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08)
108 하트시그널
겨울이 춥지 않으면 이상 기온이라고 떠들썩할 것이다. 꽤 추운 이날, 이 호프집만큼은 훈훈하다 못해 뜨끈뜨끈하다.
기분이 좋아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더니 귀가 살짝 웅웅거린다. 술 못 마시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정신 바짝 차리자. 아직 할 얘기가 많다. 이 자리에서 우선배정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매년 우선배정으로 엄청난 물량 가져갈 텐데, 반응을 살피는 것이 도리지. 내 욕심만 부렸다가 강호창 사장과 박준희 사장이라는 든든한 아군을 잃으면 큰 손실이니까.
“강 사장님. 올해 입찰 때 제가 우선배정으로 많이 가져가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가만 보자. 그 고효율주상변압기 개발로 우선배정을 또 가져가는구만?”
“네, 맞습니다. 고효율주상변압기 개발로 3년간 20프로 받는데, 전체로 치면 17프로가량 됩니다. 거기에 올해 지역우선배정이 나눠 먹기로 아마 2프로 조금 넘게 붙을 것 같습니다.”
“사업을 이렇게 해야 하는데 말이야. 작년에도 20프로 가져갔는데, 올해도 20프로 가져가는구만? 대단하네, 대단해. 이리 무섭게 성장하는 회사를 본 일이 없네.”
운을 너무 띄우네. 내년에 컴팩트지상변압기 들어가면 우선배정 더 늘어날 텐데, 어떻게 받아들일지 반응을 보여 주시라!
“고생해서 기술 개발했으니, 당연히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지. 나도 올해 변압기 빼고는 죄다 20프로씩 받아 가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나? 준희, 너도 괜찮지?”
“저는 수출에 올인하고 있잖아요. 관수는 욕심 안 냅니다. 지역우선배정이랑 입찰로 챙겨 갈 텐데, 그걸로도 충분해요.”
확실한 아군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물량 많이 가져가는 것에 대해 반감이 보이지 않는다. 올해 입찰에서는 작년 중전기조합에서처럼 볼썽사나운 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좋게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회원사들도 사장님들처럼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뭐 사람 맘이 다 한결같을 수 있나? 아무래도 반발하는 회원사도 있겠지. 그런데 조합이 하는 일이 뭔가? 그런 일 조율하라고 있는 것이지. 조합에서 잘 다독거려 볼 테니까, 자네도 어려운 회원사들 많이 도와줄 방안을 마련해 보게.”
“네. 상부상조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반발하는 조합 회원사들이야 자재 공급으로 달래 주면 될 것이다. 계속 기술 개발을 할 것이니, 자재 생산가를 낮출 수 있다. 나야 자재 더 팔아서 좋고, 인심 얻어서 더 좋다.
자재 판매가 순항하면서, 예상대로 올해 1천억 매출 돌파는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이익을 챙기는 쪽으로 발길을 돌려야겠다.
“아까 신년회 때야 중전기조합이랑 싸워 보자고 했지만, 올해 입찰이 걱정되긴 합니다. 아무래도 우선배정으로 받는 것이 많아서요.”
“단가 때문에 그런가? 걱정 말게. 다들 사업하는 사람인데, 손해 보면서까지 변압기 팔 이유가 없지 않나? 작년 입찰에서 낙찰률 98프로로 떨어졌다고 죽는소리하는 사람들인데, 경쟁한들 단가 확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네.”
“맞아요. 상황이 예전 같지 않아요. 예전에야 업체 몇 군데 안 됐고, 단가도 워낙 좋았으니까 일이십 프로씩 떨어졌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못하죠. 그리고 지 사장님이 조합 위해서 그렇게 많이 내놓으셨는데, 손해 끼쳐 드리면 안 되죠.”
두 사장이 덤핑 입찰이 없을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영업 이익도 이상 무! 올해 사업도 탄탄대로로다.
환청이 들린다. 엄청난 성과급에 환호하는 직원들 목소리가 막 들린다.
“참. 제가 아까 신년회 때 말씀 안 드린 것이 있습니다.”
“뭐든 말하게. 워낙 놀라서 이제 무슨 말을 해도 안 놀랄 자신이 있네.”
“4월부터 대한전력 변압기에 SPRD 부착해야 하는 것 아시죠? 대한전력에서는 개당 3만 원씩 구매하기로 했는데, 제가 조합 회원사에는 2만5천원씩 공급하겠습니다.”
“허허. 지 사장. 이거 너무 막 퍼 주는 것이 아닌가? 개당 단가야 얼마 안 하지만, 퍼센트로 따지면 20프로가량 빼 주는 것이 아닌가?”
“SPRD야 서비스 차원이니까 괜찮습니다. 저도 사업하는 사람인데, 손해야 보겠습니까? 중전기조합에 조금 비싸게 팔면 됩니다. 하하.”
개당 2만 원에 팔아도 짭짤하다고 생각했으니, 25,000원에 팔아도 엄청 남는 장사이다. 인심 쓰면서 재미 본다는 형용 모순된 말이 현실이 되고 있다. 3만 원 불러 주신 대한전력 덕분에 이리 생색내면서 재미를 보다니!
“지 사장님은 진짜 보통 분이 아니라니까요.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죽겠어요. 호호.”
“하하. 남들하고 똑같이 뇌가 들어 있습니다. 저야 직원들 월급 잘 챙겨 주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변압기 업계에서 다크호스를 넘어 현인으로 등극해 버린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일만 가득하다면 얼마나 좋겠나? 내 앞길을 막는 양아치들 진짜 가만두지 않겠다.
“사장님, 그런데 외함은 전 회원사에 공급이 가능해요? 아시겠지만, 외함이 제일 문제잖아요.”
오늘따라 박 사장이 질문이 많다. 우리 공장도 가장 먼저 구경했고, 서로 알 만큼 알면서 호기심이 무궁무진하네.
“걱정 마세요. 우리 회사는 이제 물량 빼기 달인입니다. 외함은 10프로 정도 단가 인하 가능합니다. 마음껏 주문하셔도 됩니다.”
“제가 지 사장님 몇 번 봐서 아는데, 저 눈빛 보니까 외함도 뭐가 있는 것 같은데요? 맞죠, 맞죠?”
어휴. 저 눈빛은 뭐람. 당신이 가진 경쟁력을 나에게 발산하지 말란 말입니다.
“얘기하는 모습을 보니까, 둘이 아주 잘 어울리는구만. 하하. 지 사장, 자네 아직 짝 없지? 우리 준희 어떤가?”
강 사장의 깜빡이 없는 끼어들기에 맥주가 코로 나올 뻔했다. 난데없이 중매쟁이로 돌변한담.
사업 얘기 진하게 흐르는 술자리가 갑자기 청춘 남녀의 하트시그널로 바뀐 분위기이다.
아직 짝이 없냐고? 공식적으로는 없지. 쿨한 유리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3년 뒤에 보자고 했으니 말이다.
뭐 박 사장 아주 좋다. 박준희라는 사람 자체가 주는 매력이 어마어마하다. 술 마셔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많은 것을 알고 싶다. 그런데 누나라는 걸 생각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진단 말이지. 이거 그새 차분해졌네.
“강 사장님도 참. 사장님도 아시잖아요? 지 사장님이 저 엄청 경계해요. 얼마나 거리를 두려고 하는데요? 푸하하.”
박준희 사장이 선수를 쳐 버렸다. 평소와 다르게 과하게 웃는 것이 당황한 것 같기도 하다.
“하하. 박 사장님이야 제가 감히 쳐다볼 수 있겠습니까? 연예인 아닙니까? 그쵸, 누나?”
“아, 뭐예요.”
박 사장이 어깨를 철썩철썩 때린다. 유리의 매서운 스매싱과 다른 느낌이다. 좌뇌가 굳은 의지로 우뇌의 쓸데없는 연상 작용을 막아 냈다. 휴우.
“준희가 지 사장보다 나이가 많나?”
“사장님!”
“하하하. 꼬맹이 때부터 봐 와서 그런지, 나이도 잊고 살았네. 아무튼 둘이 잘 어울려. 처음에는 선의의 경쟁자로 좋은 사업 파트너가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이리 보니까 좋아 보여. 뭐, 늙은이가 여차저차 얘기할 건 아니고, 알아서 잘들 해 봐.”
갑분싸하게 만들어 놓고, 알아서 잘들 해 보라며 꼬리를 내려 버리는 비겁한 강 사장. 이 분위기 어떻게 할 건데?
술자리라는 것이 늘 그렇다. 사업 파트너로 만났지만, 친분이 쌓이고 술 마시며 많은 얘기를 하다 보면, 개인사 깊은 곳까지 자연스럽게 들어가기 마련이다. 결혼 적령기를 넘어서고 있는 남녀가 있으니 나올 얘기는 빤하겠다 싶다.
그렇게 분위기를 하트시그널로 만들어 버린 강호창 사장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생맥주를 거침없이 들이켠다. 생맥주를 몇 번이나 시켰는지 기억도 안 난다.
“맥주는 이게 문제야. 내 잠깐 자리 좀 비우겠네.”
강 사장이 물 버리겠다고 자리를 비우고 나니, 묘한 정막감이 흐른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자리를 비운담.
“지 사장님. 아니, 정수 씨. 제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여요?”
이 양반이 술을 자셨네. 최익현처럼 투정 부리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김판호로 빙의해 안아 주며 위로를 해 줘야 할 것 같다.
안 돼. 술까지 마셨는데, 함부로 신체 접촉 따위를 해선 안 되지. 말로 해결하자.
“아닙니다. 아무리 봐도 20대로밖에 안 보입니다.”
“근데 왜 자꾸 누나라고 그래요? 뭔가 놀리는 것 같단 말이에요. 저 그래도 정수 씨 많이 도와주려고 하는 것 알죠? 좋은 친구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자꾸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아요. 좀 섭섭해요.”
누나가 어때서! 누나를 누나라고 불렀다고, 저리 삐친 모습을 보이면 내가 달래 주기도 뭐하고 난감하잖우?
“저도 사장님이 도와주시려는 것 잘 알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업체 사장님들 중에서 박 사장님과 제일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 마세요.”
“말투도 항상 딱딱하잖아요? 저는 친해지려고 하는데, 정수 씨는 아닌 것 같아요.”
“하하. 제 나름으로 예의 지킨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저는 사장님 그렇게 생각 안 한다니깐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진짜예요? 그럼 악수 한번 해요. 자, 악수.”
아닌 밤중에 악수라니. 따뜻하고 보드라워 좋긴 하다만, 시추에이션이 참 아방가르드하다.
강 사장의 난데없는 뚜쟁이 역할에 화기애애한 술자리가 끈적끈적해진 듯하다. 박 사장과 악수가 참 진득하다. 또래의 남녀가 자주 만나다 보면 이리 위험한 것이야.
위험해질 순간에 강 사장이 나타났다. 박 사장이 배턴을 터치해 자리를 비웠다. 이제야 차분해질 수 있겠군.
“지 사장. 박 사장 맘에 안 들어?”
이 사람들 돌아가면서 진짜.
“아닙니다. 성격 좋고 능력 있고, 아주 좋은 분이죠.”
“내 오지랖일 수 있어. 내가 딸은 없지만, 준희를 어려서부터 봐 와서 딸처럼 생각해서 그래.”
“사장님께서 박 사장님 아끼시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준희가 외동으로 자라서 그런지 욕심이 많아. 맘먹은 것은 어떻게든 쟁취하는 아이야. 그러니 회사를 그리 키웠겠지. 그 욕심 때문에 지금껏 저리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영 맘이 쓰여.”
남자 보는 눈이 높다는 것인지 회사 성장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둘 다겠지. 박 사장 눈 높은 것이야 이미 비밀도 아니고 말이다.
“같은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진심이다. 나야 문자님이라는 강력한 도움이 있었지만, 박 사장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회사를 키웠으니 말이다. 그 현란한 외모는 배울 수 없겠지만, 능력은 많이 배우고 싶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준희가 외로움이 많은 아이야. 겉으론 강인해 보이지만, 아주 여린 애라고. 걔 아버지 그렇게 되고 나서 혼자서 그 힘든 일을 해 왔으니, 아주 속이 썩어문드러졌을 것이네.”
“제조업 세계에서 쉬운 길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내가 회사 키운다고 변압기 쪽에 그동안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핑계지만, 그래서 준희한테도 신경을 많이 못 썼어. 이제라도 챙겨 주고 싶은데, 지금 보니까 나보다는 자네 같은 또래가 나을 것 같아. 자네가 옆에서 힘이 돼 주게.”
“네, 알겠습니다. 저도 박 사장님한테 힘을 많이 얻습니다.”
“나야 뭐 둘이 잘되면 좋겠지만. 하하.”
다음엔 박 사장과 단둘이 술 한잔해야겠다. 프랑스를 구한 잔다르크라는 소문만 들었지, 어떤 인생 역경이 있었는지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많이 배워야 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하이힐 소리가 들린다. 향수 냄새가 점점 가까워진다.
연상은 이상형이 아니라는 이유로 애써 외면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귀와 코가 기능하는 것을 보니 내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자문해 보게 된다.
박 사장과 내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림이 썩 나빠 보이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기엔 재료가 너무 부족하지만 말이다. 어디 한번 재료를 모아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