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06)
206 열혈 수강생
연휴 기간 동안 자동권선기들만 외로이 움직였던 공장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호이스트 움직이는 소리, 철판 부딪치는 소리, 임팩 렌치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정적 속에서 연휴를 보내고 와서 그런지, 공장의 시끄러운 소리가 유독 반갑다. 연휴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텐데 힘든 내색 없이 평소처럼 변압기 뽑아내는 직원들이 고맙군.
몇 달만 버티면 두둑한 성과급이 위로해 줄 것이란 기대감도 기대감이지만, 일이 전보다 훨씬 수월해진 것도 직원들 얼굴을 편안에 이르게 했을 것이다.
문자님 작품인 배선체결기와 그것을 활용한 조임쇠체결기가 본격적으로 생산 현장에 투입됐다. 신통방통한 작품들이 손에 익으면서 이제 변압기 조립에 어려움이란 없어졌다.
권선에 코아 끼우는 것과 건조로에서 나온 뜨끈뜨끈한 중신을 외함에 집어넣는 것을 빼면 변압기 생산은 거저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힘든 점을 기껏 찾자면 조립 끝난 변압기를 검사부로 옮기는 것 정도?
진짜 세상 좋아졌다. 라떼는 말이야, 저거 하나 만들려면 입에서 곡소리가 절로 났었는데 말이야.
연휴를 끝낸 월요일이어도 회사가 무난히 돌아가고 있으니, 난 ESS 공부 좀 해야겠다. 너도나도 ESS 타령이니 장단이라도 맞추려면 대체 무엇인지 공부는 해 봐야지.
“상무님.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월요일 오전부터 서류 뭉치에 둘러싸여 얼굴 보기 힘든 최윤근 상무를 찾아갔다.
입사와 함께 의욕을 보이며 회사 경영과 품질 프로세스를 꼼꼼하게 점검하고 있다. 있는 건 개선하고, 없는 건 만들고. 회사가 나아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잘 해내리라 믿는다.
“아휴, 사장님 오셨습니까? 뭐 명절이 별거 있습니까? 소파에 앉아서 TV 보며 밤이나 까는 거죠. 허허.”
“자식들은 아직 안 여의였죠?”
“요즘은 늦게 결혼하는 것이 트렌드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서른이라 아직은 아무 말 안 하고 기다리고 있지요. 친구 녀석들이 손주 봤다면서 자랑해서 살짝 다급해지긴 한데, 자식 농사가 맘대로 되지 않지요. 허허.”
“상무님은 왠지 좋은 시아버지, 좋은 할아버지가 될 것 같습니다.”
“허허허. 그래야지요.”
가벼운 호구 조사로 서론은 잘 마무리했다. 친밀한 사이면 서론 없이 바로 본론에 들어가겠지만, 우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상무님. 저번에 ESS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너무 몰라서 그러는데, 시간 되면 강의 좀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 물론이지요.”
최 상무가 돋보기를 벗으며 화색이 된 얼굴로 반긴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강의 좋아하는 사람답다.
상무실이 강의실로 바뀌었다. 최 상무는 열정적인 학자로 변신을 완료했다.
“ESS라는 것이 에너지저장시스템 아닙니까? 에너지, 그러니까 전기를 왜 저장해야 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기저부하, 첨두부하 이런 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지요!”
교수의 첫 질문에 정답을 얘기했다. 변압기 업계 짬밥을 헛되이 먹지 않았군.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늘리고 있긴 해도 아직 첨두부하 역할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전기는 만드는 것도 중요한데, 버리는 것도 중요하죠. 그 점에서는 신재생에너지가 원전이나 화력보다 용이하긴 한데, 주파수 추종이 안 됩니다.”
슬슬 어려워진다. 역시 전문지식 없이 철판때기 두들기고 조립하던 사람이라 주파수 추종에 귀가 턱 막힌다. 교류라 주파수가 중요하다는 정도만 아는 까막눈에게 너무 훅 들어온 느낌이다.
고등학교 시절 삼각함수 같은 거 배워서 대체 어디에 써먹나 불평을 가졌지만, 이는 수포자의 핑계일 뿐이었다. 여기 와 보니 수학 없이는 전기를 이해할 수조차 없다. 수학과 물리와 화학까지. 아주 두루 쓰인다. 고딩 때 수학 공부 좀 할걸.
표정을 감춘다고 감췄는데, 아리송한 표정을 최 상무가 읽었던 모양이다. 변압기 회사 사장이라는 놈이 그것도 모르냐고 타박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전기는 참 어려워.
“좀 어렵습니까?”
“하하. 제가 문과 출신이라서요. 이해해 주시죠.”
“그러니까 제어가 안 된다는 말이죠. 기저부하야 늘 가동하면서 기본을 뽑아 주는 역할인데, 이건 원전이 주로 담당해요. 원전은 제어가 쉽지 않으니까 그냥 계속 전기를 생산하게 놔둔단 말이죠.”
“아! 나머지 전력원들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전력량을 채우는데, 신재생에너지는 아직 그 정도가 아니란 말씀이죠?”
“얼추 맞습니다. 지금까지야 LNG나 벙커씨유 태우면서 제어했는데, 신재생에너지 규모가 커지면서 이 역할을 해 주길 기대하는 것이죠. 근데 그 정도가 안 되고, 주파수 추종운전이 쉽지 않아요. 발전량이 유의미한 수준까지 올라오면 모르겠지만요.”
“그러니까 발전량이 늘어나야 하는데, 그날그날 발전량 차이가 크니까 ESS를 붙여서 전력량 관리를 한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최 상무가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A학점도 가능할 것 같다. 깊이 들어가면 깡통이지만, 대충 얘기해도 그럴싸하게 이해하는 척하는 것이 문과의 장점 아니겠나!
“그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아까 전기는 잘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잖습니까?”
“그건 알겠습니다. 지금 심야전기처럼 밤에 남는 전기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이죠?”
최 상무가 재차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저 표정은 이제 이해했으니 본격적으로 말을 많이 하겠다는 의미 같기도 하다. 수강생의 자세로 잘 새겨들어야겠군.
“뭐 하나도 모르신다고 하더니, 다 아시네요. 허허.”
“아휴,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깁니다. 부끄럽습니다.”
“전기 버리는 것을 얘기했는데, 원전이 제일 문제입니다. 신재생에너지도 전기 엄청 버려요. 근데 스케일이 다르단 말이죠. 태양광이나 풍력은 접지 통해 버리면 그만인데, 원전은 그게 안 되죠. 대한전력도 그거 때문에 아주 골치 아파해요.”
“그래서 전기 많이 쓰는 대기업들이 ESS 도입한다는 기사가 계속 나오는 것이군요?”
“나라에서 전기 요금도 보조해 주겠다고 하니까, 안 할 이유가 없죠. 솔직히 지금도 말도 안 되게 싸게 주고 있긴 한데, 더 싸게 해 준다고 하니까 옳다구나 하고 도입을 늘리는 것이죠. 정부야 그렇게 해도 전력 관리가 안정되면 이득이니깐요.”
산업용 전기 정말 싸긴 하지. 전기가 얼마나 싼지 제철소가 전기로 철광석 녹여서 철을 만들 지경이다. 그 싼 전기를 더 싸게 쓸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 정부의 ESS 보급 지원정책이다.
“듣기론 제철소 공장 멈추면 대규모 정전 날 수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것도 전기가 너무 남으면 문제가 된다는 의미죠?”
“맞습니다, 맞아요. 지금 기저전력이 너무 높아요. 아까 전기는 버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지 않습니까? 기저전력이 높으면 버리는 것도 힘들어요. 우리나라에서 전기 제일 많이 쓰는 곳이 미래제철인데, 거기 멈추면 난리 납니다. 반도체 공장 같은 데는 아주 작살나죠.”
전기가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다. 부족하면 당연히 문제이지만, 남아도 아주 문제다. 그래서 그걸 효율적으로 관리하겠다고 전력거래소가 생겼는데, 일이 얼마나 빡센지 공기업 중에서 연봉 탑을 찍는다.
“선진국들이 신재생 에너지에 힘 쏟는 것이 환경 문제도 있지만, 전력계통 안정성 차원도 있겠군요?”
“그런 점도 있죠. 결국 원전 줄이고 신재생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 그거야 정책의 문제이니까 뭐.”
“대한전력도 그렇고, 정부 지원책도 그렇고, 앞으로 ESS가 확대될 수밖에 없겠네요?”
ESS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질문을 던지며 오늘 강의의 핵심으로 들어갔다.
“우리나라 전력 구조상으로는 ESS가 확대될 수밖에 없죠. 신재생에너지가 확대되면 당연히 필요하고, 지금처럼 화석연료 비중이 높아도 필요하고 그렇지요. 뭐 기술이라는 것이 자고 일어나면 바뀔 정도긴 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향후 10년은 거뜬할 시장입니다.”
10년이라…… 생각보다 많이 짧은데? 왠지 전기차로 넘어가기 전 과도기로써 하이브리드차량 같은 느낌이랄까?
최 상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말없이 고민하는 표정을 보이니 그 속내를 읽은 모양이다.
“이미 선진국들은 ESS 보급에 열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가겠죠. 옛날에는 전기를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가 관심이었다면, 요즘은 얼마나 잘 관리하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ESS를 유망한 업종이라고 하는 것이죠.”
시장이 유망한 것과 사업으로 재미를 보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레드오션 중에 레드오션인 변압기 시장에서 내가 돈을 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ESS시장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선진국들이 보급을 늘리고 있다면 이미 시장을 선점한 회사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후발주자도 안착을 할 수 있을까요?”
“ESS가 이름이 그럴싸해서 그렇지, 생산이 어렵지 않습니다. 배터리가 핵심인데, 배터리야 우리나라가 최고 수준 아닙니까? 시스템만 잘 구축하면 되는데, 온갖 업체들 뛰어드는 걸 보면 어렵지 않다는 것 알겠지요? 결국 가격 경쟁력인데, 그거야 어느 사업이나 마찬가지죠.”
지금이야 블루오션인 것은 확실하지만, 오래갈 것 같지 않다. 정부 지원정책으로 만든 블루오션이지, 자생할 수 있는 시장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냥 느낌인데, 정부가 민간 화력발전에 돈 쥐여 주는 것처럼 돈 냄새가 진해서 부나방들이 달려든 달까요? 좀 느긋하게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 상무가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게 진짜 말도 안 되는 짓입니다.”
“네? 뭐가요?”
“아니, 대기업들 화력발전한다고 몇 조씩 퍼부어 주는 짓이 잘한 짓입니까? 그렇게 만든 전기를 또 비싸게 사 줘요. 그래 놓고 대한전력 적자 난다고 난리예요, 난리. 정부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 나 참.”
난 또. ESS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서 흥분한 줄 알았네. 살살 달래 주자.
“대한전력 억울한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
“성과급도 그렇고 할 말 많은데, 뭐 이제 퇴직했으니 조용히 있어야지요. 하여간 그놈 때문에 대한전력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하. 그놈 간 다음에는 좀 나아졌습니까?”
“산 넘어 산이라고, 똑같죠. 그래도 지금 정부는 일을 안 하지 않습니까? 허허허.”
똑같은 무능이라도 부지런한 무능보다 게으른 무능이 낫다는 말인가?
대한전력 같은 거대 공기업이야 정치권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지만, 나야 뭐 하꼬방 중소기업이니 짐짓 모른 척하고 살자고.
최 상무가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전력계통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발전과 송전, 변전, 배전 등등 한참을 떠들었다. 슬슬 졸음이 오려고 한다. 어렵다, 어려워.
“사장님 말씀대로 지켜볼 필요도 있지만, 대한전력이나 전력거래소가 이미 ESS에 대해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건 새로운 시장이 생긴다는 얘기죠. 전력거래소 얘기 들어 보니까 인트라데이 시장하고 밸런싱 시장을 만들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그 전엔 데이어헤드뿐이었지요.”
네, 뭐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잘 알겠습니다.
전기변압만 해도 어려운데 전력 계통으로 넘어가니 소가 된 것 같다. 내 앞에서 경을 읽는 최 상무.
전문용어는 왜 이리 많이 나오는지. 이 바닥 전문용어면 나까미, 기레빠시, 데나오시, 뭐 이런 건데 말이야. 전기쟁이들 진짜 존경한다.
밤을 새울 기세로 열혈 강의를 펼치는 최 상무를 겨우 진정시키며 강의실에서 빠져나왔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미약했다. 깊고 깊은 전기의 세계를 너무 얕잡아 봤어.
회사는 활기가 넘치는데, 나는 월요일 오전부터 진이 빠졌다. 진골 문과생에게 전기는 너무 어려운 얘기다. 문사철 성골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싶다.
이렇게 모르는 것투성인데,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
감과 본능은 거리를 두라고 권하고 있다.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하는 것이 사업이다. 사업의 세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쉽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