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89)
189 요리사
정적이 감도는 스위트룸에 누워 있으니 이대로 눈을 감고 싶다. 완벽한 방음을 자랑하는 방이지만, 저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평온. 마냥 즐기고 싶다.
전화 진동이 잠시간의 평온을 무너트린다. 창립기념 행사를 풍성하게 만들어 줄 초대 손님들이 도착할 시간이군.
“정수 씨! 저희 호텔 도착했어요.”
“네, 로비로 내려가겠습니다.”
금성전기 박준희 사장이다. 근데 저희?
로비에는 사장들이 한둘이 아니다. 혁신산단 변압기 회사 사장들 다 모였네, 이거. 방도 없는데, 오면 온다고 얘기라도 해 주지!
“아이고, 사장님들. 멀리까지 오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 오신다더니 어떻게 시간이 나신 모양입니다?”
“지 사장! 우리는 저녁만 먹고 갈 테니까 걱정 말라고. 겸사겸사 내일 라운딩하는 김에, 잔칫날 얼굴이나 비추려고 다들 모시고 왔네.”
자고로 잔칫날은 풍성해야 한다. 안성파워 강호창 사장이 풍성한 잔치를 위해 귀빈들 인솔자 역할을 해 줬다. 고맙습니다.
“저녁 드시고, 행사도 보고 가세요. 초대 가수도 불렀습니다.”
“아, 그래? 우리 지 사장, 돈 좀 썼나 봐? 하하.”
강 사장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사장님 좋아하는 송인도 불렀습니다.”
“하하하. 그럼 꼭 있어야지!”
호남의 명가수 송인에게 사인 받을 생각에 입이 귀에 걸린 강 사장을 뒤로하고 박 사장이 다가왔다.
“이건 뭔가요?”
“잔칫날 빈손으로 올 수 있나요? 직원들 경품 추천할 때 쓰라고 상품권 몇 장 챙겼어요. 여기 사장님들 다 같이 십시일반 했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하하.”
봉투가 꽤 두둑하다. 이번엔 박 사장이 귓속말을 건넨다.
“저 많이 냈어요. 꼭 기억하세요. 호호.”
고마운 사람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부사장님. 어서 오세요. 본부장님, 처장님, 과장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한전력 패밀리가 의기양양하게 호텔에 입성했다.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이번이 창립 2주년이지요?”
“네, 맞습니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벌써 2주년이 됐습니다.”
“이건 뭐 기네스북에 올라야 합니다. 하하. 회사 내에서도 프라임일렉트릭이 대체 뭐 하는 회사냐고 난리입니다.”
이춘배 부사장이 덕담으로 분위기를 띄워 준다. 대한전력에서도 인정받는 회사. 그 회사의 사장이 바로 나다. 기분 좋네.
“부사장님, 나는 보이지도 않나 봐?”
“아이고 형님. 언제 오셨습니까?”
강 사장과 이 부사장의 형제 상봉. 자연스럽게 변압기 사장들과 대한전력 패밀리의 교류가 진행됐다.
이런 것이 사장의 영업일 것이다. 그래서 사장은 밤낮 안 가리고 이런 자리 생기면 얼굴 비추는 것이 일이겠지.
“지 사장님!”
거물이 찾아왔다. 최대근 의원 말이다. 동네 반상회에도 얼굴 비추는 것이 지역구 국회의원의 숙명이니, 이런 큰 행사에는 당연히 와야지.
“의원님. 저녁 늦게 오신다고 하더니요.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지 사장님이 부르는데 얼굴만 슬쩍 비추고 가면 됩니까? 하하. 내가 사정상 오래는 못 있고, 잠깐이라도 앉아 있다 가려니까 이해 좀 해 주십시오.”
“그럼요. 이따 건배사 한번 멋지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치인이 왔으면 무대 인사 기회를 주는 것이 인지상정.
변압기 사장들과 대한전력 고위층, 국회의원이 한데 모여 친목을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좋은 자리 만들어 줬네.
“자, 식사하러 올라가시죠.”
올 사람은 다 왔다. 백지원 최봉숙 원장, 로타리클럽 박창규 회장, 은하무역 김상진 사장까지.
아! 딱 한 분이 못 오셨군. 우리 문자님. 요즘 조용하시던데,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립습니다, 문자님!
문자님을 그리워하는 창립기념 행사가 그 성대한 막을 올렸다. 여수 밤바다가 선비치호텔이 내품는 불빛에 환하게 빛난다. 창립기념일이란 역사적인 날을 환영하는 빛남이다.
호텔 대연회장에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뷔페 테이블이 펼쳐졌다.
뷔페는 호텔이지! 점심을 그렇게 먹고도 모자랐는지 준비한 음식 떨어지는 속도가 측정 불가할 정도로 빠르다. 넉넉하게 준비했으니 질릴 정도로 먹어라, 부어라, 마셔라.
“자, 여러분. 맛있게 식사하기 전에 오늘을 기념하는 세리머니 한번 하겠습니다. 다들 잔을 채워 주세요. 여러분이 뭘 원하는지 몰라서 다 준비했으니, 주종은 맘에 드는 걸로 정하세요.”
별로 안 웃긴 얘기에도 웃음들이 터져 나온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더없이 맘에 든다. 이제 2주년이지만, 20주년, 200주년, 이대로 쭉 나갔으면 좋겠다.
“음식 앞에 두고 시간 뺏는 것 안 좋아합니다. 시원하게 우리 캐치프레이즈 외치면서 건배하겠습니다. 자, 일은!”
“빡시게!”
“놀 때는!”
“화끈하게!”
“보상은!”
“두둑하게!”
“와!”
이제 와서 들어 보니 좀 촌스럽다. 아니, 많이 촌스럽다. 그래도 공장스럽고 중소기업스러운 것이 이 분위기에 딱인 것 같다. 역시 난 공장 감성, 중소기업 감성에 충만한 사람인가 싶네.
이렇게 건배사를 끝냈으면 좋겠지만, 귀빈 소개와 건배사 돌리기는 피할 수 없는 절차이다. 행사에 익숙지 않은 이들에게는 마냥 지루한 시간이겠지만, 귀빈들에게는 아주 귀한 시간이다.
“캐치프레이즈? 구호가 올드한 것 같긴 한데, 뜻은 아주 좋네요.”
건배사 듣느라 팔 아프게 잔을 들고 있는 사이에 박준희 사장이 귓속말을 건넨다. 정곡을 찌르는 소리네.
“하하. 좀 구리긴 해도 이런 게 다 역사고 전통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보상은 두둑하게 해 주고 있어요?”
“그럼요! 업계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내년에는 더 두둑하게 챙겨 줄 생각이에요.”
“어휴, 우리 직원들 안 뺏기게 긴장해야겠네요. 하하.”
내가 경력직 채용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벌써 돈 것인가?
예전 같았으면 저 말에 담긴 함의를 분석하고 있었을 텐데, 이제는 편히 받아들인다. 그만큼 박 사장과 긴밀해졌고, 무엇보다도 다른 회사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 회사가 저만치 앞서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수차례의 건배사가 끝나자, 귀빈들을 데리고 따로 마련된 장소에서 만찬을 열었다. 먹기보다 대화가 주목적인 만큼 대화하기 편한 곳이 낫겠다는 나름의 배려였다.
창립을 축하한다는 말, 눈부신 성장이 놀랍다는 말 등 의례적인 인사말이 몇 마디 오가면서 분위기가 달궈졌다.
오늘 다들 어떤 요리들을 해 왔는지 궁금하다. 남의 집 잔치에 오면서 빈손이면 안 되지.
대한전력 이춘배 부사장이 가장 먼저 주문한 음식을 내놨다.
“그제, 자재처장이 중전기조합 이사장한테 연락이 왔다고 얘기를 하더라고.”
“허허. 일반형 주상변압기 재고 처리 안 해 주냐고 항의하는 전화였겠지.”
“형님은 알고 계셨네? 자재처장이 엄청 불쾌해하더라고. 아니, 우리한테 돈 맡겨 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작년 입찰 계약 물량보다 더 많이 해 줬잖아?”
“우리 회사가 그래. 잘해 준 건 당연한 거라니까. 저건 왜 안 해 주냐고 욕먹는 것이 일상이야. 중전기조합을 진짜 상대해 줘야 해? 점점 정도가 지나쳐.”
“내가 우리 부사장님 신경 안 쓰게 해 줄 테니까 걱정 마러. 그놈들 관짝 들어갈 날도 얼마 안 남았어.”
“형님은 참. 고운 말 좀 쓰라니깐.”
강호창 사장과 주고받는 대화가 아주 달달하다. 이번 요리의 점수는 90점 드리겠습니다. 90점짜리 요리를 맛 봤으니, 나도 심사평 한마디 보태 줘야지.
“부사장님, 대한전력에서 재고품 구매해 준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소문이야 온갖 것이 돌지요.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이상 확정된 것은 전혀 없다고 보셔야 합니다.”
이 부사장, 저 사람 노회한 사람답다. 본인이 그 소문 퍼트려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기하는 것이 아주 리얼하다. 덕분에 중전기조합은 닭 쫓던 개 새끼 신세가 됐군. 꼬시다, 이놈들아.
“저기, 부사장님. 요새 환경단체 쪽에서 계속 난리인데, 그 PCB 변압기 교체는 서두르는 것이 안 됩니까? 이거 국회에 있다 보니까 여러 사람 얘기를 안 들을 수가 없습니다.”
최대근 의원이 준비한 요리를 꺼내 들었다.
PCBs. 폴리염화 어쩌고 하는 독성 물질이다. 예전에 낙동강을 죽음의 강으로 만든 페놀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되려나?
변압기에 들어가는 절연유에는 PCBs가 함유돼 있다. 절연성이 뛰어나 많이 사용됐지만, 1급 발암 물질로 알려지면서 지금은 아주 극소량만 허용된다. 이것 때문에 대한전력은 오래된 변압기를 빨리 교체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변압기 업체들도 그렇고 빨리 교체해 달라고는 하는데, 저희야 정해진 예산과 계획대로 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저야 당장이라도 교체해서 다 폐기하고 싶은데, 그러면 멀쩡한 변압기 버렸다고 들고일어날 것이 뻔합니다. 이게 참 골치가 아픕니다.”
“대한전력 적자 가지고도 그러는데, 언론들 또 난리치긴 하겠죠. 허허.”
“맞습니다, 의원님. 이게 또 기준이 모호한 것이 과도 함유된 것은 이미 다 교체했고, 남은 것은 기준치보다 약간 높긴 해도 큰 문제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 정도야 조금 기다려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부사장님, 대한전력 교체 계획이 25년까지로 돼 있지요?”
“네, 맞습니다. 의원님. 원래 30년까지였던 것을 25년으로 줄였습니다. 근데 환경단체는 당장 다 교체해야 한다고 난리지 않습니까? 사용 연한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그걸 내다버리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용 연한도 업계 챙겨 준다고 20년에서 17년으로 줄여 주지 않았습니까?”
최 의원과 이 부사장 대화에 강 사장이 슬쩍 발을 들이밀었다.
PCBs 문제가 거론된 것은 재작년부터로, 대한전력은 부랴부랴 변압기 교체한다고 변압기 발주를 늘리고 있다. 매년 10만 대 내외를 추가로 발주해 2025년까지 PCBs가 기준치 이상 함유된 변압기를 전량 폐기하겠다는 계획이다.
그 계획도 작년 부천 변압기 폭발 사고 이후 크게 달라진 것이다. 내가 SPRD를 개발하면서 대한전력이 변압기 안전과 환경을 고려한다는 취지로 기간을 줄이고 범위를 확대해 시행하고 있다. 그 덕에 내가 오지게 재미를 보고 있지. 후훗.
환경단체들은 서둘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솔직히 이 바닥도 환경단체들이 더 목소리를 내주길 바라는 눈치다. 그래야 변압기 발주가 늘어나기 때문이겠지.
강 사장은 그걸 알면서도 이 부사장 편을 들어 준다. 협상 전략일 수도, 아니면 친분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의원님도 아시겠지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전국 돌아다니면서 변압기 뜯어서 절연유 조사하고 우선순위 정해서 변압기 교체하는 것도 일이고, 또 수거한 폐변압기 처리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현장의 목소리와 외부의 목소리는 많이 다른 법이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원님. 환경부에서 지원금이라도 주면 모르겠는데, 아시잖습니까? 대한전력 돈 많으니까 알아서 해라, 이겁니다. 그래 놓고 적자 나면 국민 혈세 운운하면서 얼마나 혼을 냅니까? 하하.”
대한전력 대주주가 정부라고 해서 세금이 들어가진 않는다.
언론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말들이 혈세 타령이지. 대학에서 배울 때 기사는 객관적인 단어를 써야 한다고 하는데, 어찌 된 것이 세금보다 혈세가 표준어가 된 듯하다. 승려가 아닌 스님, 노인이 아닌 어르신 등등.
이쯤에서 내가 타협안을 제시하면 되겠다 싶다.
“의원님께서 제도적으로 지원방안을 마련해 주시죠. 그러면 대한전력도 명분이 있으니 교체를 서두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 사장님, 말씀 잘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산업계 발암물질 사용에 관한 법안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정부의 지원도 포함돼야지요. 안전도 그렇지만, 환경도 마냥 돈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자체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만들어야지요.”
내가 뿌린 조미료에 최 의원이 화답하자, 이 부사장도 반기고 나섰다.
“의원님께서 노력해 주시면 저희도 발을 맞춰야지요. 일단 회사 들어가면 교체계획 다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환경과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말이죠. 하하.”
안전과 환경은 돈이 된다. 내가 예전에 이 부사장 만나서 했던 얘기 같네.
아직 가시화되지 않겠지만, 움직임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 돈이 되겠군. 교체해야 할 변압기 엄청나니, 당분간 관수 변압기 시장은 짭짤하겠다.
최 의원의 요리는 아직 미완성이니 85점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