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59)
159 김옥균
도수 높은 술은 독한 만큼 깔끔하다고들 한다. 증류 과정에서 불순물이 걸러져 숙취가 덜하다고도 한다. 대신 기억도 깔끔해지는 것 같다.
담배 한 대 피우며 어제 폭탄주 두 방을 연달아 마신 후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데, 파편만 남아 있을 뿐이다. 술이 몸에 잘 안 맞을 뿐 정신력은 흐트러진 적이 없었는데, 나도 참. 몸 생각할 나이가 됐구나.
한탄하고 있으려니, 유민희한테서 모닝콜이 걸려 왔다. 속도 부대끼는데 느끼한 것 먹으며 해장이나 하자.
“사장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민희의 저 눈빛. 다행히 경멸의 눈빛은 읽히지 않는다. 나는 기억도 안 나지만, 그래도 이해한다는 눈빛이라 고맙다야.
“어제 과음했더니 속이 안 좋네.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고 있지 그랬어?”
“그래도 사장님은 나오셨네요. 김 사장님은 안 나오실 것 같은데요?”
“김 사장 진짜. 어제 나한테 폭탄주를 그렇게 먹이더니만.”
“사장님, 해장엔 기름진 것이 좋대요. 기름진 것 많이 드세요.”
뜨끈뜨끈한 크림 수프 한 그릇 원샷 하면 속이 좀 편안해질 것 같다. 그래도 막걸리 마시고 부대꼈을 때의 그 고통은 아니다. 막걸리는 다신 쳐다보지 않으리라.
“사장님, 오늘은 난퉁전기 가서 견학하는 것이 다죠?”
“일이 빨리 마무리됐으니까 맘 편하게 가서 구경만 하고 오면 되겠지. 난퉁 거기가 변압기 자재로 꽤 크게 하는 곳이니까 가면 배울 게 많을 거야. 수입할 것 있는지 잘 살펴보고.”
“헤헤. 이번 출장은 좀 헐렁헐렁하네요.”
속이 부대껴 힘들어하는 나와 달리 민희는 여전히 생기발랄한 표정이다. 나도 저렇게 생기발랄하던 때가 있었다. 20대가 부럽다. 마음은 여전히 20대지만, 몸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폐급이 된 듯하다.
“출장이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지, 하루 종일 일만 하면 재미없잖아? 내일은 시간 되면 마사지나 받으러 가자고.”
“감사합니다!”
“그래도 회사 들어가면 엄청 힘든 척해. 실제로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직원들은 그런 거 잘 모르잖아? 비행기 타고 해외 출장 가는 거 부러워하는 직원들 많아.”
“오케이! 사장님, 음식 좀 갖다 드릴까요?”
“음식은 셀프! 과잉 의전은 질색이야.”
은하무역 김상진 사장은 9시가 다 돼서야 좀비 같은 모습으로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력 소모와 숙취로 힘들다는 것을 만방에 과시하면서 말이다.
“사장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휴, 전 겨우 일어났네요. 멩지란이 독하긴 독하데요?”
“저는 사장님이 타 주신 폭탄주 연달아 마시고 나서 기억이 없습니다. 하하.”
김 사장이 나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건넨다.
“그래도 파트너 손잡고 잘 가시던데요?”
하아. 왜 기억이 안 날까? 같이 들어와서 무엇을 했을까?
문득, 예전에 한 국회의원이 유부녀와 호텔방에 있다 발각됐는데, 서로 묵주기도 했다며 당당하게 변명하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래, 나도 아마 묵주기도 5단을 바치며 경건하게 보냈을 것이야.
“안타깝게도 술을 너무 마셔서인지 기억이 안 나네요.”
“이런 슬픈 일이! 아마 무의식 어딘가에 기억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하.”
묵주기도 했을 텐데 슬프기까지야 뭐. 애써 기억하려 노력하지 말고 일에나 매진하자.
“오늘은 난퉁전기 가서 공장 견학하고 인사하면 되는 것이죠?”
“네, 오전에 창저우트란스퍼 가서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난퉁으로 넘어가시죠. 양 사장님이 지 사장님 오신다고 엄청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기대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요, 뭘.”
“아휴, 그런 말씀 마세요. 양 사장님이 사장님 덕분에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김 사장은 다 좋은데, 아부가 좀 많다. 나야 김 사장 통해서 절연지랑 아몰퍼스메탈 약간 사는 것 정돈데 너무 VIP 취급을 해 준다.
“우리 회사가 은하무역 통해서 공급 받는 자재가 어느 정도 차지합니까?”
“난통전기에서 말씀이시죠? 아마 못해도 전체 매출의 20프로는 족히 될 것입니다. 취급 품목이 여러 가진데도 그만큼이니까 아주 큰손이시죠.”
“그렇게나 높습니까?”
“아몰퍼스메탈이 단가가 높지 않습니까? 양 사장님이 물량 처리한다고 시설 투자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이 정도라면 아부 받을 만하네.
오로지 회사 키워서 돈 좀 벌어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달려왔다. 뜻한 바대로 돈을 많이 벌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난퉁전기를 비롯한 여러 회사들을 먹여 살리는 거물이 돼 있었구나.
글로벌하게 놀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붕 뜨게 만든다. 난퉁전기를 넘어 장쑤성의 거물이 되리라!
오늘 난퉁전기 방문은 우리 회사 성장의 거름이 될 수 있다.
중국의 경제 성장은 변압기 업계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토종 기술과 토종 자재로 만들었던 변압기에 중국산이 야금야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중국산과 가격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생산을 포기한 자재가 나오기 시작했고, 국내 생산 명맥만 유지한 자재도 적지 않다.
중국 업체들은 그 틈을 노려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난퉁전기도 그중 하나이다. 지금까지 돌아봤던 중국 공장들과 달리 공장다운 모습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보조금 장사보다는 부지런히 제품 생산해서 파는 곳 말이다.
내 도움으로 독립에 성공한 박민창 사장의 도연테크나, 우리 회사 첫 자회사인 ODI가 한국의 난퉁전기가 됐으면 좋겠다. 자재 분야에서도 성공하려면 잘 보고 배우자. 난퉁전기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김 사장이 배움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난퉁전기 양 사장과는 형제처럼 지내시는 모양입니다?”
“늘 그렇지만, 처음엔 만나 주지도 않았죠. 자꾸 찾아와서 문 두들기니까 마음의 문을 열더군요. 중국 사람들은 한 번 문을 열면 그다음부터는 탄탄대로예요. 물론, 사장님께서 저를 선택해 주셨으니까 가능한 일이죠.”
내 도움으로 그렇게 됐다? 그렇다면 오늘은 내가 도움을 받아야겠군.
“난퉁전기가 코일이랑 시트도 하죠?”
“코일이 알루미늄 와이어 얘기하시는 거죠? 아마 변압기 만드는 것 말고는 다 할 겁니다.”
“잘됐네요. 요즘 중국산 코일이 워낙 싸게 들어와서 시장 동향이 어떤지 궁금했거든요. 중국산으로 바꾸는 업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 이번에 난퉁전기 가서 다른 품목 수입도 의논해 볼까요?”
숙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김 사장이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인다. 새로운 품목 추가로 수입 물동량이 늘어나면 김 사장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것이니, 숙취 따위야 한 방에 날릴 수 있겠지.
“김 사장님은 우리나라에서 코일 만드는 회사 아십니까?”
“글쎄요. 금성전선이나 한국전선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네요.”
“네, 그 회사들 맞습니다. 근데 거긴 대기업이라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취급도 안 해 줘요. 가격도 비싸고.”
“그럼 어디서 자재를 공급 받습니까?”
“유진전선이라고 중견 기업 하나 있는데, 거기가 전량 공급합니다. 대기업은 대기업끼리 놀고, 중소기업들은 유진전선하고 거래하는 식이죠.”
“그 유진전선이 단가를 맞춰 주니까 변압기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겠군요?”
“그렇죠. 금성이나 한국전선에 비하면 훨씬 싸고, 소량도 공급을 해 주니까요. 근데 중국산이 들어오면서 유진전선이 요새 많이 힘들어한다고 하더군요.”
유진전선 대리점 계약을 따낸 도연테크 박 사장이 중국산 코일이 많이 들어오면서 거래처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kg당 500원 가까이 차이가 나 버리니, 신토불이 국산 사랑이래도 중국산에 눈이 돌아갈 수밖에.
“가격 차이가 나긴 하는데, 품질이 많이 떨어져서 유진전선 쓰는 회사가 여전히 많긴 하죠. 대한전력 납품은 한 번 문제 생기면 큰일 나니까 좀 비싸더라도 품질 보장된 자재를 쓰는 것이 맞긴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난퉁전기 갔을 때 마당 한편에 구리선 엄청 버려져 있던데, 불량이었나 보네요.”
“아마 구리가 아니고 알루미늄 선을 코팅한 걸 겁니다. 알루미늄은 코팅해서 써야 하는데, 중국은 아직 기술이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이참에 난퉁 양 사장과 그쪽으로 얘기를 해 보시죠? 난퉁전기가 코일 수출은 안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품질이 이상 없으면 수입도 검토해 보시죠?”
그저 돈 버는 사업가라면 당연히 그러고 싶다. kg당 500원 차이면 변압기 제조 원가를 1~2퍼센트를 내릴 수 있다. 거래업체 하나 바꾸는 것만으로 10~20억 원이 떨어지는 것이니, 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생긴다. 코아 단가 낮추려고 일제 B급 코아 도입을 생각했다가 관둔 것과 같은 이유랄까?
“절연지나 아몰퍼스메탈은 국내에서 생산을 하지 않으니까 상관이 없는데, 국산이 있는 자재까지 중국산으로 바꿔야 하냐는 고민이 있긴 합니다.”
“하하. 사장님이나 저나 한창 나이 때 IMF를 겪은 사람이라면 알게 모르게 수입에 대해서 꺼리는 그런 게 있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전날까지 같이 말뚝박기하며 놀던 친구가 갑자기 전학을 가 버린 충격, 아빠가 출근하지 않고 소주병을 벗 삼던 모습. 철없던 학창 시절에는 나라가 망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 못했다.
“오랜만에 들어 보네요. 하하. 제가 그때 중학생이었는데 집에 돈이 없어서 힘들긴 했죠. 민희야, 너 IMF 알아?”
“그럼요! 당연히 알죠. 국제통화기금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 우리나라 외환위기 말이야. 97년이었으니까, 벌써 20년이 다 돼 가네.”
“아, 애기 때라 잘은 모르지만, 엄청 힘들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근데요, 사장님.”
“아, 이제 출발하자고?”
나도 모르게 ‘라떼는 말이야’를 읊을 뻔했네.
10대와 20대는 미래를 얘기하고, 30, 40대는 현재를 얘기하고, 50대 이상은 과거를 얘기한다던데, 나는 벌써부터 과거를 얘기하다니. 기생충처럼 자리 잡은 꼰대 체취를 없애야겠군.
“아니요, 아니요. 코일 말이에요. 국내 판매용이랑 수출용이랑 구분해서 수출용에만 중국산 써도 되지 않을까요?”
흥선대원군 앞에 나타난 김옥균 같은 녀석! 좋은 아이디어로다. 내가 먼치킨도 아니고 미처 생각지 못한 것도 분명 있다. 그 빈자리를 직원들이 채워 주니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지!
“좋은 생각이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하나. 그렇게 하면 문제 될 부분은 뭐가 있을까?”
“음, 자재를 구분해 놔야 하니까 현장에서 싫어할 수는 있겠네요. 그럼, 자동권선기를 내수용, 수출용 구분해 놓고 서로 자재 섞이지 않도록 하면 낫지 않을까요?”
“그렇지! 거기까지도 생각해 줘야지. 아주 잘하고 있어. 우리 민희 벌써부터 풍월을 읊을 줄 아네? 상점 1점 추가. 하하.”
김옥균이 된 민희가 신 난 표정이다. 늘 신 난 표정이라 큰 변화는 없지만, 신 남의 차이가 분명히 느껴진다. 뭐든 칭찬 받는 일은 좋은 거지. 민희가 고래였으면 춤을 췄을 테야.
“사장님, 감사합니다. 상점 다 해서 2점입니다. 헤헤. 이게요, 중국 수출이 그렇게 많이 남는 것이 아니잖아요? 중국 도움으로 마진 높이면 또이또이 아닌가 싶어서요.”
“잘 생각했어. 콩 삶는 데 콩깍지를 태운다, 이 말이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
삼국지도 안 읽어 본 김옥균 같으니라고.
“자, 일단 출발하시죠. 점심은 난통전기 가서 먹으려고 하는데, 시간이 좀 빠듯하겠네요.”
숙취를 완전히 해소한 듯한 김 사장의 재촉에 발길을 창저우트란스퍼로 돌렸다. 계약도 잘했고, 접대도 시원하게 했으니 딱히 할 것이 없다. 녹차 한 잔 마시면서 선물로 준비한 발렌타인 30년 한 병 주고 오면 끝.
역시나 리춘궝 종징리와 만담은 서로 하오하오를 연발하며 마무리됐다.
검사를 완벽히 끝낸 제품을 최대한 빨리 보내 주겠다는 말로 리 종의 웃음보를 터트렸다. 호탕하게 웃으면서도 차 갖다 준 비서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리 종. 폰 노이만도 아니고 뭐.
점심 먹고 가라는 리 종의 제안을 애써 거절하고 난퉁으로 발길을 돌렸다. 리 종이 벌어다 줄 돈을 생각하니 배가 고프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