐? 왜 네가 죽지 않을 만큼만 내버려 뒀을까?
“아!”
그제야 퍼미셀카사는 깨달았다.
광휘는 자신의 드래곤 하트를 길들이고 있었다. 변질마나를 분석하고 정화해 내는 역할을 극대화시키는 것, 그리하여 글리제 행성 테라포밍 계획에 최적화된 재료로 삼기 위해서.
사육당하는 돼지 신세로 전락했다.
중단해야 한다. 놈의 수작에 말려들어 가면 안 된다.
‘…이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밀려들어 오고 있는 변질 마나, 의식하지 않아도 파미셀카사의 드래곤 하트는 해석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잘하고 있다. 점점 품질이 좋아지고 있어. 하지만 좀 더 노력해야지.
그 와중에 매캐한 연기와 화염이 칠흑의 세계수 앞까지 닥치고 있었다.
누가 그랬을까?
당연히 지구인 정운호의 짓이겠지.
-쯧쯧, 쓸데없이 힘을 과시하려 하는구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수작인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로다.
놈은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어 가는 어린 세계수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 * *
차폐복을 착용하고 대수림을 유린하는 운호.
글리제 차원에서 생산된 전자 제품이나 장비들은 굳이 인간이 직접 작동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졌다.
기본적인 명령어만 입력하면 자율적, 능동적으로 작업을 수행한다. 물론 사용자의 판단을 요구할 필요가 있을시 이렇게 ID 워치를 통해 미리 물어보는 건 당연하고.
-작업 지시 사항 50% 이상 수행 완료. 계속할까요?
“그래, 계속해! 저 크고 시커먼 나무 하나만 남기고.”
자율 주행으로 헬파이어 수준의 불꽃을 뿜어 대며 대수림을 누비는 차폐막 전차, 하나하나에 공격 마법 마나 회로도를 장착한 20만 기의 곤충 로봇, 거의 재앙 수준이었다.
안식처에 필요한 자원을 조달할 목적으로 외부 변질 마나와 싸우면서 차곡차곡 쌓아 온 글리제 차원의 기술력,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대수림의 절반이 불에 타 버렸다. 남은 절반도 곧 잿더미로 변해 사라질 것이다.
갑자기!
스르륵!
갑자기 우거진 숲이 저절로 갈라지면서 일직선 길이 열렸다.
“이쪽으로 오라고?”
숲을 파괴하는 행위는 중단하고 빨리 와서 대화하자는 광휘의 의도겠지.
하지만 운호는 어울려 줄 생각이 없다.
“모조리 불태워!”
광휘도 안다.
아니, 안다고 생각하겠지.
글리제가 차원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와 있는지를.
하지만 그건 5백 년 전의 사실, 여전히 그는 모르고 있다. 변질 마나와 싸우며 악전고투로 쌓아 올린 기술력을 말이다.
원하는 것이 뭘까?
분명히 합의를 했다. 글리제 차원의 정상화를 위해 같이 노력을 하기로.
‘그런데 왜 그렇게 조급해하지?’
어린 세계수가 목적이었다면 퍼미셀카사를 유인하지도 않았을 터, 그렇다면 놈의 의도는 분명하다.
진품 드래곤 하트!
어린 세계수는 그것을 위한 인질이었다.
물론 운호는 둘 다 살리고 싶다.
드래곤도, 세계수도.
하지만 놈의 뻔한 의도에 휘둘리면서까지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윽고.
거의 잿더미로 변해 버린 숲.
남은 건 하늘 모르고 높이 솟아오른 광휘, 칠흑의 세계수 한그루.
운호는 마침내 광휘의 앞에 섰다.
-결국 다 태워 버렸군. 잘 봤다. 나도 태우려고? 하나 어쩔 것이냐? 내가 의식하는 순간에 둘 다 1초도 걸리지 않고 바로 죽을 건데, 그들을 구할 시간이나 있을까?
가지에 높이 매달린 채 꼼짝도 하지 못하는 퍼미셀카사를 힐끗 쳐다보는 운호.
“입 닥치고, 원하는 게 뭐야?”
-어차피 이 드래곤은 죽는다. 너도 봤겠지만 어린 세계수도 위태위태하다. 선택해라. 세계수를 살릴 것이냐? 아니면 둘 다 죽일 것이냐?
“…한 가지만 물어보자.”
-마음껏.
“왜 죄도 없는 블랙 드래곤을 죽이려는 거지?”
-그야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이놈이 가지고 있으니까. 얼마나 간단한 일이더냐! 진품 드래곤 하트로 멸망해 버린 차원이 되살아날 수 있음이니.
“내가 처리한다고 했잖아. 이미 충분한 양의 드래곤 하트를 안식처에 넘기고 오는 길이고.”
-클클클, 아무리 노력해 봐야 그건 가품일 뿐. 바로 곁에 진품이 있는데 굳이 그런 값어치 없는 던전산을 사용할 이유가?
“누누이 말했지. 그들의 기술력을 믿으라고!”
-그건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지. 하지만 좋은 기술력에 좋은 재료가 만나면 금상첨화라는 걸 너도 모르진 않을 테고.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놈이다.
-또한 이곳의 신도 책임을 져야 한다. 고작 드래곤 한 마리로 대가를 치르는 것인데 오히려 내가 밑지는 거래지. 네가 결심만 한다면 어린 세계수는 내가 성의껏 보살펴 주마. 든든하게 자라 수많은 엘프를 보호하는 진정한 나무로 거듭나게 해 주겠다.
“자꾸 남 탓으로 돌리는데… 대체 신이 글리제 차원에 무슨 짓을 저질렀어?”
-쯧쯧, 에론의 원주민도 아닌 이방인 주제에 오지랖은! 당연히 잘못이 있지. 생각해 봐라. 신이 존재하는 차원이 얼마나 될까? 내가 아는 바로는 지구엔 신이 없다. 그건 글리제도 마찬가지고.
“뭐, 그렇다 치고.”
-신이 없는 차원을 끌어들여 자신이 지배하는 차원의 발전을 도모하려 한 죄는 크고도 크다. 아주 비열한 짓이지. 글리제 차원 멸망이 순전히 인간의 짓이라고? 가당치도 않다. 만약 글리제에도 신이 있었다면 에론 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순진한 인간이나 혹하고 넘어가는 거지.
“하아!”
결론은 에론의 신 때문이라는 거네. 자신은 속은 죄 말고는 없고.
이런 놈이 제일 싫다.
모든 책임을 항상 남 탓으로 돌리는 놈. 정작 자신은 어쭙잖은 자기 합리화로 쏙 발뺌한다.
-하기 싫겠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 어쩔 수 없이 내가 해야지. 결자해지란 말도 있지 않나?
“이미 해결하고 있잖아. 너도 함께 참여해서.”
-그래,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그들을 위해 희생한들 안식처 인류는 오직 너만을 기억하고 너만을 의지하겠지. 지금도 그러고 있고.
“음?”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 광휘.
“너 이 새끼… 질투하고 있구나?”
-…질투는 무슨! 글리제는 내 고향이다. 내 차원이다. 안식처 인류는 나와 유전자를 같이 공유하는 사람들, 내가 바로잡을 것이다. 넌 제삼자야!
운호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다 내 잘못이다. 결자해지라고 그랬지? 맞는 말이야. 당사자가 책임지는 것이 맞지.”
-너도 깨달았구나. 진품 드래곤 하트는 메이린이 직접 안식처에 전달을 해 줄 것이니 넌 그동안 그쪽엔 신경을 쓰지 말고 푹 쉬어…….
순간!
-응?
웨에에에엥!
어디서 날아왔는지 수십만 마리의 곤충들이 가지에 높이 매달린 퍼미셀카사의 전신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빼곡하게 뒤덮었다.
다닥! 다다닥! 다닥!
파지직!
후두둑.
동시에 가지에서 분리된 퍼미셀카사.
-무, 무슨…….
광휘는 깜짝 놀랐다.
운호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그제야 깨달았다.
놈은 애초에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다 마치고 자신 앞에 선 것이다.
광휘는 서둘러 세계수로 보내는 변질 마나의 양을 증폭시켰다.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콰쾅! 뿌드득!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와 칠흑의 세계수 원줄기 껍질을 순식간에 뚫어 버린 드릴 모양의 미사일.
쐐애애애액!
-끄아아아아악!
음속을 몇 배나 뛰어넘은 속도에 반응할 여지도 없었다. 쐐액 소리가 들린 순간에 이미 줄기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으니까.
“네가 글리제 차원의 기술력에 대해 뭘 안다고?”
웨에에엥, 에에에엥!
퍼미셀카사의 보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20만 마리의 곤충 로봇들.
“사실 넌 별 쓸모가 없어. 네가 없어도 테라포밍은 순조롭게 진행될 거야. 그냥 불쌍해서 살려 줬더니…….”
-이, 이놈!! 다 죽여 버리겠다. 세계수든 드래곤이든…….
스팟!
그 무거운 차폐복 장비에도 불구하고 눈 깜짝할 새 칠흑의 세계수의 구멍 난 줄기 앞에 도달한 운호.
“여기 있었네.”
-뭘? …아! 아, 안 돼!
구멍 아래, 아크리치 광휘의 라이프 베슬이 보인다.
애초 차원 채굴용 전차가 발사한 드릴 미사일의 목표는 그 라이프 베슬이었다.
“여기쯤이라 생각했는데 살짝 빗나갔구나. 뭐, 내가 직접 박살 내면 그만이지.”
-자, 잠깐! 대, 대화로 풀자꾸나.
“처음부터 대화할 생각은 없었어. 미안하다. 그냥 가라. 나라고 마음이 편하겠냐? 갱생의 여지가 있었다면 모르겠다만…….”
-여, 여지가 있다. 갱생하겠다.
“늦었어.”
운호는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고 그대로 광휘의 라이프 베슬을 후려갈겼다.
쾅!
파직!
-이익! 머, 멈춰…….
또 한 방!
쾅!
퍼석!
-제, 제발.
쾅!
파사삭!
-꺽!
프스스스스.
라이프 베슬.
광휘의 생명력과 영혼, 권능이 담겨 있는 물건, 뭉클뭉클 검은 연기와 함께 한낱 먼지로 변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차원 기여도 메시지.
[차원의 중대한 위협이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