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48)
248 적과 동침
2월의 첫 해가 화려하게 떠올랐다.
일 년 중 가장 짧은 2월은 늘 그렇듯 대한전력이 물량 쏟아 내는 달이며, 확정은 아니지만 중전기조합이 무너지는 달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말겠다.
3일. 대한전력의 2월 1차 발주가 개봉했다. 작년에 무려 8,324대가 나왔지? 이번엔 몇 대나 나왔나 보자. 이런 예쁜 것들! 9,190대나 발주했어?
작년이었다면 신발 개발 하며 욕지거리를 쏟았겠지만, 이젠 대한전력이 예뻐 보인다. 그깟 9천 대. 가뿐하게 납품해 주고, 무려 99억 원을 손에 쥐자고!
대한전력의 물량질은 돈 보따리라는 기쁨을 안겨 주기도 했지만, 중전기조합의 계획이 뒤틀리고 있다는 의미여서 더 기쁘다.
우리 회사가 9천 대를 받았으면, 거긴 업체당 5백 대는 받았을 것이다. 대략 5억 정도.
재고품팔이에 과도한 욕심을 부리다 극심한 자금난을 겪던 중전기조합 업체들 중 결국 세 곳이 설을 앞두고 문을 닫았다. 그중 두 곳은 위장 회사 차린 곳이니, 총 다섯 곳이 화장터로 들어간 것이다.
위태롭다는 다른 업체들은? 내가 재고품 구매해 준 덕에 파고를 이겨 냈다. 이제 5억짜리 발주를 받았으니, 한숨 돌릴 것이다. 그래 봐야 얼마 못 버티겠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지 모르겠지만, 난 계획대로 움직일 것이다. 제3의 조합을 위한 뽐뿌질.
작년에 우리 조합 가입하겠다며 문을 두들기기도 했고, 우리 회사의 재고품 구매에 가장 고마워한 동아일렉트릭. 내 뽐뿌질에 응해 줄 유력한 후보다.
“이석균 사장님이시죠?”
“네, 맞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동아일렉트릭 이석균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라 경계하는 목소리이다. 핸드폰에 저장되지 않은 번호는 거의 스팸 전화인 세상이니 이해되는 반응이다.
“프라임일렉트릭 대표 지정수입니다.”
“아! 아이고, 지 사장님! 이거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어쩐지 목소리가 낯익다 했더니, 하하.”
뒤늦게 아는 척하는 이 사장. 대화 한 번 해 본 적 없는데 낯익은 목소리라니, 참.
“재고 변압기, 원가에 판매해 주셔서 감사 말씀드립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진짜 눈앞이 깜깜해졌는데, 자재 값이라도 받게 해 주시니 제가 오히려 감사를 드려야지요.”
동아일렉트릭이 만들어 둔 재고 변압기가 무려 570여 대에 달했다. 시가로 6억 원 어치. 미친놈이지 아주.
난 그걸 3억 원에 사들였다. 중신만 받아서 가뿐하게 다시 조립해 수출품으로 5억 원에 팔았으니, 앉아서 2억을 벌었다. 미쳤지만 고마워.
“조합 말 믿고 재고품 만드는 통에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말도 마세요. 지금도 생각할수록 혈압이 오릅니다. 내가 이 회사 15년 경영하면서 이런 위기가 없었어요. 진짜 사장님 아니었으면…… 아찔합니다.”
분위기는 어느 정도 조성된 것 같으니, 긴말할 필요도 없겠다.
“제가 그쪽 갈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찾아뵙고 인사나 할까 하는데요.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말이죠. 혹시 내일 회사에 계십니까?”
“아, 그럼요. 언제든지 오십시요. 오셔서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그럼 내일 2시경에 회사로 찾아가겠습니다.”
간만에 오이도 가서 바가지 쓰며 조개구이 맛이나 볼까나.
예전 연애할 때가 생각난다. 오이도 조개구이 집 가서 가격에 놀라고, 조악한 퀄리티에 또 놀라고, 집에 갔더니 장염 걸려서 또 놀라고.
“한 부장님! 갑시다.”
“예썰! 근데 이 차 충전 안 하고 한 방에 갈 수 있어? 가다가 빳데리 떨어져서 밀고 가야 하는 건 아니지?”
“잔말 말고 차나 타셔.”
시화공단 가는 일정에 동아일렉트릭 이 사장과 안면이 있는 덕준이를 끌어들였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변압기 팔기에 바쁜 놈에게 하루 정도 쉴 시간은 줘야지.
“요즘은 교통 진짜 좋아졌어. 그치? 여기 사람들 얘기 들어 보니까 예전엔 목포 가는 것도 시간 꽤 걸렸다잖아.”
무안광주고속도로에서 신 나게 달리다가 서해안고속도로로 진입하자, 덕준이가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극찬하고 나섰다.
“요즘이 아니라 예전부터 좋아진 거 아니냐? 88올림픽 하던 시절 얘기도 아니고.”
“88올림픽 기억도 못하면서 무슨. KTX도 우리 내려오고 나서 개통됐잖아. 우리 처음 나주 내려갔을 때도 KTX랑 버스랑 차이 없다고 버스 타고 간 거 기억 안 나냐?”
“그러고 보니까 그때가 벌써 3년 전이다야. 시간 너무 빨리 가는 거 아니냐?”
“그만큼 돈 많이 벌었잖아. 나도 배당금으로만 투자한 거 벌써 본전 뽑았다야.”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지, 예전 기억들이 자꾸 떠오른다. 퍼질러 자던 덕준이 깨워서 같이 나주 내려갔던 일, 허허벌판 혁신산단에 도착해 여기가 사막이 아닌지 눈을 비비며 쳐다봤던 일 등등.
“돈 많이 벌었지. 돈을 그렇게 써도 줄지가 않더라.”
“돈을 쓰긴 개뿔. 네가 돈 쓴 게 뭐 있다고 그러냐? 빌딩도 사고, 지하 주차장에 차 여러 대 전시도 해 놓고. 몸에 금붙이로 치장도 해야 돈 좀 쓰나 보다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없이 살아서 그런지 돈 쓰는 법을 몰라서 그래. 이래서 밥상머리 교육이 중요하다니깐. 너 결혼해서 애 낳으면 밥상머리 교육 잘해라. 궁상맞게 살지 않는 법, 이런 걸 잘 가르치라고.”
덕준이 타박에 때아닌 훈계를 했다.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에 고민 없이 돈을 쓰지만, 내가 가진 돈에 비하면 푼돈이다. 돈 쓰는 법도 빨리 익혀야지. 돈 묵혀 두다간 똥 될 것 같다.
“걱정 마세요, 회장님. 내가 또 돈은 막 쓰잖아. 설에 현금 두둑하게 뽑아서 백만 원씩 현찰로 돌렸더니, 아주 난리가 났어.”
“가족들한테?”
“가족뿐이겠냐. 친척들한테도 싹 돌렸지. 난 우리 아부지 그렇게 좋아하는 표정은 처음 봤다니깐.”
“명절이라고 돈 시원하게 뿌렸구만. 윤경 씨 차도 바꿔 줬잖아?”
“하하하. 나는 아주 돈 쓰는 재미가 쏠쏠해.”
연 소득이 5억에 육박하는 덕준이가 입이 귀에 걸린 채 신이 나 있다. 너무 신 나서 입이 찢어질 정도로 만들어 주마. 세무사 찾아가서 절세 교육 좀 받게 해 줄게.
오토파일럿 기능 걸어 놓고 편하게 운전하다 보니 금세 시화공단에 도착했다. 창원국가산단, 인천남동공단과 함께 중소기업 트로이카로 군림하는 시화공단. 가도 가도 끝없는 공장 밭이다.
동아일렉트릭 공장은 공장 밭 사이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었다. 덕준이가 브리핑에 나섰다.
“우리 공장에 비하면 완전 코딱지만 하지? 처음에 여기 와서 깜짝 놀랐다니까. 안에는 더해. 따닥따닥 붙어 가지고 숨이나 쉬어지는지 몰라.”
“야적장도 작은데, 재고품 꾸역꾸역 만든다고 난리도 아니었겠네. 욕심도 사정 봐 가면서 부려야지. 우리 아니었으면 가랑이 제대로 찢어졌겠네.”
“그래도 여기 이 사장은 양반이야. 우리한테 고맙다는 소리라도 하잖아. 철산중전기 그놈은 사람도 아니야.”
“그래서 망했잖아. 월급도 두 달이나 체불됐다던데, 명절 앞두고 직원들만 날벼락맞았지 뭐. 그나저나 여기는 주차할 데도 없네?”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동아일렉트릭에 들어갔다. 견인되면 이 회사 망하게 하리다!
이석균 사장과 첫 만남. 사실 중전기조합 신년회 때 얼핏 보긴 했다. 그때야 소리만 지르고 나오는 통에 제대로 안면도 못 텄지. 이제 안면 좀 트자고.
“아이고, 한 부장님! 아! 이분이 지 사장님?”
반듯하게 차려입은 정장이 무척 안 어울려 보이는 사람이다. 중소기업답게 등산복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나 온다고 차려입은 성의가 나쁘진 않군.
“반갑습니다. 지정수입니다.”
“제가 진작 인사하러 갔어야 하는데요. 프라임일렉트릭에 비하면 공장이 형편없지요? 돈 좀 벌어서 큰 공장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젠 꿈도 못 꾸게 생겼습니다. 하하.”
인사 한 번에 몇 곱절로 말이 되돌아왔다. 예전에 비해 나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으로 바뀌었으니 그럴 것이다. 돈 앞에서는 동지도 적도 없다더니…… 이제 내 동지가 되시오.
“서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시죠. 공장이야 뭐 볼 것도 없습니다.”
이 사장 안내로 사장실로 들어갔다. 공장에 비하면 사장실은 아방궁이다. 퍼팅연습기 있는 것 보니 중소기업 맞구나 싶다.
“미스 김! 여기 마실 것 좀 갖다 줘.”
경악스럽다. 아직도 직원을 저렇게 부르는 사장이 있다니! 세상이 5G 속도로 바뀌고 있는데, 갈라파고스도 아니고 참. 할 말만 하고 가자고.
“최근에 좀 어려웠다고 하시던데, 급한 불은 끄셨습니까?”
“사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변압기가 자재비 떼고, 인건비 떼면 남는 것이 없잖습니까? 이거 물건은 잔뜩 만들어 놨는데, 돈이 돌질 않으니 아주 죽겠습디다. 자재 업체들 날마다 전화 와서 결제해 달라고 난리고. 진짜 아찔했지요.”
사장들이야 입버릇처럼 돈 없다는 소릴 하지만, 이 사장 말에는 진심이 묻어 나왔다. 2년 연속으로 매출이 크게 줄어든 데다, 그거 만회하겠다고 욕심 부렸으니 진심이 아닐 수 없지.
“저야 덕분에 수출 물량 충당했으니 윈윈이죠. 하하. 그런데 조합은 그냥 놔두실 생각입니까?”
중소기업에서 귀빈에게만 준다는 병에 담긴 음료수를 따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사장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이다.
“내가 그래서 김익환이를 찾아갔어요. 솔직히 그놈 아니었으면 재고품 만들 일도 없었죠.”
“김익환 사장이 업체 돌아다니면서 재고품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했단 소린 들었습니다.”
“나주에서도 다 알고 계시네요? 허허. 김익환이한테 따졌더니, 아주 잡아뗍디다. 자기도 손해 많이 봤다고. 변압기 다 어디 있냐고 했더니 헐값에 팔았다고 하더라니까요.”
이 사장이 흥분도를 높이며 말을 토해 냈다. 적당히 뽐뿌질만 해 주면 동지가 될 것이란 확신이 든다.
“저는 동서변압기한테서 재고품 구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론 거긴 재고 만들지도 않았다고 하던데요.”
“그렇지요? 내 이랄 줄 알았어. 사장님, 혹시 그 소문은 들으셨습니까?”
무슨 말 하려는지 알 것 같지만, 화자의 성의를 생각해서 모르는 척 연기나 해 주자.
“무슨 소문 말씀입니까?”
이 사장이 허리를 수그리며 조용히 말하겠다는 포즈를 취했다. 다 들리지만, 나한테만 얘기하겠다는 그 자세.
“우리 조합 몇몇 회사가 서로 손을 잡았는데, 회원사가 너무 많아서 줄여야 한다고 했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런 얘기가 있습니까?”
모른 척하며 슬쩍 덕준이를 쳐다보니, 평온한 표정이다. 내 연기력에 감탄한 것인가?
“막말로 지들이 입찰 개판으로 해 놓고 죽게 생겼으니까 우리 같은 회사들 죽이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지들은 재고품 하나도 안 만들었다지 않습니까?”
“사장님께서 신중하게 살펴보셨어야 하는데, 좀 안타깝긴 합니다.”
“그래요. 뭐 인정합니다. 재고 생산한 것도 제 욕심이 맞아요. 근데 솔직한 말로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눈이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인자 조심해야죠.”
그래도 반성의 기미는 보이는군. 반성하는 업체들 잘 구슬려 주면 더 좋고.
“작년, 재작년 입찰 때 말이 많았습니다. 재작년 입찰 때는 중전기조합이 약속을 깨 버렸고, 작년 입찰 때는 위장회사 차린 거 다 아는데 업체 수대로 나눠 갖자고 고집 부리지 않았습니까?”
이 사장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중전기조합에 맘이 떠나 버린 느낌이다.
“알다마다요. 사장단 회의할 때도 반발이 좀 있었습니다. 우리같이 힘없는 회사들이 반발한다고 최 이사장이 꿈쩍이라도 할 사람입니까?”
“우리 조합 생겨서 중전기조합 쪽 회사들이 피해를 봤겠지만, 중전기조합이 잘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그래서 작년에 변압기혁신조합 들어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끌끌.”
이 사장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작년 여름이었다. 우리 조합 들어오겠다고 신청서 냈지만, 서류심사에서 광탈했다. 심사위원인 나와 준희 누나가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개나 소나 다 들어오면 되나.
“다른 회원사들도 불만이 많을 것 같습니다?”
“많다마다요. 회사는 망하게 생겼는데, 망하게 하겠다는 소문까지 돌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변압기혁신조합은 문을 걸어 잠갔고, 갈 데가 없잖습니까? 이사장 투표해도 숫자에서 밀리니 원.”
갈 곳도 없고, 이사장 바꾸는 것도 어렵다라. 그럼 답은 한 가지 아닌가? 내가 이 먼 길을 달려온 목적을 꺼낼 때가 됐다. 이런 걸 두고 적과의 동침이라고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