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87)
187 보여 줄게
동 뜨기 전 잠깐 말고는 하루 종일 더웠고, 하루도 쉬지 않고 더웠던 날씨가 8월이 끝나 가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이제 좀 살 만해지겠다 싶었는데, 이놈의 삼천리금수강산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기온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져서 가을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이 경이로운 변덕을 견디고 사는 이 땅의 민초들이 더 경이로울 따름이다.
뜨거웠던 여름만큼이나 여의도도 연일 시끄럽고 뜨거워지고 있었다. 4월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압승할 것이란 전망이 부끄러울 정도로, 야당이 대승을 거두면서 정치 지형이 꽤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엄청난 비리가 터질 것이란 말들이 많았다.
시끄러운 서울만큼이나 나주 혁신산단도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시끌벅적했다. 연일 진행되는 공장 건설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 공장을 들락거리는 트레일러와 화물차 때문이기도 했다.
수출품 첫 납품을 무사히 끝내고 나자, 수입처는 ‘하오하오’를 외치며 대단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 만족감은 발주 지속으로 이어졌다. 세 업체 통틀어 한 달에 7천 대 정도는 주문해 주면서, 우리 공장은 혁신산단의 시끌벅적함을 배가시켰다.
여기저기서 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재무팀은 혼이 나갈 정도로 바빠지고 있다. 바빠서 염색도 못했는지 흰머리가 살짝 보이는 김지연 대리가 안쓰러울 정도다.
“김 대리님, 제 방에서 차 한잔하시죠?”
“지금요? 네, 알겠습니다.”
바쁜데 왜 말 거냐는 표정이다. 직원을 두 명이나 더 붙여 줬는데도 세 업체 모두를 관장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겠지.
김 대리가 오기 전에 서둘러 캡슐커피를 내리고 얼음 동동 띄웠다. 커피 마시기 참 편해진 세상이다. 회사에서도 이렇게 커피전문점 냄새가 나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말이다.
“대리님, 많이 바쁘죠?”
“어휴, 말도 마세요. 본사 것만 해도 바쁜데, 오디아이랑 태인산업 것까지 하려니 정신없어 죽겠어요.”
“이거 어쩌죠?”
“왜요! 회사 더 세우려구요? 아휴, 이젠 돈 들더라도 각자 하는 걸로 해요.”
아무래도 내 얼굴에는 할 말이 쓰여 있나 보다. 아니면 내가 귀신들이랑 일하고 있거나.
“처음에야 경비 줄인다고 지금처럼 했는데, 앞으로는 각자 독립 경영하도록 해야죠.”
“근데 뭘 또 나누시려고 그러세요?”
“올해 매출 예상해 보니까 본사랑 오디아이는 천억 가까이 나오겠더라구요. 맞죠?”
“본사는 천억은 확실히 넘기죠. 7월까지 900억 정도했고, 앞으로 300억 정도 더 나올 테니까 말이죠. 오디아이는 음, 천억은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요.”
진짜 올해 어마무시하게 벌었다. 창업 첫해 석 달 동안 겨우 10억 매출 올렸던 회사가 작년에는 302억을 찍었고, 올해는 빵 터져서 2,500억을 바라보게 됐다.
이렇게 되리라 예상을 했지만서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창업 3년차에 2,500억 매출을 찍었다면 누가 믿겠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우리 회사는 급격한 성장을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다. 이 바닥에서야 날고긴다지만, 지금의 보호막이 없다면 버틸 수 있을까? 문자님이 있으니 잘되겠지만, 자력으로 크는 것이 좋겠지.
그래서 보호막이 여전히 있어야 한다. 중소기업으로 계속 인정받는 것이 그 보호막이다. 그래야 변압기 계속 만들어 팔 수 있다. 우리 업종은 매출 천억이 기준이니, 또 쪼개야 한다. 3년 평균 천억 이상이지만 미리 준비해 두자고.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매출 천억 밑으로 맞춰야 해요. 중소기업 인정 못 받으면 민수고 관수고 납품 못하잖아요.”
“그건 그러네요. 그럼 늘 계획하던 대로 설비제작부 독립하고, 외함제작부도 분사하면 되지 않을까요?”
“네, 맞습니다. 거기다 변압기 제작도 나눠야 해요. 관수 매출이 워낙 높아서 여차하면 천억 넘겠더라구요. 민수도 보내고, 수출도 보낼 생각입니다.”
쪼갤 수 있는 것은 다 쪼개야 한다. 서류상으로만 쪼개는 것은 편법이지만, 분사해서 독립 경영을 보장하면 선진 경영 기법이다. 난 이제 진짜 회장님이 되겠네.
“뭐 제가 경영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할 것은 아니지만, 변압기도 나누면 여러모로 불편하지 않을까요? 낭비되는 것도 있을 테구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래도 각자 다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이 있으니까 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장님이 손만 대면 대박이니까 잘되겠죠. 호호.”
“그래서 말인데, 대리님이 TFT 꾸려서 일을 맡아 주세요. 분사 계획 스왓 분석부터 타임 테이블까지 잡아 주세요. 올해 내로 준비 끝내고 내년부터 이행할 생각입니다.”
“제가요?”
김 대리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 그래도 바쁜데 뭘 또 시키냐는 눈빛보다는 일개 대리가 그런 중책을 어찌하냐는 눈빛이다. 직책이야 대리지만, 사무실 수장으로 지금껏 일 잘해 왔으면 중책을 맡는 것이야 당연하지.
“매번 승진 인사하는 것이 우스워 보여서 안 하고 있었는데, 대리님은 이미 부장급이나 마찬가지예요. 부담 갖지 마세요.”
“아, 네. 뭐 부담은 부담이긴 한데, 다른 직원들이 별말 안 하고 따를까요?”
“하하. 대리님이 사무실 왕고잖아요! 그리고 사장이 지시한 일인데 누가 뭐라 그럽니까? 그런 사람 있으면 저한테 데려오세요. 다들 일 열심히 하는 직원들이니까 종종 고기 사 먹이면서 플랜 잘 만들어 주세요.”
“네에, 알겠습니다. 해 볼게요. 근데, 그…….”
저건 직원 더 뽑아 달라는 압박 같은데? 이쯤 되면 나도 귀신의 경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
사무실 관리직 6명.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사무실 헤드헌터인 박아름 대리한테 인재 좀 구해 오라고 해야겠군. 박 대리가 데려온 해외영업 담당 유민희와 자재 부사수 최진아는 아주 일 잘하고 있다. 재무 쪽 신입들과도 신경전 안 부리고 말이다.
“네, 알죠. 압니다. 직원은 계속 충원합니다. 걱정 마세요. 그리고 직원들 회식도 자주 해 주세요. 우리 회사 돈 많은 것 알죠?”
“네, 호호. 어쩜 우리 사장님은 제 맘을 그리 잘 알아주실까나. 이럴 때마다 막 마음이 설렌다니까요.”
가끔씩 김 대리가 선보이는 능청스러움이 꽤 부담스럽다. 빨리 내보내야지.
“커피 다 마셨으면 가서 일하세요.”
“호호. 사장님은 꼭 이러면 부끄러워하시더라. 그래 가지고 연애하겠어요?”
“아아아아.”
귀를 막고 안 들리는 시늉을 했더니 호탕한 웃음만 남기고 사장실을 떠났다. 우리 회사 귀신들 틈만 나면 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세.
먹이사슬이란 것이 나만 당하는 구조로 만들어지진 않는다. 나도 누구 하나 잡아먹으러 가야겠다.
“공장장님! 해장 좀 하셨습니까?”
“어휴, 어제 너무 마셨어.”
“어제 집으로 가신 것 맞죠?”
“에이, 아침부터 왜 그래. 나 같은 영감탱이가 이 나이에 술 먹고 그 뭐. 되겠어? 어? 허허허.”
연애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양새로군. 이러면 재미없는데.
“왜 또? 아침부터 나 갈구러 온 거야?”
“공장장님 갈굴 일이 뭐 있습니까? 우리 순진한 공장장님 꼬드긴 최 원장님한테 뭐라고 해야죠. 하하.”
“그러지 마. 그 사람 말이야, 이날 평생을 봉사만 하며 산 사람이야. 늘그막에 인생 사는 재미 좀 느껴 보겠다는데 그러는 거 아니야.”
갑분싸. 웃자고 한 말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저 심리는 뭐지? 공장장 아주 폴인러브하셨군. 예쁜 사랑 방해 말고 응원이나 잘해 줘야겠네.
“네에. 서로 행복하게 지내시실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만날수록 느끼는 건데, 사람이 참 괜찮더라고. 성품이 착해. 요즘 말로 볼매라고 하나? 하하.”
“요즘은 그런 말 안 씁니다. 여튼, 공장장님한테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나한테? 그래, 무슨 일이 또 우리 사장님 골치를 아프게 하는고?”
분사야 쉬운 일이다. 정말 어려운 일은 적합한 인재를 찾는 것이다.
외부 인사 영입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회사 초기부터 고생한 직원들에게 성취감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짬밥 됐다고 사장 자리 앉히는 것도 정도는 아니다.
“누가 사장감으로 적당한지 논의 좀 하려구요.”
“허허. 회사가 커지니 별게 다 신경이 쓰이는구만. 그냥 자네가 다 맡으면 안 되나? 자네 같은 능력자가 회사 여러 개 맡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그리고 뭐 말이 회사 여러 개지, 원래 다 하나였던 회사잖아?”
“그러면 회사가 안 큽니다. 사무적인 일이야 하나로 할 수 있다지만, 기술적인 것까지 전문적으로 하기는 힘들잖아요. 저 같은 선무당보다는 테크니션들이 맡아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이고야. 우리 사장님 정도면 최고지. 아니, 어디 가서 물어봐. 창업 2년 만에 회사 키운 사람이 또 있냐고?”
그건 그렇다. 아주 잘 풀려 봐야 민수, 관수 합쳐서 매출 100억 정도면 대박이겠거니 했는데, 이거 뭐 허위 공시로 고발당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실적을 내고 있으니 말이다.
“뭐 그게 저 때문입니까? 공장장님이나 김 사장님이나 유 이사님이나 다들 고생해서 낸 성과죠. 저 민망하니까 띄워 주기는 이 정도로만 하고, 누구 적당한 사람 없겠습니까?”
“사장 자리라는 것이 능력만 좋다고 앉힐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그 뭐라 그러나? 정치질? 암튼 그런 것도 있어야 한다고.”
“정무 감각 말씀이시죠?”
“어, 맞아 맞아. 정무 감각. 사람이라는 게 같이 일하다가 누가 사장 됐다 그러면 잘됐다고 박수 쳐 주는 것이 아니라 시기하고 질투하는 경우가 많다고. 황미연이 사장 임명할 때야 창업 멤버나 마찬가지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안 그렇다고.”
“이제는 이것저것 따져야 한다는 것이죠?”
역시 우리 공장장이다. 본인은 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다며 일자무식이라 하고 다니지만, 내가 봤을 땐 우리 직원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 작년과 올해가 또 다르다는 것을 정확히 집어 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선장이 됐으면 싶어. 나도 젊게 산다고 생각하고 살지만, 젊은 사람들을 못 따라가. 나 같은 늙은이들이 보조를 맞춰 주면 되니까, 젊은 사람이 올라갔으면 하는데, 직원들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하겠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경험을 더 쌓아야죠. 제가 덕준이 계속 굴리는 것도 경험 쌓으라고 그러는 거거든요. 아직은 좀 이르다고 봅니다.”
“그 말도 맞네.”
회사가 급성장하면서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간부진이 너무 얇다는 것이다. 제조업 특성상 위계질서가 잘 잡혀 있어야 하는데, 갓 입사한 1~2년차는 잔뜩인 데 반해, 중간 간부들이 부족한 실정이다.
중국발 무역 훈풍을 타고 급성장하며 30대 대기업까지 진입한 한 그룹은 너무 빨리 성장하다 보니 30대 부장들이 넘쳐 났다. 입사 3년 만에 과장 다는 일도 흔했고. 꼭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 그룹은 미국발 금융 위기 파고를 넘지 못하고 공중 분해됐다.
우리라고 그런 일이 안 생길 수 없겠지.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겠지.
그렇게 공장장과 한참을 두고 직원들 품평회를 이어 갔다. 점심 먹고도 계속된 품평회 끝에 결론이 났다. 순리대로 가기로 말이다.
“어차피 자네가 체크할 것 아닌가? 무난하게 하자고. 그리고 돈이 좀 들더라도 경력자들 좀 더 데려오고. 지금 직원들도 이제 베테랑 다 됐지만, 그래도 경륜을 무시 못하는 법이네.”
“그렇게 하시죠. 아마, 중전기조합 쪽 회사들이 긴축 들어갈 겁니다. 꽤 쏟아져 나오겠죠. 평판 좋은 사람들로 추려서 데려오죠. 참! 태양전기 출신은 빼고요.”
“하하. 참! 저번에 박진호가 왔다면서?”
“늘 하던 대로 잔뜩 거들먹거리더니 결국 하는 소리가 여기 와서 일 좀 하겠다는 거더라구요. 들은 척도 안 했죠.”
“잘했어. 그놈 아주 싹수가 노란 놈이야. 밥벌이 없어지니까 여기 와 놓고, 대놓고 아쉬운 소리는 못하겠으니 시건방을 부렸던 모양이구만?”
“거기 사람들이야 속속들이 알지 않습니까? 하하. 여튼 공장장님도 레이더 풀가동하면서 괜찮은 사람 있다 싶으면 그냥 일단 데려오세요.”
“그려그려. 그건 걱정 마. 내가 또 이 바닥 인맥이 좀 화려한가? 하하.”
프라임일렉트릭 그룹의 3년차는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그래야 한다.
보여 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 보여 줄게, 훨씬 더 잘나가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