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04)
204 킹 오브 더 놀쓰
푸근했던 가을 캠핑을 끝내고 홈 스위트 홈으로 향했다.
덕준이는 이 동네 유명한 드라이브 코스라는 광주댐 인근을 돌고 소쇄원도 구경 가겠다며 합류를 권했다. 말과 달리 눈빛은 이제 그만 사라져 달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1박 2일 데이트를 방해했는데, 굳이 거기까지 따라갈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물러나 줄 테니 한 쌍의 아름다운 바퀴벌레가 되도록.
캠핑장을 벗어나 혁신도시로 진입하니 아포칼립스라도 찾아온 듯 정적이 확 밀려들어 왔다. 나주에서 가장 번잡하고 북적거리는 이곳이 블랙아웃에 들어가니, 조용하니 좋다.
빨리 집에 가서 이 정적을 즐기고 싶다. ‘왕좌의 게임’ 새 시즌이 시작됐는데도 바빠서 못 봤다. 이 연휴에 몰아 볼 생각 하니 흥분된다.
트루킹 스타니스가 말도 안 되게 망가지면서 김이 새 버린 저번 시즌 생각하면 손이 안 가긴 하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시즌 6부터 원작이 없어서 망할 놈의 작가들이 어떻게 전개할지 안 볼 수가 없다.
어두워지면서 미드 감상하기 더없이 좋은 환경이 조성됐다. 웅장한 오프닝을 지켜보며 먹던 과자도 집어치우고 집중하는데, 젠장 또 전화! 집중할 때는 전화를 꺼 놓든지 해야지 원.
“어, 민희야. 웬일이야?”
쉬는 날엔 직원에게 절대 전화 안 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데, 감히 직원이 사장에게 전화를 걸다니! 이 당돌한 녀석.
“사장님, 혹시 댁이 어디세요?”
“우리 집은 왜?”
“명절이잖아요. 전이랑 송편이랑 좀 쌌는데, 갖다 드리려구요.”
“아유, 됐어. 먹고 싶으면 반찬 가게 가서 사 먹으면 되는데, 뭘 귀찮게 갖다 줘? 마음만 받을게.”
“저 혁신도시예요. 사장님 댁이 어딘지 몰라서 헤매고 있단 말이에요.”
집요한 녀석. 미련을 못 버리는 것인지, 진짜 팬심인지 모르겠다. 시즌 6편 1회 시작됐을 때 전화가 왔으면 살짝 짜증 날 뻔했는데, 이제 막 오프닝 나올 때라 순순히 넘어갔다.
“로얄카운티 1차 101동으로 와. 차 끌고 온 거야?”
“아뇨. 버스 타고 왔어요. 로얄카운티 1차. 알겠습니다. 도착하면 연락드릴게요.”
부지런도 하다. 명절 음식을 벌써 끝낸 것도 그렇고, 그걸 싸서 광주에서 여기까지 온 것도 그렇다. 젊음이 좋긴 좋구나.
젊은 20대가 갖지 못한 30대의 노련미를 발휘해 반찬통을 미리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꼼수는 미리 차단해야지.
“사장님! 저 도착했어요.”
“밖에 나와 있다.”
“아, 저기 보인다.”
장바구니같이 생긴 것 하나 들고 신 나게 달려오는 민희가 보인다.
“사장님 심심하실까 봐 놀러 왔어요.”
“미안하지만 하나도 안 심심해. 그리고 넌 무슨 애가 대책이 없냐? 나 없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무작정 와?”
“에이, 김 대리 언니가 그러던데요? 사장님은 명절 때 집에만 있는다고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 할 말이 없어졌다. 집돌이가 집 아니면 어디 있겠냐마는, 명절은 정말 어디 갈 곳이 없다.
“집이 얼마나 재미있는 곳인데. 난 집에만 있으라고 하면 몇 년이고 짱 박힐 수 있어. 그러니까 걱정 마셔.”
계속되는 구박에 싱글벙글인 민희가 반찬통을 꺼내 들었다. 식기는 했어도 냄새가 마구 올라온다. 명절 음식 얼마 만인가! 군침도네.
“사장님. 이거, 맛은 없어도 제 생각하면서 드세요. 전이랑 송편이랑 이것저것 좀 싸 왔어요.”
“고마워. 잘 먹을게. 그래, 먹으면서 너 생각해 줄게.”
“헤헤. 근데 이거 도로 가져가야 해서요. 잠깐 들어가도 되죠? 제가 이쁘게 옮겨 드릴게요.”
“그럴 줄 알고 반찬통 가지고 나왔지. 여기다 옮기면 돼. 설거지도 해 줘야 하는데, 그건 이해해 주라.”
어디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오려고! 파상 공세를 막기 어려울 것 같으면 사전에 차단해 버리는 것이 파훼법이다.
“아 쫌! 여기까지 왔는데 집 구경 좀 하면 안 돼요?”
“안 돼. 너 무슨 짓 할지 몰라서 안 돼. 일단 차로 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
민희의 신 난 표정이 급 우울해졌다. 나도 사람답게 살려면 어쩔 수 없어. 이성이 아니라고 외쳐도 남자의 본능은 나도 믿을 수 없다. 명절에 짐승처럼 살 수 없잖아?
“어휴. 이거 육전이네? 이건 명태전?”
“이쪽에서는 육전이라고 안 하고 고기전이라고 해요. TV에서 육전이라고 나와서 저게 왜 육전이냐고 막 그랬어요.”
“그래? 광주 사람들도 육전이라고 하던데? 이것도 동네마다 부르는 게 다른가?”
“에이, 고기전이 맞다니깐요. 이거 제가 지졌는데 소금간을 조금 많이 한 것 같기도 하고. 암튼 꼭 제 생각하면서 드세요.”
“그래. 어머니께 잘 먹겠다고 꼭 전해 드리고.”
“아니, 제가 지졌다니깐요!”
반찬통에 옮겨 담으면서 예의상 하나 맛보는데, 맛있다. 겉절이와 함께 먹으면 햇반 2개도 거뜬할 맛이다. 그래, 이게 명절이야.
“차에 타. 집까지 데려다줄게.”
“히잉. 좀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엄마한테 놀고 들어간다고 했는데…….”
민희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연기인 것을 알면서도 표정만 보고 있자니, 입고 있던 옷까지 다 벗어서 적선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황금충인가!
“너 쫌 진상이구나? 가자, 저녁 사 줄게.”
트루킹 스타니스의 생사를 확인하려면 시즌 6을 빨리 봐야 하는데, 민희 저것을 진짜. 뭐 좋다고 저리 쉴 새 없이 떠드는지.
“사장님, 차 바꾸신다면서요?”
“한 회사긴 해도 소문 참 빠르네. 주변에서 비싼 차 타라고 난리들이어서 돈 좀 썼지.”
“들어 보니까 미국에서 직접 수입한다면서요? 얼마나 좋은 차길래 그래요?”
내가 원하는 차를 사기 위해 은하무역 김상진 사장에게 부탁을 했다.
잘 뽑힌 놈으로 안전하게 배송해 주겠단다. 10월에 새 모델이 나오니까 나오자마자 바로 데리고 오겠다고 하여, 아주 기대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회사 주차장에 충전기 하나 설치해야지. 설렌다.
“올해 안엔 올 거야. 기분이다. 차 나오면 드라이브 한번 시켜 줄게.”
“유후!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민희 덕분에 연휴 첫째 날 저녁도 예년과 다르게 보냈다. 어제저녁도 고기, 오늘 저녁도 고기. 고기가 살짝 질릴 법도 하지만, 명절엔 기름지게 먹어 줘야 하는 법이지.
커피까지 개운하게 마셔 줬다. 나에 대한 감정은 여전했지만, 민희 스스로도 선을 넘지 않으려 많이 제어하는 느낌이다.
“사장님! 잘 먹었습니다!”
“차나 타. 집까지 데려다줄게.”
“아직 초저녁인데 더 있으면 안 됩니까!”
9시가 넘었는데도 안 가겠다고 떼쓰는 민희를 보자니, 옛날 TV가 생각났다.
9시가 되면 일찍 자는 착한 어린이가 되라는 방송이 나왔더랬다. 아주 어릴 때라 희미하지만, 분명 기억난다. 민희 어린이,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입니다.
“초저녁은 무슨. 넌 여전하구나.”
“하하. 왜 또 그러세요! 순수한 팬덤으로 한 소리니까 너무 뭐라 그러지 마세요.”
“선 넘으면 꿀밤 날릴 거니까 각오해.”
“히힛. 업계 포상 같은 거예요?”
말을 말자. 민희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중간 중간 과한 몸짓과 함께 따라오는 스킨십을 애써 무시했다. 반야심경을 외는 현장법사의 마음을 유지했다.
“민희야, 잠깐만 있어 봐.”
차 트렁크에서 거래 업체들 돌리고 남은 홍삼 세트 하나 꺼냈다. 되로 받았으면 말로 보답해야지.
“이거 어머니 갖다 드려. 음식 잘 먹겠다고 전해 드리고.”
“하핫. 감사해요. 근데요, 음식 제가 한 거라니까요.”
“알았으니까 잘 들어가.”
아파트 입구에서 안 들어가고 머뭇거리는 것이 수상쩍다.
본능적으로 방어 기제가 작동했다. 확 달려들며 까치발을 드는 민희를 잽싸게 피했다. 어설프게 안아 주는 자세가 됐지만, 가볍게 등 두들겨 주며 이성을 찾게 해 줬다. 꿀밤을 날려야 했지만, 하는 짓이 귀여워서 봐준다.
“아, 진짜! 사장님 저 들어갈게요.”
귀여운 녀석. 저 감정이 나중에 분노와 원망으로 바뀌지 않게 해야 할 텐데 말이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미드나 보러 가자.
미드와 함께하는 명절 연휴는 나 같은 집돌이에겐 최고다.
트루킹 스타니스는 사라졌지만, 킹 오브 더 놀스 스노우의 그 처절한 전투신은 죽음이다, 죽음. 시즌 7을 위해 또 1년을 기다려야 하다니, 이건 진짜 고문이다. 원작과 달라져서 걱정이 컸는데, 아주 만족스럽다.
여운을 달래고자 킵해 놓고 손을 안 대고 있던 배드 브레이킹을 시작했다. 초반 고비를 잘 넘기자 해가 지고 달이 뜨는지도 모르고 몰입됐다. 크으, 이게 아버지의 마음인가! 배터 콜 사울은 주인공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매력적이야!
시즌 5까지 단숨에 달리고 나니 추석 연휴가 싹 지나가 버렸다. 죽이라는 좀비는 안 죽이고 저들끼리 싸우면서 속 터지게 만드는 그 미드처럼 질질 끌지도 않고, 깔끔하게 시즌 5로 끝내 버리는 단호함. 아주 맘에 들었다.
정신과 시간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다. 주말이 되자 슬슬 출근의 압박이 몰려온다. 월급쟁이건 사장이건 연휴 보내고 출근하기 싫은 것은 똑같구나.
박준희 사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역시 잊지 않고 명절이라고 찾아 주는군.
“우리 누님!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아휴, 또 누님 타령이네. 연휴 동안 뭐 했어요? 나주 내려왔는데 저녁 같이 먹을래요?”
“좋지요.”
명절에 갈 곳 없이 집에만 있다는 것을 아는 박 사장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맛있는 것 사 줘야겠군.
서로 걸어서 10분 거리. 번거롭게 차 끌고 나갈 필요 없이 가볍게 걸으면 된다. 주말 끼고 5일 연휴이지만, 혁신도시는 토요일부터 일상으로 돌아온 분위기이다.
이 동네 공장도 토요일에 출근하는 곳이 많을 것이다.
3일 쉬고, 하루 일하고, 또 하루 쉴 바엔 그냥 쭉 쉬는 것이 나을 텐데, 굳이 토요일에 일하게 하는 사장들의 심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 딴엔 주말 특근수당 준다고 좋은 사장이라며 으스대고 있을지도.
“정수 씨!”
나를 부르는 맑고 영롱한 목소리. 박 사장이다. 가을 냄새가 물씬 품기는 스타일에 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어, 누나. 명절 잘 보냈어요?”
“아침에 출발했는데, 차가 하나도 안 막히더라구요. 나주 사니까 이건 편하네요.”
“아버님은 좀 괜찮으세요?”
“이젠 말씀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결혼 언제 할 거냐고 압박하시는 거 보니까 예전 모습 되찾았다 싶더라구요. 하하.”
“명절 제대로 즐기고 오셨네요. 누나 나이면 스트레스 좀 받아야 명절이죠. 하하.”
어깨에 가벼운 타격을 받으며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번에 갔던 레스토랑이 맘에 들었던지, 또 그 집이다.
“정수 씨, 연휴 때 뭐 했어요?”
“한 부장 알죠? 걔가 캠핑 가자고 해서 하루 보내고, 그담부터는 집돌이였죠 뭐.”
“캠핑요? 정수 씨랑 안 어울리는데요?”
“저를 너무 잘 아시는데요? 하하. 캠핑을 왜 하나, 왜 사서 고생하나 싶었는데, 경험해 보니까 괜찮더라구요. 글램핑이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가끔씩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지그시 내 말을 경청해 주는 박 사장을 보고 있자니, 아무 말을 해도 오냐오냐해 주며 들어 줄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 눈빛에 빠진 것인지 모르겠다. 함부로 매혹기 발산하는 나쁜 누나 같으니라고.
박 사장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 날 더 추워지기 전에 캠핑 한번 가요. 전 좋아하거든요. 텐트 사 놓고 몇 번 써먹지도 못했어요. 하하.”
“저랑 둘이서요? 전 누나랑 가면 언제든 콜이지만, 전 좀 걱정되는데요? 누나 은근 응큼해요.”
“푸하하. 하여간 진짜.”
저 미모의 여인과 함께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이런 대화를 웃으며 나눌 정도로 우린 많이 가까워졌다.
처음 만났을 때 꽤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박 사장은 사적으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었고, 그 거리를 좁히기 어려웠다. 내가 거리를 좁힐 노력을 딱히 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만남과 대화가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거리가 좁아졌다. 꼰대들이 가득한 이 바닥에서 30대 사업가라는 공감대가 서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을까?
거리가 좁아진 만큼, 내 마음속 지분도 꽤 가져갔다. 서로의 마음에 우호 지분이 많아졌을 것이다. 적대적 M&A 우려는 안 해도 될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