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92)
292 우퍼스피커
10월에 접어들자 슬슬 추위에 대한 공포가 찾아왔다.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더위와 싸우고 있었는데, 이젠 추위를 걱정할 때라니.
극심한 더위와 추위가 공존하는 이곳. 더군다나 석유 한 방울 나오는 이 땅. 단군 할아버지가 부동산 사기를 당한 것이 분명하다.
시월이 무르익으면서 추위의 농도가 진해지던 날, 이규철 부장이 검사부 직원들과 함께 창원으로 떠났다. 전력용 변압기 시제품의 마지막 시험인 단락시험이 있는 날이다.
절연물들이 파괴되지 않고 버티는지 규정상의 최고 전압으로 변압기를 후려 패는 것인데, 이게 복불복인 경향이 있다. 대비를 했어도 재수 없으면 절연물이 뒤틀리거나 파괴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시험비용도 억 소리 나게 비싸다. 무엇보다도 단락 얻어맞고 나면 변압기를 버려야 한다. 양심 없는 놈들은 정상 제품인 척 포장해 팔아먹기도 하지만,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미친 짓을 할 수 없지. 합격만 한다면 그깟 몇억쯤이야!
“공장장님, 잘 다녀오세요.”
이 부장이 출발하고 나서 공장장도 떠날 채비를 했다.
“단락 할 때마다 떨린단 말이야.”
“보강 확실하게 했으니까 이상 없을 겁니다. 가서 변압기나 잘 뜯어 주고 오세요.”
“허허. 그래야지. 결과 나오면 바로 전화할 테니까 대기하고 있으라고!”
단락시험이 변압기 내부의 절연물 변형 결과를 보는 것이라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꽁꽁 잠가 놓은 변압기 뜯어서 중신을 끄집어내야 하니 말이다.
공장장은 직원들 많이 갔으니 괜찮다고 해도 자기가 직접 봐야 한다면서 고집을 부렸다. 그 고집 덕분에 내가 편하게 회사 끌고 가는 것이겠지.
굳은 의지로 떠난 직원들에게 격려 한 사발씩 건네주고 나자, 나 역시 동요되기 시작했다. 합격했다는 결과가 들리기 전까지 마구 흔들릴 것이다.
쥐똥만 한 배전용 변압기야 여러 번의 경험이 있기에 신경도 안 쓰겠지만, 코끼리만 한 전력용 변압기는 처음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어제 잠을 설친 것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요 근래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하고 있다. 회사 일도 이상 무, 연애도 이상 무, 다 잘 풀리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고통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있는 가장 독한 욕을 퍼붓어도 모자랄 이 층간소음. 윗집에 악마 같은 것들이 이사 오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한참 뛰어 놀아야 할 애들이니 익스큐즈해 줘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발망치 소리도 아파트 생활에 익숙지 않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 발바닥을 젓갈 담아 버릴 것들은 양심이 없었다. 인간적으로 남들 잘 시간엔 조용히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참다 참다 올라갔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우리 개는 안 물어요’ 같은 개소리뿐이었다.
두어 번의 항의는 역효과를 냈다. 집에 풋살장이라도 차린 모양인지, 대놓고 쿵쿵거렸다. 사람 안 무는 개새끼들. 내가 그리 공손하게 얘기했건만.
악마들이 이사 온 뒤로 한 달 가까이 시달리다 보니, 층간소음으로 살인난다는 얘기가 허풍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래, 스댕. 내가 떠나자. 내가 이사 가고 집 전체에 우퍼스피커 달아 피를 말려 버릴 테다.
그런 이유로 안성파워 강호창 사장과 점심 약속을 했다.
어차피 시험결과 나올 때까지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을 테고, 강 사장과 노가리나 까면서 전원주택에서의 삶에 대한 강의나 듣자.
“지 사장. 아니지, 아니지. 지 회장이라고 불러야지. 아니, 회장 달았으면 얘기를 해야지 말이야. 내가 그것도 모르고 있으면 되나!”
양아버지 같은 강 사장은 오늘도 변함없이 시원시원한 얼굴로 맞이해 줬다.
“아휴, 이 나이에 무슨 회장입니까? 하하. 직원들이 헷갈린다고 해서 그런 거니까 그냥 편하게 불러 주시죠.”
“하하. 지 사장이 익숙하긴 한데, 뭐 지 회장도 부르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그나저나 전력용 변압기는 어떻게 됐나?”
익숙. 그게 참 무서운 말이다. 회장 소리도 자꾸 듣다 보니까 익숙해져 버렸다.
바지 속에 손을 넣고 나면 손가락 냄새를 맡는 것처럼, 그냥 자연스럽다. 못해도 중견기업은 되고 나서 회장 소리 듣겠다고 다짐했건만, 익숙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오늘 단락시험 들어갑니다.”
“아이고야. 일이 손에 안 잡히겠네?”
“그렇죠. 그래서 사장님께서 저랑 좀 놀아 주셔야 합니다. 하하.”
“그거 좋지. 안 그래도 심심해서 변압기 공장들 마실이나 다녀올까 할 참이었는데 말이야. 하하.”
강 사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바로 육회비빔밥이 들어왔다.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이 집. 나만 알고 싶은 맛집이다.
“사장님, 전원주택 생활은 어떠십니까?”
“아! 이거 참. 내가 이리 정신머리가 없네.”
강 사장의 동문서답. 육회비빔밥집에서 난데없이 정신머리를 찾는담.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하하. 아니, 우리 식구들 초대해서 대접 한번 제대로 해야지 생각하고는 뒤돌아서면 까먹고 말이야. 나이 드니까 머리가 깜빡깜빡 한다니까. 하하.”
“섭섭했습니다. 집 좋게 지어 놓고 한 번도 안 불러 주셔서요. 하하.”
“그래. 아예 날을 잡자고. 가만있자. 이번 주말에는…… 뭐 그래. 그깟 골프가 뭐 중요하다고. 토요일 어떤가? 준희랑 오붓하게 손잡고 오라고. 하하.”
층간소음으로부터 벗어날 대안을 찾고자 한 노력이 집 초대로 돌변해 버렸다. 이사 전 집 보는 과정이려니 하자.
“근데 제 질문엔 언제 대답해 주십니까?”
“어? 아! 그래그래. 이것 봐. 내가 이리 깜빡깜빡한다니까. 하하.”
육회비빔밥으로 맺은 우리 인연. 3년간 숙성되다 보니 33살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우정이 된 것 같다. 말이 좀 거칠어도 웃음으로 받아들이는 이 대화, 아주 좋다.
“아파트는 못 살겠더라고. 닭장 같아서 아주 답답해. 좀 덜 답답할까 싶어서 한강이 훤히 보이는 곳으로 갔는데, 그것도 뭐 하루이틀이지. 껌껌한 밤이나 돼야 집에 오는데 한강이 보이기나 해?”
“닭장도 닭장이지만, 층간소음도 아주 사람 미치게 하죠.”
“아휴. 그거 미치지. 내가 생긴 것과 다르게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야. 이게 안 들릴 때는 모르는데, 한 번 귀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아주 신경을 빡빡 긁어 버리지.”
내 답답한 속을 알아주니, 사이다 원샷하고 트림 시원하게 한 기분이다. 역시 대화는 공감대가 있어야 해!
“그래서 전원주택 사시니까 편해지셨습니까?”
“살아 보니까 게으른 사람들은 못 살겠더라고. 여름 되면 잡초 뽑아야지, 거미줄 치워야지, 가을엔 낙엽 쓸어야지, 겨울엔 눈 치워야지. 아주 일이 많아. 내가 회사 일보다 집 손보는 데 더 공을 들인다니까. 하하.”
일이 많다면서도 환하게 웃는 것이 그 생활이 아주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층간소음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깟 잡일 정도야 얼마든지 할 것 같다. 태양전기 시절 3년 내내 잡일을 했으니 그 정도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장님 처음 뵀을 때보다 훨씬 더 건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하하. 피부가 좀 까무잡잡해졌지? 마누라가 텃밭 가꾼다고 해서 좀 도와줬더니 이리됐지 뭔가.”
농부의 삶도 좋다. 내 기필코 우퍼스피커 달아서 복수하리다.
“근데 집은 왜? 자네도 집 한 채 지을라고?”
“저도 전원주택에서 살아 볼까 해서요. 사장님 댁이 경치가 아주 좋다고 하던데요. 남는 부지 좀 있습니까?”
“우리 집 아주 좋지. 배산임수에 남향이면 뭐 말 다 했지. 가만있자, 단지 분양이 다 끝났나 모르겠네. 이제 막 집들 올라가고 있긴 한데, 빈 땅도 많으니까 구하긴 어렵지 않을 거네.”
그래, 결심했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 보자. 나름 정들었던 아파트는 음향기기시험실로 바꾸고 말이야.
“예산은 어느 정도로 잡으면 됩니까?”
“하하. 나주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뭐 돈 걱정을 하나! 전원주택이야 돈 쓰기 나름이지. 넉넉하게 평당 천 잡으면 될 거네. 집은 돈을 들일수록 좋아지는 법이야. 아낀다고 대충 지어 봐야 그 돈이 그 돈이야.”
아무리 많이 써도 10억이면 떡을 치겠군. 165억 들여 기숙사 빌딩도 세우고 있는데, 그깟 10억쯤이야. 나도 이제 숙면을 취할 수 있겠다.
“커피는 금성전기 가서 마시자고. 말 나온 김에 집들이해야지 말이야. 거기 가서 준희한테 확답을 받고 오자고.”
“하하. 좋죠. 사장님 또 깜박깜박하기 전에 확정 지어야죠.”
“그래그래. 이건 내가 살 테니까 커피는 자네가 사라고. 하하.”
수능 끝난 고3들처럼 입만 열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좋다. 좋은 사람들과 노닥거리며 웃고 즐기는 삶이 더없이 좋다.
좋은 사람과 함께 예고도 없이 금성전기에 쳐들어갔다. 커피를 대령하라!
“아휴, 사장님. 연락이라도 주고 오시죠!”
“이웃사촌인데 아무 때고 오는 거지 뭐. 하하.”
삼총사 중에 가장 바쁜 사람이지만, 누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사업이 안정기에 접어든 안성파워나, 손대는 것마다 쉽게 안착해 버린 우리 회사와 달리 금성전기는 여전히 사장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래, ESS는 이제 슬슬 매출이 나오지?”
향긋하게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강 사장이 금성전기의 새 사업 안부를 물었다.
“아직 멀었죠. 빠르면 내후년엔 손익분기 넘어서지 않을까 싶어요. 뭐 손해 좀 봐도 꾸준히 밀고 나가면 언젠가는 되겠죠.”
“잘 생각했어. 마음을 느긋하게 먹으라고. 지금이야 혼란스러워서 그렇지, 그 바닥도 정리되고 나면 나아질 거야. 지 회장 돈도 들어갔는데 꼭 성공해야지. 안 그래? 하하.”
눈먼 돈이 쏟아진다는 세간의 평과 달리 ESS 시장은 과열로 치닫고 있었다. 내가 안 뛰어들길 잘했지. 누나야 10년 이상 장기로 보고 하겠다고 했으니, 그 뚝심을 믿고 응원해 줄 참이다.
“정수 씨, 3년 만 참아. 3년 뒤부턴 배당 섭섭하지 않게 해 줄게.”
“자본잠식이나 안 되면 다행이지. 난 없는 돈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요.”
내 투자 철칙이다. 돈은 주되, 간섭하지 않는다. 그렇게 첫 투자를 받아 간 도연테크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금성전기 ESS사업도 성공하거라.
“박 사장, 이번 주 토요일에 별일 없지?”
강 사장이 집들이로 화제를 돌렸다.
“요즘은 주말에 쉬기 바빠죠. 회사 일이 많아서 주말에 충분히 안 쉬면 힘들더라구요. 하하.”
“한창 때인데 죽는소리하기는. 하하. 토요일에 우리 지 회장이랑 같이 우리 집에 놀러 와. 내가 이제야 집들이를 하네.”
“좋죠. 안 그래도 왜 안 불러 주시나 했어요. 사장님 댁 구경해 보고 좋으면 저도 그 옆에 하나 지을까 봐요. 하하.”
누나도 전원주택 노래를 불렀다. 이 사람도 층간소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인가?
“누나네도 층간소음 심해? 우리 윗집은 아휴, 악마들도 아니고 아주 죽겠어.”
“인천 집은 주상복합이라 안 그러는데, 여긴 좀 심하더라고. 그냥 음악 틀어 놓고 참는데, 신경 쓰이긴 해.”
층간소음으로부터 해방된 강 사장이 부동산 개발업자로 나섰다.
“이게 말이야. 가족이라도 있으면 좀 덜한데, 혼자 살면 더 잘 들리는 법이야. 이참에 둘 다 우리 동네로 넘어오라고. 공장까지 30분 거리니까 얼마 멀지도 않아. 뭐 둘이 같이 집 좋게 지어 놓고 살면 되겠구만. 하하.”
“하하. 그렇게 돼도 사장님께 주례 부탁드리는 건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아휴, 저번에 너무 길었어요.”
강 사장의 살림 차리라는 제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사귀라는 압박을 넘겼더니 이제는 결혼하라는 압박이네. 나도, 누나도 이게 마지막 연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혼례도 언젠가 치르겠지 뭐.
대화 삼매경에 빠져 세월아 네월아 유유자적하고 있자니, 허벅지를 강타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공장장의 전화!
“네, 공장장님! 시험 끝났습니까?”
“하하하. 결과가 아주 좋아. 얼마 뒤틀리지도 않았어. 합격이야, 합격!”
“하하. 고생 많으셨습니다. 거기까지 가셨으니 아귀찜이라도 드시고 좀 놀다 오세요.”
“아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암튼 합격했으니까 맘 편히 있으라고.”
뛸 듯이 기뻤지만, 최대한 자제했다. 기쁨은 함께하기만 해도 배가되니, 내가 굳이 과하게 내색 안 해도 될 것이다.
“시험 합격이래?”
“이제 성적서 나올 일만 남았습니다.”
“하하. 지 회장 축하하네. 이야, 중소기업이 전력용 변압기도 만들다니, 이거 대단한 일이야!”
부동산 개발업자의 전원주택단지 분양설명회가 중소기업 최초로 전력용 변압기 시장 진출을 축하하는 자리로 단박에 바뀌었다.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바빠질 텐데 부지런히 해야죠.”
“나한테 감사할 일이 아니라, 준희한테 감사해야지. 아니지, 정호한테 감사해야지. 그런 장인 둔 건 큰 복이야, 복. 하하.”
박정호 사장이 언제 또 장인이 됐지? 그래 뭐, 기분 좋다. 장인어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