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88)
188 역사적 그날
가을을 알리는 9월이 찾아왔다.
이번 여름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을 충격과 공포를 줬으니, 이제 그만 물러가길 바랄 뿐이다. 내년, 내후년에 이런 여름이 또 찾아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제발. 부디.
그 혹독한 여름을 내보낸 9월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달이다. 대한전력 새 입찰이 시작되는 달이면서도, 우리 회사가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디딘 달이다.
기분 같아서는 한 달 내내 잔치를 벌이고 싶지만, 아직까지 그리 팔자가 좋진 않다.
여전히 만들어야 할 변압기는 산더미 같고, 만들기 무섭게 내보내야 한다. 변압기뿐이 아니다. 설비도 정신없이 만들고 있고, 각종 자재도 연일 매진 사례다.
일이 많다는 것은 좋은 징조이지만, 그래도 역사적인 9월을 일만 하며 보내기는 너무 아쉽다. 그리하야 직원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오션뷰가 끝내주는 호텔을 잡았다. 가자! 여수로!
“박 대리, 고생했어.”
“아닙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급하게 추진한 행사였지만, 객실 130개짜리 호텔 하나를 통째로 빌릴 수 있었다. 박아름 대리가 부리나케 달리고 전화기 붙잡으며 노력한 결과다.
“미안해. 내년에는 여유 있게 추진할게.”
“그래 주시면 고맙죠.”
박 대리가 지금까지 중에 최고로 아쉬운 소리를 한다. 꽤 힘들었던 모양이네. 고생한 덕에 직원들 신 나서 난리 났으니, 그걸로 위안은 삼도록.
야금야금 충원하다 보니 직원 수가 150명을 넘어 170명까지 늘어났다. 거기에 가족까지 포함시켰더니 220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이 여수를 점령하려 달려들었다.
“초대한 사람들은 뭐래? 다 온다고 해?”
“최대근 의원님은 저녁 늦게 잠깐 와서 인사만 하고 간다고 하셨고, 대한전력 이춘배 부사장님은 영업본부장님이랑 배전계획처장님 이렇게 와서 저녁 먹고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혁신산단 분들은 일 때문에 어렵다고 하네요. 다른 분들은 다 오신다고 하셨어요.”
“진짜 고생 많았어. 미안한데, 못 오는 분들한테는 기념품이라도 잘 챙겨서 보내 줘. 이것까지만 부탁할게.”
역사적인 날을 우리만의 잔치로 끝낼 수 없기도 했고, 객실이 14개가 남아서 지역 축제로 격상시켰다. 우리 회사가 이렇게 크는 동안 여러 가지로 도와준 사람들한테 공양이라도 해야지.
귀빈들끼리 모여 밥 먹고 술 마시며 얘기하다 보면 새로운 기회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오겠다는 귀빈들도 그럴 바라는 것일 수도 있고.
직원들은 저들끼리 신 나게 놀게 내버려 두고 난 귀빈이나 접대하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직원들과 격의 없이 보내는 사장이라도 직원들 노는 자리에 껴 있는 건 눈치 없는 짓이니깐. 젊은 직원들 마음껏 놀라고, 내가 노인네들 다 데리고 놀아 줘야겠군.
창립기념일인 1일 아침부터 공장이 왁자지껄하다. 트레일러와 화물차만 들락거리던 마당에 전세 버스가 줄줄이 들어왔다. 수학여행 가기 전 학교 운동장에 가득했던 설렘을 공장 마당으로 옮겨 온 듯하다.
직원들은 아침부터 신 나서 체력을 소모하고 있다. 수학여행 갈 때도 타라는 버스 안 타고 운동장에서 웃고 떠들던 애들이 꼭 있었다. 우리 직원들도 어찌나 신 났는지 버스 타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이벤트 넉넉하게 준비했으니 부디 지금의 텐션 쭉 이어 가길. 나 돈 많이 썼다. 본전 뽑으려면 넋 나간 듯이 놀아 줘야 한다. 알았지?
여수까지 기어가도 2시간. 여유 있게 출발하니 딱 점심시간이 맞아떨어졌다.
여름 아니면 제 맛을 못 느낀다는 여수의 명물, 하모 샤브샤브가 점령지 첫 식사다. 인원이 많아 식당 하나로는 어림도 없어 5곳에서 갯장어 소모전을 벌였다.
이번 행사의 테마는 ‘럭셔리’이다. 노는 데 돈 아끼지 말자는 일념 아래,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
하모 샤브샤브, 1인분에 5만 원 가까운 값비싼 메뉴이지만, 돈은 쓸 때 제대로 써 줘야 한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돈 쓰는 맛을 느끼겠는가!
“공장장님 많이 드시고 만수무강하십시오.”
“허허. 이거 말로만 들어 봤는데, 이제야 맛을 보네. 상철아! 벌써부터 달리면 어쩌자는 거냐?”
주도가 이상철 이사는 밑반찬만으로 이미 소주 반병을 비웠다. 이 노인네들을 밤까지 내가 다 떠안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오늘 술을 얼마나 마셔야 하려나.
“형님! 아니, 왜 방을 따로 잡았어? 우하하.”
백지원 최봉숙 원장도 기꺼이 와 준다고 해서 객실 하나 내줬더니, 그 사실을 알고 이 이사가 공장장을 안주 삼는 중이다. 공장장 안주만으로 소주 반병은 또 거뜬할 것 같다.
“애들도 많은데 대낮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이럴까 봐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더니, 역시나야. 덕준이 이놈! 다 네놈 때문이야!”
공장장과 최 원장의 열애설을 세상에 알린 용감한 기자 한덕준 부장. 당분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덕준아, 오 기자는 안 온대?”
“에이, 일하는 사람이 어케 와? 내가 그래서 오늘은 그냥 일하고 내일 가는 걸로 하자니깐.”
“그러면서 왜 객실은 혼자 쓰겠다고 그 고집을 부린 거야?”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것 아니겠어? 오션뷰라잖아. 흐흐.”
“그래, 장어 많이 먹어 둬라.”
여기저기서 소주 시키는 소리가 요란하다.
하모 샤브샤브, 이거 아주 죽인다. 갯장어 씹히는 식감이 예술이다. 쫄깃쫄깃하면서도 가시가 살짝 씹히는 것 같은 오묘한 식감. 소스 살짝 찍어서 깻잎에 한 점 올리고 부추 얹어서 싸 먹으니, 이건 욕이 절로 나온다. 개운한 국물은 술을 절로 부른다.
“이 이사님, 국물 너무 잡수지 마세요. 이따 칼국수 해 먹어야 합니다.”
“아니, 술이 이리 남았는데 국물 없이 어찌 마셔! 내가 돈 더 낼라니까 더 시켜. 이야, 이거 국물 죽이네.”
“에이, 서울 촌놈아. 신 났어 아주.”
“형님도 처음 먹는 거면서 왜 난리야? 잔말 말고 술이나 받어.”
모두가 신 났지만, 술꾼들은 유독 더 신 난 것 같다. 나같이 술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도 술이 절로 당길 정도니 오죽하겠나.
칼국수에 볶음밥까지 요란하게 먹고 나니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보인다. 여수 밤바다라고들 하지만, 배부른 채로 바라보는 여수 낮바다도 아주 좋다. 역시 사람은 배가 부르고 봐야 한다.
“형님, 우리는 여기서 좀 더 마시고 가자고. 이거 안주가 너무 남았어.”
“이놈아! 안주 다 먹고 나면 술 남았다고 더 먹자고 할 것 아녀?”
“하하하. 형님 아주 점쟁이 다 됐네! 알면서 뭘 그래. 일단 앉아 봐. 재준이! 넌 인마 어디 갈라고!”
저녁 먹기 전까지 여수 이모저모를 만끽하라고 1인당 10만 원의 용돈과 자유 시간을 줬다. 다들 신 나서 여수 구경하러 가겠다고 떠났는데, 이 영감들은 질기게 남아서 알코올 섭취를 부르짖는다.
“유 이사님은 봐주시죠. 가족들 다 데리고 왔잖아요. 그러게 이사님도 가족 데리고 오시지 그랬어요?”
“이 좋은 날, 이 좋은 곡차를 놔두고, 내가 구박 받으면서 물이나 마시고 있어야겠어? 하하하.”
술꾼들 아주 제대로 날 잡았다. 공장장에게 이 이사를 양보하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어설프게 있다가 잡히면 대낮부터 네발로 걸어 다닐 것 같았다.
“사장님! 저희랑 같이 놀아요!”
“이것들이 내 지갑 털어먹으려고!”
민희가 팔짱을 끼며 나를 납치해 갔다. 나름 같이 중국 출장도 다녀오며 친해진 사이라 그런지, 납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붙임성 좋은 친구는 이럴 때 좋긴 하지.
납치범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붙었다. 사무실 여인네들, 귀가 아플 정도로 수다를 떨어 댄다.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이럴 거면 왜 데리고 간 거야?
“사장님! 저희 아쿠아리움 가요!”
내 이럴 줄 알았다. 5시 내고향 단골 코스인 향일암 한번 올라가고 싶었는데, 수다쟁이 전사들의 위력에 끌려가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돈도 왕창 뜯기겠군.
누가 보면 일부다처제가 허용된 나이지리아의 돈 많은 사업가라고 생각할지도. 독재자 비자금 세탁을 도와 달라는 이메일을 보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사장님! 민희 이쁘지 않아요? 애가 싹싹하고 넉살도 좋아요. 어때요? 연결 좀 시켜 줘요?”
김지연 대리가 포문을 열었다.
황미연 사장 후임으로 들어와서 커플 매니저 역할까지 고스란히 인수인계받은 모양이지? 이제 내성이 생겼다 싶었는데, 사회 초년생을 들이미는 근본 없는 매칭에 어안이 벙벙하다.
“호호. 나이 차이가 좀 나긴 해도, 사장님이라면 얼마든지 오케이죠. 사장님, 고마운 줄 아세요. 근데 언니가 먼저 아니에요?”
민희가 능글맞게 받아치며 나를 김 대리한테 보낸다.
꺄르르, 깔깔깔. 온갖 웃음소리가 엑스포공원을 뒤덮는다. 내 한 몸 희생해서 직원들을 웃게 만든다면, 얼마든지 조리돌림당하리라.
“어머어머. 쟤 홍철이랑 혜정이 아니니?”
“언니 몰랐어요? 쟤네 둘이 사귀잖아요! 우리 회사 첫 컴퍼니커플이에요.”
“3년 채우고 적금 타면 식 올리겠다고 하던데요.”
수다쟁이들 옆에 있으니 회사 온갖 경조사들이 귀에 접수된다. 아주 끝내주는 정보원들이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직원들 사찰하는 꼴이 됐네.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것이 경조사이다. 회사를 오래 다닌 것도, 다른 회사를 많이 아는 것도 아니지만, 어설픈 경험으로 보자면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많은 중소기업들은 경사보다 조사가 많다. 직원들 연령대가 높다 보니 양가 부모들이 소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평균 연령이 20대인 우리 회사는 조사보다 경사가 많을 것이다. 일하다가 부고장 보고 그날 저녁 장례식장 달려가는 것보다는 주말에 차려입고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니, 여기 웨딩홀 뷔페 괜찮네 운운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대리님! 대리님 결혼하면 제가 축의금 천만 원 쏘겠습니다.”
“성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호호. 저 비혼주의인 거 알면서 그러신다.”
“언니! 나 같으면 천만 원 받고 결혼한다.”
“그래요, 언니. 더 늦어지면 애 낳기 힘들대요!”
“이년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주.”
호호호, 깔깔깔. 괜히 말 한마디 걸었다가 이 전사들 말문만 더 트게 한 것 같다. 아휴, 귀 아파라. 과묵한 박 대리랑 단둘이 걸어 다니고 싶다.
“박 대리. 친구들 섭외는 잘되고 있어요?”
“섭외요? 아, 네. 경쟁자가 많아서 신중하게 추리고 있습니다.”
“그 정도에요?”
“우리가 학교 모임 갈 때마다 회사 장난 아니게 좋다고 떠들고 다니거든요. 서로 오겠다고 그래요!”
박 대리 1년 후배로 자재과 부사수로 일하고 있는 최진아도 수다질에 참전했다. 재무과 1번 부사수 박설아도 가만있지 않는다.
“사장님! 저 아는 애들 중에도 괜찮은 애들 있는데, 데려올까요?”
“괜찮다는 게 우리 사장님하고 잘 어울린다는 얘기지? 미연 언니가 나한테 신신당부했어. 우리 사장님 연애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몸매 장난 아닌 애 하나 있는데, 얘기해 볼까요? 걘 아주 남미 쪽이에요.”
“사장님은 얼굴 많이 보는 것 같은데, 혹시 슬라브 계통은 없니?”
또 호호호, 깔깔깔. 한두 마디 내던지고 다섯 배 정도는 귀로 받아 내니, 엄청난 수익률이다. 아쿠아리움에 물고기 구경하러 온 건지 수다 떨겠다고 온 건지 모르겠다.
회사에서야 일하면서 서로 언쟁도 하고 감정 상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놀러 와서 허물없이 얘기하고 지내는 것을 보니 동료애가 꽤 진득하구나 싶다. 직장에서도 저 모습을 유지하도록 스트레스 없는 직장 만들기에 매진해야겠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여인천하 속에서 기 왕창 빨리고 기진맥진한 채로 호텔에 도착했다.
객실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펼치진 다도해가 예술이다. 사장이라 딱 하나뿐인 스위트룸을 배정했다고 그리 강조하더니, 역시 스위트룸이다. 석양으로 화장한 바다 빛이 창문에 드리워지며 룸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다. 넓고 조용한 객실. 귀가 평온을 되찾았다.
이대로 침대에 누워서 풍경과 정적을 즐기고 싶다. 이제 본격적으로 불타는 밤이 찾아올 텐데,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할 수 없지.
자, 프라임일렉트릭 탄생 2주년의 역사적인 날. 그 밤을 즐겨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