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
002 희망이 보인다
“안녕하십니까. 생방송 대박 로또의 김욱입니다.”
운 좋게 로또 생방 시간을 맞췄다. 한자리 하는 높은 사람이 나와서 로또 기금이 이렇게 좋은 곳에 쓰인다며 어색하게 설명하는, 아무도 관심 없는 시간이 지나고 로또 공이 돌기 시작했다.
“38입니다.”
에잇. 초장부터 나가리다. 어떻게 하나가 안 맞냐. 이번 주도 소외 계층을 위해 거액을 기부했구나. 담배나 한 대 피우자.
옥탑방의 매력이다. 문 열고 나가면 야경을 바라보며 운치 있게 담배를 피울 수 있다. 운 좋으면 별도 볼 수 있다. 어렸을 때 옥상에 올라가 별을 보며 나만의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별을 보며 희망을 그리고 꿈을 노래했던 나.
이룰 수 있다. 이룰 수 있다.
“어? 맞다!”
웬 미친놈이 보낸 문자가 떠올랐다. ‘쓰레빠’가 찢어질 정도로 거칠게 방에 들어와 급하게 검색했다. 모니터 화면에 나온 이번 주 로또 결과와 문자를 맞춰 봤다.
“씨이발.”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하지만, 진짜 커 보이는 떡은 눈앞에서 놓친 떡이다. 큰 화면과 작은 화면에 출력된 숫자 6개는 놀랍게도 일치했다.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 문자 온 시간이 7시였다. 로또를 사고도 충분히 남을 시간이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죽자, 죽어. 니코틴 가래탕 몽땅 마시고 죽자.
밀려오는 허무함에 마냥 현자 타임을 보냈다. 1등이면 17억이다. 17억! 한 달에 고작 140만 원 남짓 받는 내가 17억 원을 그냥 날린 것이다. 하아.
그 돈이면 이 거지 같은 회사 때려치우고 내 꿈을 위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 텐데! 내 회사. 마구 성장하며 드높은 사옥 빌딩도 세우고 말이야. 하아. 허무하다, 허무해.
늘 희망을 노래했지만, 보이지 않는 희망에 나도 모르게 쭈글쭈글해지고 있었다. 내가 왜 이리 됐나 한탄했지만, 현실의 벽은 아주 높았다. 그 높은 벽을 거뜬히 넘어갈 수 있는 사다리를 발목이 삘 정도로 걷어차 버린 격이다.
대학 때 읽었던 ‘사다리 걷어차기’가 감명 깊었나? 내가 걷어차 버릴 줄이야. 아오! 내 잘못이 아니지만, 마냥 자책하고 싶었다.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A급으로만 엄선된 폴더에 들어갔다. 분노의 행위! 진정한 현자 타임을 갖고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 * *
멍하니 하루를 보내고 나니 모든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유머콘서트의 오프닝 연주 소리가 들린다.
내일 아침부터 지옥불을 걷겠군.
띠링.
이 시간에 웬 문자?
-15 19 24 33 34 39
뭐야, 이건!
띠링
문자가 또 온다.
-경고. 시키는 대로 할 것. 두 게임까지만 가능.
진짜 뭐지? 살짝 무서워졌다.
생각해 보니 택배 반송 문자 이후부터다. 그래, 반송 확인하겠다고 링크 타고 들어갔고, 인증한다고 뭔가 설치도 했다. 설마? 요새 유행한다는 피싱 같은 것인가?
피싱이면 안 좋은 짓을 할 텐데 나한테 왜 로또 번호를 알려 주나? 그것만으로도 이상한데, 더 생각해 보면 로또 당첨 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만큼 이상한 것이 있을까? 소름이 돋는다. 발신 번호가 있다면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다.
신이 돕는 것인가? 중학생이 된 이후로 성당도 안 다녔다. 성당 다닐 때도 100원 이상 헌금해 본 적도 없다. 내가 신이라면 나 같은 놈 도와줄 리 만무하다.
담배를 세 대 정도 피우고 나니 머리가 정리됐다. 하라는 대로 해 보자. 밑져 봐야 로또값 2천 원이다.
* * *
빠라라빠빠 빠라라빠빠.
알람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 나쁘다. 알람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쾌하다. 신이 저주를 내린 것이 분명하다. 월요일은 특히나 일어나기 더 힘들다. 또다시 고난의 행군이다.
이 회사 망해야 한다. 노예 같은 삶은 나를 마지막으로 끝내야 한다. 오기로 버티면서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고 얻어 내자. 내가 회사 하나 차릴 테니까 두고 보라고. 내가 이 회사 망하는 꼴은 꼭 보고 말 테다.
“지 과장! 이것 좀 옮겨. 빨리! 빨리빨리!”
8시 출근인데 7시 40분부터 지옥불이 켜졌다.
“부장님. 저 주간 회의 준비해야 하는데요.”
“아니, 여기에 노는 사람 있어? 거 말로만 하는 회의 백날 해서 뭐 해!”
낸들 회의를 하고 싶어서 하나.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것이지.
“회의 자료만 후딱 만들고 내려올게요.”
“이게 급하다고. 빨리!”
생각해 보면 하나도 급할 것이 없다. 나이 50 이상 먹은 사람들 특징이다. 눈앞에 뭔가 있으면 무조건 해치워야 한다. 처리 안 하면 난리가 나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한다. 6ㆍ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20~30kg는 거뜬한 권선을 들어다 파렛트에 차곡차곡 쌓고는 지게차로 들어 다음 공정까지 옮긴다. 내가 왜 이 짓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그냥 한다. 불쾌한 알람이 울리면 눈을 뜨고, 방광이 가득 차면 소변을 보듯이 그냥 한다.
“사장님, 자재 발주하고 재고 파악하기도 바쁜데 현장에서 잡일을 너무 많이 시킵니다. 좀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지 과장님 고생하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런데’ 소리가 나오자마자 한숨부터 나온다. 들으나 마나 네 일이니 군소리 말고 하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입도 뻥긋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나만 이 고생 하는 것이 너무 억울해 참을 수가 없다.
아니, 그래도 참았어야 했다.
“자재 업무를 잘하려면 현장 일을 안 할 수가 없잖아요? 권선도 따지고 보면 자재니까 과장님이 반제품 관리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어요?”
역시나였다. 부모 잘 만나 해외여행이나 다니면서 실컷 놀다가, 아빠 회사 들어와서 사장이랍시고 저러고 있으니 한숨만 나온다.
네가 월급쟁이의 애환을 알아? 어? 아냐고!
“그렇게 따지면 다 제 일이 되는 것 아닙니까? 사장님께서 업무 구분을 명확히 해 주셔야 직원들이 일하기 편하죠.”
“저도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직원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을까,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고민하고 있어요. 힘들더라도 조금 참고 기다려 보세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것이 내 대꾸가 성질을 돋운 것이 분명하다. 누가 봐도 얼굴에 짜증이 가득한데 아무렇지 않은 척, 평온한 척한다. 이 여자의 놀라운 멘탈은 존경 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더 얄밉다. 뭔가 해결할 것처럼 얘기는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휴, 저 무능력한 금수저.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난 여전히 현장에서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한다. 틈틈이 짬을 내어 자재를 발주한다. 분명 자재 관리로 들어왔는데, 하는 일은 잡부다. 전문 용어로 데모도.
그래도 오늘은 평소랑 마음가짐이 다르다. 이번 주만 어찌 잘 넘겨보자. 토요일이 되면 결론이 날 것이다. 혹시나가 설마가 되고,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면? 기대된다. 이번 주만 참자.
한 끼에 3,500원짜리 밥을 먹을 수 있는 점심시간이다. 한 달 밥값으로 5만 원을 제하니 내는 것보다 비싼 밥을 먹는다고 좋아해야 한다. 디스 이즈 중소기업!
오늘도 어김없이 개소리가 난무한다. 입으로 쪽쪽 빤 젓가락으로 반찬 뒤적거리던 노인네 하나가 운을 띄운다.
“요새 젊은 것들은 지들 편하려고 대기업만 바라본다니까! 결혼도 안 하지, 애도 안 낳지, 중소기업은 쳐다보지도 않아. 이 나라가 어찌 되겠어?”
밥 먹으면서 거리낌 없이 트림을 하던 다른 노인네가 맞장구를 쳐 준다.
“오냐오냐 길러서 그래. 나 때는 일만 할 수 있어도 감지덕지였는데 말이여. 일도 안 하면서 복지 타령 하고, 이러다 나라 망해.”
“복지 하다 나라 망하게 생겼다니까. 옆집네 애 하나는 1년을 넘게 노는데 실업 수당으로 한 달에 200씩 받는대. 아니 놀면서도 200씩 받는데 누가 일을 하겠어? 그리스가 그래서 망한 것 아니여! 이놈들 겪어 봐야 정신을 차리지.”
회사에서는 가급적 입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참을 수가 없다. 췌장에서부터 뭔가 욱 하고 올라오는 기분이다. 유로존과 그리스의 관계, 환율 문제, 연금 부실 관리 등에 대해서 강의를 해야 하나?
“부장님요, 실업 수당으로 어떻게 200씩 받아요. 그렇게 안 나와요. 그리고 부장님은 아들한테 우리 회사 다니라고 할 수 있겠어요?”
“크음. 큼. 왜 못해! 나가서 가만있으면 누가 돈 백만 원 거저 줘?”
아니라고는 하지만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우리나라 3대 미스터리가 떠오른다. 자기 자식들은 하나같이 삼광전자에 다닌다는 미스터리. 자식들이 다달이 용돈 줄 테니 집에서 쉬라고 해도 그냥 운동 삼아 일한다는 미스터리. 자기 자식은 대기업 다녀야 하지만, 남의 자식은 왜 중소기업을 마다하냐며 요즘 것들은 정신상태가 썩어 빠졌다는 미스터리 말이다.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았지만, 난 노인네들한테 찍혔다. 노인네월드에서 말대꾸는 그 자체로 패륜과도 같다. 난 서른이 됐지만 ‘요즘 젊은 것들’이 됐다.
* * *
험난한 한 주가 흘러갔다. 다행히 이번 주는 토요일에 쉰다고 한다. 주 5일제가 정착된 지 20년이 다 돼 가지만, 여전히 토요일 휴무는 먼 나라 이야기이다.
어느 순간부터 토요일 근무는 회사가 직원들에게 베푸는 최고의 복지로 자리 잡았다. 어차피 집에서 노느니 회사 나와서 시간당 1.5배 받아 가면서 일하라는 것이다. 그래 봐야 최저 시급이지만, 아름다운 복지 제도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드디어 그날, 그 시간이 왔다. 혹시나 급한 마음에 달려가다 자빠지기라도 할까 봐 차분한 마음을 유지했다. 곰팡이가 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쌈장 메이커 가죽 지갑에서 딱 두 게임이 찍힌 로또 종이를 꺼낸다.
혹시 몰라서 월요일 연차도 냈다. 연차 하나 내는데도 온갖 욕을 먹어야 했다. 일주일 내내 배가 부를 정도로 말이다.
“지 과장, 연차 쓰는 건 좋은데 주말 붙여서 쉬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네? 무슨 문제가 있나요?”
“무슨 문제라니. 자네는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이네?”
“아니요. 예의가 아니라면서요. 그럼 문제가 있다는 말씀 아니십니까?”
“직원들 저렇게 고생하는 것 안 보여? 직원들 고생하는데 너는 주말 끼고 놀러 가겠다 이거 아녀?”
에휴, 말을 말자. 한두 번도 아니지만, 매번 참기가 어렵다. 그래도 참아야지 어쩌나.
“죄송합니다. 집안 일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좀 이해해 주세요.”
속으로 씨발씨발하면서도 한없이 수그린 채 조아려야 했다. 저 사람이 원하는 것은 그저 조아리는 것이다. 이런저런 말 붙여 봐야 나만 피곤해진다.
“지 과장님, 연차 신청서 내셨네요?”
백여시 같은 사장이 2차로 태클을 걸어온다.
“네.”
“네? 그게 끝인가요? 사유로 개인 사정이라고 적으셨는데, 어디 좋은 데 가시나 봐요?”
“아니요, 그냥.”
“좋은 데 있으면 얘기 좀 해 주세요.”
“그냥 집안일이라서요.”
“그래요? 그럼 앞으로는 집안일이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적어 주세요.”
저 지칠 줄 모르는 감시와 의심. 행여나 다른 회사 면접이라도 보러 갈까 봐 의심하는 것이다. 곰이 마늘과 쑥을 먹던 시절에도 이러진 않았을 것이다. 직원이 법적으로 보장된 연차를 쓰겠다는데 왜 허락을 맡아야 하며, 사유를 구구절절 적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랑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저 사장은 대체 누구한테 뭘 어떻게 배웠기에 저런 꼰대 같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이 먹은 꼰대야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러려니 이해라도 가지만, 젊은 꼰대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금수저 종특인가.
기상천외한 일들을 거쳐 결국 토요일 저녁 8시 반이 됐다. 미안하다 친구야. 오랜만에 연락 왔는데 오늘도 안 돼. 정말 중요한 일이야. 행여나 로또 되면 진짜 거하게 쏠게.
“안녕하십니까. 생방송 대박 로또의 김욱입니다.”
시작됐다.
빙그르 돌던 공이 하나씩 나온다.
“33.”
“34.”
“15.”
“39.”
“24.”
“19.”
“씨이이발!”
이건 결코 욕이 아니다. 감정 표현에 익숙지 않은 자의 감탄 섞인 그로울링이다.
대박대박! 대박이 두 번이다!
띠링.
짐승 같은 그로울링으로 기쁨을 만끽하는데, 문자가 왔다.
-사표. 창업.
문자가 안 왔어도 사표 낼 생각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알고 저런 문자를 보냈지? 창업은 또 뭐야? 그 돈으로 회사 차리라는 것인가? 내 마음을 어찌 알았을까?
문자 너, 아무래도 나와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 내가 너 때문에 인생을 다시 느껴. 우리 오래가자. 응?
고맙습니다, 피싱!
오기만 남은 우울한 내 삶에 희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