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16)
216 삼총사
중국 출장 이후에도 12월 이벤트가 계속됐다. 돈 냄새가 나는 이벤트, 언제든 환영이다.
이번 이벤트의 호스트는 대한전력이었다. 이미 애자류 입찰로 짭조름한 선물을 안겨 준 대한전력이 산타할아버지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사장님!”
박아름 대리 목소리다. 이벤트 상세보기를 클릭한 사람일 것이다.
“들어와. 구매규격 새로 나온 것 때문에 그러지?”
“아, 네. 좀 전에 대한전력에서 컴팩트형 지상변압기랑 고효율 아몰퍼스변압기 구매규격 발표했습니다.”
“나도 방금 확인했어. 박 대리 보기엔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
박 대리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주어진 일은 아주 잘하는 박 대리. 우리 회사 짬밥이 1년 됐으니, 이제 업그레이드될 시점이다. 시키는 일을 넘어, 일을 찾아내고 생길 일을 전망하는 정도까지는 됐으면 좋겠다.
“네, 뭐. 이제 다른 회사들도 제품 개발에 힘을 쏟을 것 같습니다. 4월에 고효율주상변압기 나왔을 때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긴 합니다. 저번처럼 촉박하다는 불만은 안 나올 것 같지만…….”
“그런데?”
“음, 한편으로는 쉽지 않을 것도 같습니다. 개발 회사가 많지 않으면 우리 회사에 이득이겠죠.”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전망한 근거는?”
살짝 당황한 표정이었던 박 대리가 이내 원래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따박따박 말을 뱉어 냈다. 시키지 않아도 말이 많은 민희와 달리, 기회를 줘야만 말을 하는 박 대리. 그 기회를 기다리며 늘 준비하는 사람답다.
“그냥 제 생각인데요, 일단 품목이 두 개인 데다, 서로 완전 다른 품목이라 한 번에 둘 다 성공하기 쉽지 않을 것이고, 전기연구원에 시험 일정 잡기도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좋은 분석이네. 고효율 개발 때도 전기연구원 스케줄 꽉 차서 업체들 힘들어하긴 했지. 그리고 또?”
“이건 진짜 제 생각이에요. 현장 가서 듣다 보니까 고효율 아몰퍼스가 소음잡기 쉽지 않다고 해서요. 우리 회사도 겨우 개발했는데, 다른 업체들은 더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아마 내년 입찰 전까지 개발 성공하는 회사가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변압기의 변 자도 모르고 입사한 1년 차치고 잘했다. 이렇게 2년 더 채워서 ‘1만 시간의 법칙’대로 전문가가 되길.
“나름의 분석이 끝났으면 그에 따른 행동 요령도 있어야겠지?”
“네. 내년에 두 품목 배정량이 많을 수 있으니 미리 생산계획 잡아 볼 생각입니다. 공장장님께서 생산계획 알아서 짜 보라고 하셔서, 일단 되는대로 연간계획을 세워 볼까 합니다.”
“좋아. 잘하고 있어. 자재업무에 생산계획까지 짜느라 고생이 많네. 공장장님이 말은 그렇게 해도 은근 잘 삐치니까 계획 짜기 전에 충분히 상의하는 것 잊지 말고.”
“네.”
박 대리에 대한 아쉬운 점이 보인다. 칭찬을 해도 덤덤한 저 표정이 너무 아쉽다. 민희처럼 칭찬해 주면 환한 미소라도 보여 주지.
박 대리의 보고대로 우리가 개발한 두 품목의 구매규격이 진통 끝에 발표됐다.
구매규격 확정 전에 공청회와 보름간의 검토 기간이 주어졌는데, 중전기조합 회원사들의 의견 제시가 빗발쳤다. 대한전력이 제시한 규격이 문제가 많다는 반발이었다. 해당 스펙을 맞추기에는 외함이 너무 작다, 소음 기준을 높여 달라 등.
대한전력은 여러 의견을 묵살하고 구매규격을 확정해 발표해 버렸다.
묵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완벽한 성능으로 개발에 성공한 우리 때문이다. 다른 업체들이 죽는소리를 해도 ‘프라임일렉트릭은 개발했는데 너넨 왜 못하냐’로 나올 수밖에 없다.
두 품목 연간 발주액이 1,200억 원 정도이다. 부디 개발 실패한 회사가 많이 나오길. 후훗.
얼마 지나지 않아 안성파워 강호창 사장이 밥 먹자며 전화를 걸어왔다. 사실상 규격 발표 한 달 전부터 개발 프로세스가 진행됐으니, 슬슬 애가 탈 때가 된 것인가?
늘 가던 육회비빔밥 식당이 아닌, 한정식당으로 갔다.
“어, 지 사장. 어서 오게.”
“안녕하십니까? 일찍 오신 것 같습니다?”
“아녀. 나도 방금 막 왔어. 하하.”
늘 호탕하게 웃는 강 사장이지만, 오늘의 웃음소리는 농도가 옅게 느껴진다. 아쉬운 소리 하려니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가?
벨을 누르자마자 준비라도 된 듯이 음식이 들어왔다. 고소한 들깨죽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나같이 죽이나 수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양을 늘려 주면 좋겠다. 간장종지만 한 그릇이라 간에 기별도 안 가네, 쩝.
“사장님, 오늘 새 규격 발표했던데, 개발은 잘되고 계십니까?”
“개발이야 설계쟁이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그거 하라고 비싼 월급 주고 있는데, 못하면 혼구녕을 내야지. 하하.”
“안성파워야 기술로는 뒤처질 업체가 아니니, 잘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강 사장이 죽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나서 샐러드로 입가심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회사 방침을 바꿔야겠어.”
“네? 무슨 방침 말씀이십니까?”
“자네야 밖에서 보니까 우리 회사가 화끈하게 투자하면서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것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전혀 아니야. 우리는 안전한 길만 택한다 이거지. 자네는 우리 회사가 신제품 개발했다는 소리 들어 본 적 있나?”
“음, 제가 이쪽에 들어온 이후엔 들어 본 적이 없긴 하네요. 그래도 신제품 나오면 가장 먼저 개발해서 등록하지 않았습니까?”
이 바닥 메이저 업체들 행동양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대한전력의 우선배정제도를 활용해 공격적으로 운영하는 회사와 조합 입찰의 나눠 먹기에 기대어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회사.
전자는 말 같지도 않은 것으로 기술 개발했다고 우기면서 타 업체들의 욕을 먹기 일쑤다. 성능 개선됐다는 인정만 받으면 해당 물량의 10퍼센트를 받아먹으니, 좋게 볼 업체가 없다.
5년 전까지만 해도 횡행했지만, 최근엔 인정 요건이 강화되면서 잠잠해지긴 했다. 그래도 한 번 욕먹으면 계속 욕먹는다.
안성파워나 전우산업 같은 업체들은 후자이다. 기술력은 있지만, 무리하지 않는다. 누가 뭐 개발했다고 하면 바로 개발을 성공시키며 입찰 자격을 얻어 낸다. 욕보다는 대단하다는 칭찬을 받는다.
“따라가기만 잘해도 문제는 없지. 근데 프라임일렉트릭 성장하는 것 보니까 이거 배가 아파서 안 되겠더라고. 하하하. 우리도 뭐라도 개발해서 우선배정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고.”
“안성파워가 개발하면 우리 회사야 부지런히 따라가야죠. 서로 선의의 경쟁 하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자네가 개발할 것 다 해 놓고 무슨 선의의 경쟁이야! 앞으로 또 개발할 것 있으면 미리 언질만 해 주게. 이거 따라잡기도 힘들어 죽겠네. 하하.”
농담 섞인 부러움이었다. 질투가 좀 섞여 있지 않을까 면밀히 살펴봤지만, 찾기 어려웠다. 역시 든든한 내 편인 대인배답다. 분위기 잡고 빌드업할 정도로 농담도 깊어졌다.
“저희 같은 신생 업체들은 기술개발 말고는 답이 없지 않습니까? 사장님께서 너그러이 양해를 해 주시죠.”
“하하. 무슨 얼어 죽을 양해! 그 누구야? 동산중전기나 두성전기처럼 말 같지도 않은 걸로 우선배정 받아 가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기술로 정당하게 받아 가는데 내가 양해할 필요가 뭐 있어? 잘하고 있어. 초심 잃지 말고 이대로만 쭉 가라고.”
“하하. 감사합니다. 참, 제가 사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불렀는데, 자네가 할 말이 있다고? 허허. 나야 자네 말이라면 언제든 들을 준비가 돼 있으니 말해 보게.”
“저, 박준희 사장님이랑 조심스럽긴 하지만,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사장님께서 관심이 많으셔서 살짝만 말씀드립니다.”
“뭐? 그래? 아이, 이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준희가 내 딸이라면 자네 같은 사위는 얼마든지 환영이지! 정말 잘했네. 우리 준희에게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 주게나.”
역시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강 사장에게는 진행 과정을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넌지시 말했더니, 이미 돌잔치 금반지 고르고 있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이성으로서 좋은 감정 가지고 있다고만 했을 뿐인데…….
사랑의 메신저로 제 역할을 했다는 뿌듯함 가득한 강 사장과 준희 누나를 밑반찬으로 두고 한참을 얘기했다. 돌잔치에는 금반지가 아니라 10돈짜리 금목걸이를 가져올 모양이다.
“노파심인데, 나이는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남녀가 만나는데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야. 서로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그리고 준희는 누가 봐도 20대로밖에 안 보이잖아? 준희 걔가 지 아빠 닮아서 아주 동안이야. 정호 그 녀석이랑 같이 다니면 나를 삼촌으로 봤다니까. 하하.”
“아, 네…….”
어린이집은 애 태어나자마자 예약해야 한다는 말까지 듣지 않으려면 화제를 빨리 돌려야 한다. 이 동네 사람들은 중간이라는 것이 없는지 원.
“그나저나 사장님, 오늘 보자고 하신 건 뭐 하실 말씀이 있어서입니까?”
“아니, 내가 뭐 할 말이 있어야지만 자네랑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건가? 하하. 바쁜 사람인데 그냥 부르기는 뭐하지.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다음 주에 노후 변압기 교체용 입찰 있지 않나?”
“네, 지역본부별로 발주하는 것 말씀이시죠? 부산울산본부랑 광주전남본부, 두 군데가 나왔더군요.”
대한전력 새 규격 때문에 아쉬운 소리 좀 할 줄 알았더니, 헛짚었다.
다음 주부터 시작될 입찰에 관한 얘기를 하려고 했군. 조합 차원에서 들어가지 않으니 안성파워와 경쟁이 불가피했는데, 교통정리 좀 하자는 것인가?
“그래, 그거 말이네. 솔직히 지금까지야 우리랑 전우산업이 늘 나눠 먹었지. 그때야 소량이라 다른 업체가 신경도 안 썼지만, 이번엔 달라. 자네도 입찰 들어갈 거지?”
“양이 꽤 되는데,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관심을 안 보일 수가 없죠.”
쏟아질 물량이 대한전력 15개 지역 본부 다 해서 401억 원 어치에 달한다. 수의 계약으로 빠지는 것을 제외해도 입찰 규모로는 아주 매력적이다.
“그렇지. 자네 말고도 뛰어들겠다는 업체가 꽤 되더라고. 다른 업체야 신경도 안 쓰이는데, 자네는 몹시 신경 쓰여. 맘만 먹으면 다 잡을 수 있지 않나?”
“네, 뭐.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무리해서 먹을 생각은 없습니다. 매출 높이겠다고 마진 깎아 먹는 짓은 안 합니다.”
뜨거워질 뻔했던 대화가 메인 요리 등장으로 잠시 멈춰 섰다. 그 잠시 동안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담합이라도 하자는 것일까? 걸려서 과징금 물더라도 얻는 이익은 클 것이다. 그래도 불법은 불법이다. 하면 안 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양보를 요구하는 것일까? 나를 많이 도와주는 은인의 양보 요구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몇십 억짜리를 선뜻 양보하는 것이 잘하는 짓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신경 쓰이네. 아, 몰라.
“그래서 사장님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자네 같은 강력한 경쟁자가 손을 들어 주는 것이 제일 좋지 않나? 하하.”
강 사장이 잘 익은 떡갈비 한 점을 입에 넣고서는 고기 향을 풍기며 말했다.
역시, 양보였군. 강 사장과 관계를 생각하면 양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얻을 이익이 크지 않다.
잠깐의 독백에 강 사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하. 농담이네. 자네도 사업하는 사람인데 내가 뭐라고 회사에 손해를 끼치겠나. 우리 회사랑 컨소시엄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솔직히 전우산업 말고는 경쟁자가 없을 텐데, 우리가 손잡고 싹 먹어 치우자고.”
오늘 이 사람 여러 가지로 쥐었다 폈다 하네. 내 편인 강 사장이 나와 싸움을 택할 리 없지. 역시 내 편이야.
“저랑 사장님이 손잡으면 입찰이야 걱정할 것이 없긴 하죠…….”
“자네 말에 걱정이 많이 담겨 있는 것 같군. 일단 금성전기는 신경 안 써도 되네. 지금 하는 물량으로도 넘쳐 날 지경이라 더 할 여력이 없다고 했네.”
“아니, 벌써 진행을 하신 겁니까?”
“내가 자네랑 손잡겠다고 하면 준희가 가만있겠나? 하하. 서로 경쟁 관계이지만 우리가 그런 사이만은 아니지 않나? 하하.”
삼총사 포르토스가 아라미스는 걱정 말라고 주지시킨다. 우리 둘만 손잡는 것에 대한 염려를 말도 꺼내기 전에 씻어 내 버렸다.
우리 삼총사, 2년간 든든하게 뭉쳐졌는데, 뭉침이 흐트러져서는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