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05)
205 사업 얘기
박준희 사장과 처음 만나 밥 먹을 때가 생각난다.
범접하기 어려운 큰 회사 사장을 만나는 것은 긴장 그 자체였고, 말로만 들던 이 바닥 연예인의 실물에 놀라기도 했다.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 같았던 박 사장이 이제는 동네 누나처럼 친근해졌다.
나를 바라보는 박 사장의 시선도 그리됐으리라. 갖춰 입었던 첫 만남과 달리 지금은 동네 마실 나온 사람 같은 편안한 복장이다. 몸빼바지를 입어도 이태리 명품 같은 태가 나지만, 그건 박준희란 사람 자체가 발산하는 매력일 것이다.
파스타와 리조또를 먹으며 일상의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대체 언제 운동 나올 것이냐는 핀잔도 빠지지 않았다. 다음 주부터는 빼먹지 않겠다고 다짐하고서야 꾸지람을 피할 수 있었다.
“정수 씨. ESS에 대해서 좀 알아요?”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싶으니 박 사장이 색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이거 참 묘한 일이다. 요즘 들어 ESS 얘기하는 사람이 많더니, 이제는 박 사장까지 ESS 타령일세.
“요새 ESS 쪽 진출해 보라는 권유는 많이 받고 있는데, 모르는 분야라서 고민만 하고 있어요. 누나한테도 그런 제안 들어왔어요?”
“얼마 전에 강 사장님이랑 밥 먹는데, 그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지금 안성파워가 ESS로 재미 좀 보고 있잖아요.”
“그래서 강 사장님이 누나한테 해 볼 생각 없냐고 물어본 거구요?”
박 사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상하다. 잘되는 사업이면 혼자 노다지를 캐야지, 경쟁자를 스스로 늘릴 필요가 있을까? 내 질문에 박 사장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강 사장님이야 미리 준비해서 들어갔잖아요. 나름 자리를 잡았나 봐요. 근데 저번에 정부지원책 발표되면서 업체들이 우후죽순 늘어나니까 그걸 걱정하시는 것 같아요. 급성장하는 시장이긴 한데,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뛰어드니까 말이죠.”
“그러니까 어중이떠중이들이 점유율 가져가느니, 괜찮은 사람들이 뛰어들어서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 이 말인 건가요?”
“맞아요. 이러다 변압기 시장처럼 혼탁해질 것 같다고, 생각 있으면 진출하라고 하시대요. 적극 도와주겠다고 언제든 얘기하라면서요. 하려면 지금이 적기라는 얘기도.”
“강 사장님이 도와주겠다고 하면 나쁠 것 없지 않나요? 도와준다고 해도 금성전기 스스로 개척해야겠지만…… 그 정도 역량은 있잖아요?”
“에이, 우리 회사야 변압기만 했는데 무슨 역량이 있겠어요. 강 사장님이야 여러 분야를 해 왔으니까 그러시지만, 저는 모르는 것투성이예요. 그래서 고민이죠.”
남 주기 아까울 정도로 잘나가는 시장이란 말인가? 나한테는 왜 얘기 안 했나 모르겠네.
“저한테는 별 얘기 없으시던데요. 역시 누나를 딸처럼 아끼시네요. 하하.”
“안 그래도 강 사장님이 정수 씨 얘기도 했어요. 프라임일렉트릭이 변압기 쪽에서는 최고로 성장하긴 했어도, 아직 갈 길이 먼 회사라구요. 기반을 확실히 다져야지, 돈 좀 벌었다고 사업 확장하면 훅 가는 거 금방이라고 조언하셨어요.”
“그 말은 맞네요. 너무 빨리 성장해서 속도 조절이 좀 필요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긴 했거든요. 역시 강 사장님답습니다.”
“네, 그 얘기예요. 정수 씨 능력이면 회사 안정을 다지고 나서 시작해도 충분하니까 얘기 안 했다고 하시더라구요. 강 사장님이 정수 씨 엄청 챙기는 거 아시잖아요?”
애먼 생각 하지 말자. 이 바닥에서 든든한 내 편은 강호창 사장과 박준희 사장이다. 나한테 까방권 있는 사람에게 서운한 생각은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누나는 그저 고민만 하고 있는 거예요?”
박 사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따지고 보면 경쟁자이지만, 사업 얘기를 거침없이 하는 것을 보니 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한 것 같다. 이 믿음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는 것이 없어서요. 뭐 쉽게 회사 하나 인수하면 되겠지만, 함부로 그럴 수도 없잖아요?”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네요?”
“변압기 시장이 포화인 거 잘 아시잖아요.”
고민 많은 박 사장의 표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전기란 것은 당연히 경제성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지금처럼 경제성장이 안정기에 진입했을 때에는 전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일이 없다. 그럼 변압기도 마찬가지다.
대한전력에 부지런히 납품하는 변압기 대부분은 기존에 설치된 것을 교체하는 용도이다. 시장이 더 이상 커질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업체는 매년 늘어난다. 관수가 그렇다는 것은 민수도 그렇다는 얘기다. 진짜 큰 시장은 대기업들이 독점하고 있고, 나머지 짜잘한 시장을 수많은 업체가 제 살 깎아먹으며 경쟁 중이다.
그걸 타개하고자 규모 좀 있는 업체들은 수출에 뛰어들지만, 외국이라고 경쟁이 없는 것이 아니다. 힘들긴 국내건 국외건 마찬가지다.
“하긴 요새 보니까 먼저 포화 상태가 된 개폐기나 차단기 쪽이 자꾸 이쪽으로 넘어오더군요. 그나마 여기가 낫다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땐 여기도 이미 엉망이에요. 변압기 쪽도 뭔가 변화가 필요하긴 하죠.”
“그래도 저야 정수 씨랑 같이 하는 수출이 잘 풀려서 낫긴 한데, 수출도 언제까지 잘될 것도 아니고…… 요새 걱정이긴 해요.”
“누나답지 않게 걱정도 다 하네요. 세상에 안전빵으로 거저먹는 쉬운 사업이 어디 있어요?”
내가 거저먹는 사업 하고 있으면서 이런 얘기 꺼내기 좀 미안하긴 하다. 난 정말 사업 쉽게 하는 사람이다. 문자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자님이 통 조용한 것이 의아하긴 하다. ESS에 대해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면 넌지시 뭐라고 언급이라도 해 줄 법한데, 아무 얘기가 없다. ESS는 별로란 뜻인가? 아직 때가 아니란 뜻인가?
“정수 씨는 ESS에 관심 없어요?”
“저도 누나랑 마찬가지예요. 아는 것이 없어요. 에너지 저장은 심야전기랑 양수발전밖에 몰라요. 하하.”
“제가 이 얘기를 꺼낸 게 왠지 정수 씨랑 같이하면 괜찮을 것 같아서예요. 든든하달까요?”
이것이 본론이었군.
여러 가지가 쌓였겠지만, 박 사장과 나의 거리는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박 사장의 포지션도 도와주겠다는 것에서 이제는 의지하겠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나랑 동업을 해 보자고? 돈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대줄 수 있지만, 나는 아직 확신이 없다.
“동업하자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죠. 돈이야 많이 벌었고, 앞으로 잘 벌면 되는 거니까 리스크 걱정은 안 해요.”
“그럼 뭐가 걱정되는데요?”
“ESS가 정말 괜찮은 건가 싶어서요. 괜히 어정쩡하게 들어가서 어정쩡하게 할 바엔 안 하는 것이 낫죠. 그리고 아직까지는 변압기 쪽에서 하고 싶은 것이 더 많기도 하구요.”
박 사장이 살짝 아쉽다는 표정을 내비치면서도 내 얘기에 귀 기울여 준다.
빠져들 것 같은 눈빛으로 ‘어서 얘기해 봐, 다 들어 줄게’라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없는 얘기도 지어서 할 판이다. 박 사장이 거래처 한번 돌면 금성전기 매출이 달라진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 것이 많다는 얘기는 전력용 변압기라도 해 보겠다는 거예요?”
“회사가 더 커지면 결국 거기까지 가야죠. 아직 대기업과 경쟁하기에 부족한 것이 많지만, 준비는 해야죠. 관급공사 시장도 있고, 철도용 변압기도 있고, 아직 할 것이 많잖아요.”
“뭐 그쪽도 좋긴 한데, 이건 아셔야 해요. 조달청 들어가는 것도 거기 상주하는 브로커들이 워낙 많아서 쉽지 않아요. 하청으로 들어가 봐야 고생만 하고 남는 건 거의 없어요.”
“저야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까 부딪혀 보긴 해야죠. ESS는 일단 공부 좀 하면서 알아볼게요.”
“그래요. 저도 충분하다 싶을 만큼 준비를 해야 하니깐, 당장 어떻게 하자고 얘기 꺼낸 건 아니에요. 그래도 확실한 건요…….”
저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 박 사장이 아니고서야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저 외모, 부모 복은 타고났다 싶다. 좋은 유전자를 잘 활용하는 것도 탁월한 능력이다.
“정수 씨랑 같이하면 안 될 일도 될 것 같다는 거예요. 푸하하.”
이건 뭐 프러포즈인가? 과하게 웃는 것이 말하고도 부끄러운 모양이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있는 문자님 덕이지. 나도 문자님과 함께라면 안 될 일도 될 것 같아.
“사람 면전에 대고 그런 얘기를 해서 민망하게 만들어요! 하하.”
박 사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전환하며 말을 이어 갔다.
“요즘 정수 씨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어요.”
“왜요? 제가 꼬리 쳐서요?”
“하하하. 뭐래요.”
박 사장이 웃음으로 농담을 받아쳤지만, 즐겁다는 표정은 감추지 못했다. 나에게 더 적극적으로 꼬리 쳐 달라는 암시 같기도 하다.
이 정도면 서로의 마음은 확인이 됐다 싶다. 언젠가 때가 오겠지.
“사업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죠. 그래서 방향에 대해 늘 고민하죠. 근데 정수 씨 보면 저렇게 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고…… 사업 어렵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나 봐요.”
“우리 회사가 이렇게 큰 건 뭐 달리 비결이 있는 게 아니에요. 누나도 잘 알잖아요? 그냥 운때 잘 만난 거죠. 작년에 지역 우선배정 혼자 안 먹었으면 어림도 없었죠.”
이젠 녹음기 틀어도 될 것 같다. 남들이 그 비결이 뭐냐고 물어볼 때마다 내 대답은 운때가 좋았다 뿐. 실제로 그렇기도 했으니, 내가 뭐 달리 말할 것도 없다.
역시나 박 사장은 그 정도 대답은 어림없다는 반응이다. 그렇다고 문자님의 존재를 깔 수도 없고. 알아서 판단하게 해야지. 내가 상대방 생각까지 강요할 수는 없지.
“정수 씨는 꼭 이럴 때 겸손하게 나오더라. 그게 매력이긴 해요. 하하.”
마치 내가 우리 회사의 성공 비결에 대한 숙제를 내준 꼴이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비결은 알지 못하리라. 판타지 소설 같은 얘기를 감히 상상이라도 할까?
“저 나름대로 프라임일렉트릭의 성공 요인에 대해 고민해 보려구요. 우리 회사도 언제까지 300억 400억짜리 회사에 머물 수는 없잖아요. 앞으로 염탐 많이 할 테니까 경찰에 신고만 하지 말아 주세요. 하하하.”
이번엔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전환하며 말을 받아 냈다.
“누나. 제가 봤을 땐 일종의 질투 같은 느낌이에요. 그럴 필요 전혀 없다고 생각해요. 금성전기도 잘나가는 회사예요! 저 처음 이 업계 들어왔을 때 매출 100억 정도밖에 안 되는 회사였는데, 지금 엄청나게 키웠잖아요. 누나도 대단한 사람이에요. 자부심을 가져요!”
“정수 씨 말대로 질투가 맞나 봐요. 하하.”
“물론 금성전기가 지금도 잘나가는 회사지만, 만약에 나주 처음 내려갔다면 지금은 엄청나게 커졌을 거예요. 저야 그저 운 좋은 사람이고, 누나가 진짜 실력자라고 생각하는데요?”
위로가 섞인 말이었지만, 진심도 충분히 담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회사 물려받았다는 똑같은 조건. 누구는 회사를 말아먹었고, 박 사장은 이 업계 탑티어로 성장시켰다.
“솔직히 프라임일렉트릭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것이라곤 전혀 생각 못했거든요. 그러고 보면 제가 처음에 정수 씨한테 돕고 지내자고 할 때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많이 비웃었어요?”
“하하. 아휴, 또 그 얘기네. 그때 정말 고마웠다니까요. 그 은혜 갚는다고, 제가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드리잖아요? 오늘 저녁도 제가 삽니다.”
“그래요. 맘 편히 얻어먹을게요.”
일상의 얘기가 결국 사업 얘기로 넘어가 마무리됐지만, 더없이 편안한 저녁이었다. 아직은 사업 얘기가 주를 이루지만, 서로의 본심을 조심씩 알리며 정서적 교감을 높이고 있다.
처음 박 사장이 여자로 느껴졌을 때는 에로스적인 감정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팔짱 낄 때마다 느껴지는 뭉클함을 눈으로 보고 싶었고, 손으로 만지고 싶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박준희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감정과 호기심이 더 커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