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is a dimensional bag RAW novel - Chapter 164
164화
이블브레인, 마뇌는 지금의 삶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비록 기대했던 선계(仙界)는 아니지만 마교에서 천마에게 들들 볶여 살아가던 때와 비교하면 이곳이 천국이 아니고 뭔가?
시간이 갈수록 그 느낌은 더더욱 강해졌다.
‘천마 새끼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게 이리도 평온할 줄 몰랐군.’
만마지존이라는 말에 걸맞게 마교의 무공을 익힌 자라면 누구나 천마의 기세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뇌도 예외가 아니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마주하기만 하면 심장이 벌렁벌렁, 잘해도 욕이요, 못하면 주먹질이었다.
성격은 또 어떤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팍했고 변화무쌍하기로는 여름철 소낙비와 같았다. 정말 많이 시달렸다.
천마의 비위를 맞춰 주는 것도 군사가 해야 할 일, 황궁의 관리였다면 낙향을 선언하고 일선에서 물러났을 텐데 마교라서 그것도 불가능했다.
반면 새 주인 릴리트는?
일단 외모부터 천마와 정반대. 100살이 다 되어 가는 마뇌의 굳어 버린 석심도 뒤흔드는 고혹적인 미소, 투정을 툴툴 부려도 웬만한 건 다 받아 주는 유연함, 게다가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인정해 주기까지 했다.
‘사실 그게 제일 크지. 칭찬은 베히모스도 춤추게 한다던데.’
그러나 귀중한 손님을 베리알의 영지에 홀로 내버려 두고 왔다는 사실 때문에 솔직히 무지막지하게 깨질 줄 알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도망가 군대를 이끌고 베리알의 영지로 진군해 오는 릴리트의 군대와 합류해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런데 웬걸? 릴리트는 자신을 책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발 빠르게 도망친 것에 대해 칭찬을 받은 것. 남아 있어 봐야 소용없었을 거라나?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뒤를 이어 들려오는 충격적인 소식, 베리알이 죽었다. 그것도 인간이 아니라 그의 애완동물인 고양이에게!
‘쯧쯧, 도망치는 걸 보고 얼마나 비웃었을까?’
미리 얘기나 해 줬으면 그런 꼴사나운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사실 릴리트가 왜 그 인간에게 그토록 관심을 보이는지 전엔 알 수 없었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절대자였다.
‘그러고 보니 줄을 타는 본능도 기가 막히는군.’
릴리트는 다른 대공들처럼 마왕선출을 위한 회합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마신의 가호를 입었다는 인간에게 있었다. 베팅을 그쪽에 올인했다.
‘이래저래 영민한 주인이야.’
아니면 운이 좋던가.
그리고 그런 주인을 모시고 있으니 자신의 기분도 좋다.
원래는 그녀를 마왕으로 옹립하고 중원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마계에서 천수를 누리는 것도 괜찮겠어.’
마교보다 백배 낫지.
특히 마공을 익힌 몸이라 그런지 이곳 환경도 마뇌에겐 쾌적하게 느껴졌다.
순수한 마기, 맘에 든다. 백발의 머리가 뿌리부터 검어지기 시작했고 빠졌던 이가 다시 나고 있다.
‘그나저나 내가 대신 간다고 할 걸 그랬나?’
현재 릴리트는 이곳에 없다.
인과율의 부름으로 현세 세상으로 가는 게이트가 열렸다. 아마도 다크 엘프들의 둥지에 무슨 일이 생겼을 터, 자신이 간다고 했지만 릴리트의 결심은 확고했다.
‘별일 없겠지.’
그놈의 블랙 드래곤이 살짝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순간!
까악까악!
갑자기 릴리트의 영지에 새까맣게 모여드는 랩크로우의 떼.
‘허허, 이 재수 없는 까마귀들이 또?’
그런데 놈들의 보도 내용이 심상치 않다.
“! 메피스토 소멸, 새로운 마계 대공 탄생!”
“! 강호 출신의 인간에게 승계가 이루어졌다.”
“! 그의 다음 목표는 릴리트?”
“전쟁이다. 실황 중계, 실황 중계!”
이게 무슨 소리!
전쟁?
“대, 대체…….”
가시 한번 확인해 보자. 강호 출신의 인간이 메피스토를 죽이고 대공 자리를 승계받았다고?
마뇌는 가슴 한구석에서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서, 설마?”
그럴 리 없다. 그래선 안 된다.
하지만 바로 그때!
콰아아아앙!
릴리트의 영지 외곽 성벽 쪽에서 울리는 폭음소리.
“헉!”
마뇌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의 눈에 들어오는 한 명의 인간, 아니 마족인가?
그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하지만 날개는 쓰지도 않았다. 펼치지도 않은 채 등에 접은 상태.
‘능공허도?’
분명하다. 고절한 경공 수법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영지를 침공한 자가 성벽을 넘어 영지 안에 들어서자 모든 마족이 기세에 억눌려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있었다. 서큐버스, 인큐버스, 그들이 부리는 마족, 가릴 것이 없었다.
고작 경공 하나만으로 모든 적을 제압한다?
미뇌는 그 경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처, 천마군림보.’
현존하는 강호 최고의 양학 무공 천마군림보, 사용하는 자보다 경지가 낮으면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는 양민학살의 마공.
한걸음에 적들의 무릎을 꿇리고, 두 걸음에 오체투지로 엎드리게 하며 세 걸음에 무조건 복종하게 만드는 천마신공의 독문 무공.
마뇌는 입을 딱 벌렸다.
급기야 뿔과 날개를 단 마족의 얼굴을 자세하게 살펴봤는데.
“미친!”
천마다. 천마가 마계에 왔다.
자신을 부른 메피스토를 죽이고 마계 대공 자리를 승계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 다음 릴리트의 영지를 침공했고.
“마뇌! 어디 있나? 다 알고 있으니 당장 나와서 본좌 앞에 머리를 조아려라!”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마뇌.
‘허허, 날 찾아왔구나.’
그리고 천마의 옆에 선 낯익은 무사.
‘검마 새끼도 붙었군.’
마뇌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결론을 내렸다.
‘절대 못 가지.’
떠나 보니 알겠다.
천마가 없는 곳이 바로 낙원이라는 걸.
마뇌는 릴리트 성안 넓은 대전 한복판에 서둘러 이동 마법진을 그렸다.
‘제발, 제발.’
릴리트에게 알려야 한다.
현세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렇다면 인과율은?
마뇌는 될 거라고 확신했다. 마신의 가호를 받은 인간, 그와 관계된 일이라면 무조건 인과율이 성립할 터.
지이잉!
“오!”
역시 예상이 맞았다. 현세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지금 당장 가야… 아니지.’
이동 마법진이 닫히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니.
마뇌는 대전의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크게 한번 숨을 들이켜고는…….
“야! 이 씨발 놈아! 네가 천마면 다야? 여기 와서도 버릇 못 고치고 분탕질이냐? 예끼, 이놈아! 신의 천벌을 받아라!”
우뚝!
난데없이 들린 욕설에 오만하게 마족들 위에서 군림하던 천마는 황당한 표정.
“…너 마뇌냐?”
“이블브레인이다! 개새끼야!”
“…뭐?”
치매가 들렸나?
채음보양을 하는 마족 년에게 붙잡혀 있다고 해서 친히 구해 주려 왔는데.
“저놈 지금 나에게 욕설한 것 맞지?”
검마는 천마의 눈을 피하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그게, …그런 것 같사옵니다.”
“가서 저 새끼 잡아 와!”
“넵!”
천마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검마는 쏜살같이 대전 안으로 달려갔지만… 이동 마법진은 닫혀 버렸고, 마뇌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 * *
에론 대륙, 다크 엘프의 둥지.
언제 전투가 일어났냐는 듯 고요한 세상, 평화가 찾아왔다기보다는 어이없는 상황을 목격해서 모두가 말을 잊은 탓이다.
“서방님.”
“…왜요?”
“오래 기다렸사옵니다.”
“그러니까 왜요?”
운호는 기가 막혔다.
기다렸다는 말은 이해한다.
자신이 처음 마계에 가게 된 이유도 그녀의 초대를 받아 마뇌를 따라갔던 거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서방님? 왜?
반면 릴리트는 황홀한 표정.
그녀가 가진 신에 대한 신심(信心)은 누구보다 깊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마계 대공으로 오른 원인도 다른 마계 대공과 다르기 때문.
그들은 오직 강자존의 법칙에 의해 대공의 자리에 올랐지만 릴리트는 마신에 의해 계시로서 직접 간택받았다.
지금은 없지만 과거 현세, 에론 대륙엔 성녀가 있었다. 신의 계시를 몸으로 받아 이적을 행하는 절대자. 마계라고 똑같은 이가 없었을까.
릴리트는 바로 마신이 점지한 마계의 성녀였다.
그런 이유로 당연히 마계 성녀 릴리트는 신의 가호를 받은 운호를 보자마자 강한 끌림을 느꼈다.
“서방님?”
“허어.”
운호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날아온 퍼미셀카사도 이 황당한 사태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동족이 오자 갑자기 기세등등해진 베인드라토는.
“네 이럴 줄 알았다. 자네도 봤지? 퍼미셀! 당장 쳐 죽여라! 마계의 화냥년과 타락한 신탁자가 붙어먹었다. 법칙의 수호자로서 당장 징벌을…….”
“…넌 좀 닥치고 자라!”
퍼억!
“끄응.”
한주먹에 다시 기절하고 마는 베인드라토.
퍼미셀카사가 릴리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장 돌아가라! 아직 때가 아니다. 너희들의 현세 강림은 더 기다려야 한다.”
“으흥?”
묘한 눈빛으로 퍼미셀카사를 바라보는 릴리트.
“도마뱀이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네? 뭐, 나도 여기서 뭘 하려는 마음은 아니었어. 그저… 얘들이 날 불렀고, 난 응답했을 뿐이야.”
“그래서 가지 않겠다는 것이냐?”
“아이참! 기다렸던 님을 만났는데 조금도 못 기다려 줘?”
“너는……!”
“알았어. 갈게, 지금 간다고! 하지만 한 가지만 약속해 줘.”
“뭐냐?”
“얘들을 건들지 않겠다는 약속.”
“허어.”
“계속 놔두라는 건 아니야.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언젠가 내가 다 마계에 데리고 갈 테니까.”
다크 엘프들을 가리키며 퍼미셀카사에게 확답을 요구하는 릴리트.
그러나 난감하다.
어떡하지? 이건 자신이 홀로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운호를 바라보는 퍼미셀카사.
퍼미셀의 눈길을 받은 운호는 고심했다.
한때 광휘의 추종자였던 다크 엘프들, 그들이 이 에론 대륙에 좋은 영향을 끼쳤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그들 또한 변명거리는 있었다.
신에게서 버림받은 다크 엘프들, 살기 위해서, 세계수가 사라진 에론 대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광휘와 함께했다.
이번에도 그렇다.
멸족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런 이유로 마족과 손을 잡았다.
그리하여 운호의 측은지심이 발동했다.
“당분간 지켜보도록 하죠. 나중에 이들을 마계로 데리고 간다는 약속만 지키면.”
“아아아! 역시 서방님… 어차피 이들은 저와 계약을 맺은 영혼들입니다. 제 영지에 다크 엘프들의 터전을 마련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데리고 가겠나이다.”
“…다행이네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생긋 웃는 릴리트.
그 미소에 운호의 심장도 쿵쾅거렸다.
서큐버스, 서큐버스하더만 장난 아니다.
“그럼 이제 마계로 가셔야죠.”
“어머? 서방님, 제가 그렇게 빨리 가길 원하세요?”
“그, 그게.”
실망하는 표정의 릴리트, 하지만 그 모습도 얼마나 매혹적인지 차라리 공격적으로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그냥 뚝배기 깨 버리면 그만인데.
“하아, 소녀도 이해하옵니다. 아직은 비천한 제가 마음에 차질 않으시겠죠.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그때였다.
지이잉.
마계목 바로 옆에서 열리는 이동 마법진.
뭐지? 또 누가?
“헉헉. 주인, 여기 계셨소?”
다름 아닌 마뇌였다.
릴리트가 그를 보자마자 타박했다.
“얘는? 넌 또 왜 왔니? 안 그래도 나 때문에 서방님 고심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아무튼 왔으니 나랑 함께 돌아가자.”
“주, 주인, 지금 돌아가면 안 되오.”
“왜?”
“처, 천마가 영지를 침공해 왔소. 지금 가면 죽게 될 거요. 그러니 절대 돌아가면 안…….”
이게 무슨 소린가!
뜬금없이 천마?
하긴, 강호 무림이 연결되었는데 천마가 안 나타나면 섭하지.
* * *
운호는 또 고민했다.
좀 전에 했던 건 고민도 아니다.
이게 진짜다.
마뇌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운호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건네는 퍼미셀카사.
“저들이 여기 있으면 곤란해지네.”
“하아.”
“베인드라토도 그렇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수면에 빠진 드래곤들이 깨어날지 몰라. 그렇게 되면 나로서는 감당이 불가능하다네.”
일 났다.
마계로 돌려보내려고 이동 마법진을 그렸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열릴 기미도 안 보인다.
인과율에 이상이 생겼나? 아니면 신의 의도인가!
“다크 엘프들이야 내가 알아서 해 보겠지만 마족들은 도저히… 자네가 이들을 맡아 주게. 부탁이야.”
“…….”
퍼미셀의 말은 간단하다. 분란의 여지가 생길 수 있으니 에론 대륙이 아닌 다른 차원으로 이들을 데리고 가라는 것.
그렇다면 어디로?
현재 운호가 넘어갈 수 있는 차원은 글리제와 지구.
사실 어딜 가도 문제다.
“…서방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천진난만하게 바라보는 릴리트.
‘글리제는 안 돼!’
너무 좁다. 그리고 무척 바쁘고.
그렇다면?
‘하아!’
지구에 마계 대공이라. 뭐, 안될 건 없지. 벌써 한 마리가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