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84)
084 중화 만찬
오늘 저녁은 중화요리다. 일요일은 아니지만 짜장면이 끌리는 날이다.
대한전력 이춘배 본부장이 대접한다고 찾아갔던 그 중식당. 그 산해진미들을 맘껏 먹지 못하고 구경만 했으니, 오늘 제대로 먹어 볼 테다.
따뜻한 보위차 마시면서 자차이로 빈속을 달래 주고 있으니, 상무가 애들을 데리고 룸으로 들어왔다. 영업쟁이답게 타이밍 맞추는 것이 아주 예술이야.
“황 여사님! 오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얼굴이 아주 싱글벙글이네?”
“상무님. 어서 오세요. 애들이에요?”
“얘들아. 인사드려라. 너네들 대학까지 보내 주실 사장님이시다. 큰애가 상우, 작은애는 소연이.”
“안녕하세요!”
요즘 애들은 딴 것은 모르겠지만, 인사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아이돌들이 데뷔 연차에 따라 허리가 직각으로 꺾일 정도로 인사하는 것만 봐도 그렇지. 듣던 대로 똘똘하게들 생겼군.
“반가와요. 정수 삼촌이에요.”
살짝 고민했지만, 미련을 버렸다. 내 나이면 삼촌뻘이지. 형, 오빠 소리에 대한 미련을 갖지 말자.
“우리 사장님도 이제 삼촌 소리 들을 정도가 됐네. 사장님! 빨리 여자 만나서 결혼 좀 해!”
“아빠. 아빠는 사장님한테 반말해도 되는 거예요?”
우리 상무, 오자마자 딸내미한테 한 방 먹고 시작하는군.
“하하. 제가 우리 상무님이랑 형 동생 하는 사이라 그래요. 다른 회사 같았으면 어림도 없죠. 상무님 그렇죠?”
“네, 사장님. 맞습니다.”
“아휴. 어색하게 왜 그래요. 하던 대로 하세요.”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시간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더없이 좋다. 애들은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근데 황 여사. 사장님이랑 뭐하고 왔길래 그리 싱글벙글이야?”
“사장님이랑 아파트 계약하고 왔어. 잔금만 치르면 바로 입주할 수 있대. 상우랑 소연이 방 하나씩 줘도 돼. 자기야. 우리 TV 바꿀 때 되지 않았어? 냉장고도 좀 오래되긴 했는데.”
“이 사람 그리 아파트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소원 성취했네. 얘들아. 너네 어머니 신이 나셨다야.”
이쯤에서 슬쩍 치고 들어가면 되겠다.
“상무님. 제가 무리해서 최고급 아파트로 뽑아 드렸으니까, 한 일흔 살까지만 일해 주세요. 공장장님은 아흔 살까지 하기로 했는데, 상무님은 일흔까지만 계셔도 됩니다.”
“공장장님이 아흔 살까지 한대? 그 양반은 무슨 목숨 줄에 그리 욕심이 많아. 근데 일흔까지면 앞으로 20년을 더 일하라고? 아이고 죽겠네.”
“형수님은 사장 되셨는데, 상무님도 분발하셔야죠. 하하.”
아빠를 한 방 먹인 당돌한 소연이가 놀란 표정으로 상무를 쳐다본다.
“아빠. 엄마 사장 됐어? 무슨 소리야?”
“어. 너네 엄마 사장님 되셨단다. 엄마 이제 사장님이라 바쁘니까 앞으로 너네들이 저녁 차려 먹고 집 청소도 해 놓고. 알았어?”
“아이 진짜.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아빠는 꼭 딴소리하더라.”
“진짜 사장 됐다고! 엄마한테 물어봐. 이것들은 내 말은 믿을 생각을 안 해.”
“소연아. 엄마가 이따가 집에 가서 얘기해 줄게. 오늘은 얌전히 있자?”
확실히 애들은 아빠 말보다 엄마 말을 잘 듣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여 주고 씻겨 주고 재워 주면서 두껍게 이어 온 끈은 함부로 끊어지지 않는 법이지. 일에 치어 살 수밖에 없는 아빠야 주말에 누워서 비행기나 태워 주는 정도 아닌가.
요리가 나왔다.
게살수프. 쌀쌀한 날씨에 게살수프 한 그릇이면 오장육부가 땀을 흘릴 정도로 뜨뜻하니 좋지. 거기에 자차이 두툼하게 집어서 같이 씹어 먹으면, 라면과 김치 조합도 부럽지 않을 궁합이다.
“오늘은 일 얘기는 전혀 하지 않는 걸로 하시죠. 저도 간만에 맘 편히 저녁 좀 먹고 싶습니다.”
“나야 땡큐지. 근데 우리 사장님 아마 백프로 일 얘기할걸?”
“혹시나 일 얘기 나올 법하다 싶으면 상무님이 브레이크 좀 걸어 주세요.”
오리알 냉채가 나왔다. 중국집 코스 요리에서 쉬어 가는 타임이지. 앞으로 나올 기름 걸쭉한 음식들 먹기 전에 놀라지 말라고 나오는 요리. 난 이것도 맛있더라.
“사장님은 연애 안 해요? 이러다 친한 동생처럼 마흔 넘어서까지 혼자 지낼까 걱정이에요. 아니, 인물 좋아, 인품 훌륭해, 거기에 돈도 잘 벌어. 일만 줄이고 살면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
반차 쓰고 집 보러 간 날 이후 황 대리가 틈만 나면 연애 타령이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사람들은 명절마다 그리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더라. 나도 이제 그 시기에 도달했군.
그래도 누가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저런 얘기 들을 때마다 참 고맙다. 요즘 들어 연애 안 하냐는 소리를 부쩍 듣긴 하지만.
“그래서 저 소개팅 하기로 했습니다. 아는 분이 대뜸 조카 소개해 준다고 하더라구요.”
“소개팅 한다고? 박 사장은 어떻게 하고?”
“아휴. 아무 관계 아니라니깐 진짜.”
딸 소연이 말이 맞다. 상무님은 꼭 저렇게 딴소리를 한다.
“자기야. 박 사장이라면 그 금성전기 박준희 사장 얘기하는 거야?”
“어. 둘이 같이 저녁도 먹고 그랬나 봐. 왜 저번에 공장 준공식 할 때 찾아오기도 했잖아?”
“아! 생각난다. 그 뭐랄까 부티 나게 생겼던데. 그 박 사장도 솔로야?”
아휴. 장소팔 고춘자 만담 디너쇼도 아니고. 이래서 결혼 적령기들이 명절 스트레스를 겪는다고 하는구나.
“자꾸 그러면 저 일 얘기 합니다.”
“사장님은 박 사장이 별로예요? 비슷한 또래 같던데, 얼굴도 이쁘고.”
미련 많은 황 대리.
“저보다 나이 세 살이나 많아요. 연상은 누나 같아서 여자로 안 보여요.”
“어머나. 연상이에요? 엄청 동안이네. 난 많아 봐야 서른이나 되는 줄 알았는데.”
이 만담쇼는 제가 박 사장과 결혼해서 애 낳고 키워서 시집장가 보내야 끝이 나렵니까!
“아무튼 누가 됐든 잘 좀 만나 보세요. 사장님 같은 인물이 연애를 안 하는 것은 이 나라를 위해서도 좋지 않아요. 소연아. 너네 학교에 괜찮은 선생님 없니?”
이젠 소연이네 학교 선생님과 결혼해서 애 낳고 키워야 하는 것인가!
“전가복 나왔습니다.”
구세주 출현이다. 어휴, 새우 튼실한 것 봐라. 송이 냄새도 나는데? 침 넘어가네. 이럴 때 빨리 화제를 돌리자.
“상우? 상우는 내년에 고2 올라가는 거예요?”
“네.”
자기 세계에 빠져 사는 고1 남자애 모습 그대로군.
“문과예요, 이과예요?”
“이과요. 아빠가 문과 가면 때려죽인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이과로 갔어요.”
“하하. 나중에 아버지한테 고마워할 거예요.”
수학 싫어서 문과로 도망쳤다가는 대학 졸업할 때쯤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야.
이공계 위기라는 말 들어 봤지? 이공계는 위기라도 있었지, 문과는 아예 바닥이라 위기랄 것도 없어. 그냥 쭈욱 바닥 그 자체야.
“사장님, 고슴도치긴 해도, 우리 큰애가 공부를 좀 잘해. 하하. 그래서 나주 내려오자고 했을 때 저 사람이랑 엄청 싸웠어. 아휴 말도 마.”
“아이고, 대리님. 아니 형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상우 대학 등록금은 책임지겠습니다.”
황 대리가 그때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을 받아 낸다.
“저 진짜 고민 많이 했어요. 그 고생을 하면서도 애들 하나 믿고 버텼는데, 지방 내려와서 혹시나 애 성적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나주니까 농어촌 특별전형도 있고, 오히려 기회가 더 많을 수도 있어요.”
“농특전형 받으려면 최소 6년은 살아야 해요.”
“아하. 그렇군요. 상우 학생 공부 열심히 해야 해요!”
상우 인마. 너 입시 성적에 내가 칭찬을 수거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되는 거야. 삼당사락이다. 반딧불 모아서 공부해라.
“저 의대 갈 거예요. 여기 와 보니까 전대나 조대가 의대 좋다고 해서 가 보려구요.”
이 패기 쩌는 자식! 그래! 꿈은 크게 꾸는 것이야!
“그래요. 열심히 해서 의대 가면 이 삼촌이 등록금 내줄게요.”
팔보채가 들어왔다. 졸업식 날에나 먹을 수 있었던 팔보채. 졸업식이 아닌데도 팔보채를 먹는다면 온 동네 자랑하기 바빴던 그 팔보채.
요즘이야 결혼식 뷔페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요리이지만, 어렸을 때는 유명한 이름과 달리 접하기 어려운 요리였다. 나만 그랬나?
“둘째는 공부 잘해요?”
“소연이? 얜 착해.”
“푸하하하. 아이고, 소연 학생 미안해요.”
부모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자식 자랑은 ‘우리 애 공부 잘한다’이고, 그렇지 않다면 ‘착하다’로 통일된다. 착하면 됐지 뭐.
“큰애는 엄마 닮았는데, 얘는 나 닮았나 봐. 소연아, 너 나중에 아빠 따라다니면서 영업 배울래?”
“사양하겠어요.”
“이이는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왜! 영업이 어때서! 내가 영업하면서 다 먹여살렸구만. 나 참.”
장소팔 고춘자 만담 디너쇼가 또 펼쳐질 모양이다. 팔보채 나온 기념으로 빠른 화제 전환에 들어가자.
“형수님. 우리 희철이 형님이 엄청 들이댔다고 하던데, 어땠어요?”
“아이, 사장님. 왜 또 그래. 우리 부끄러운 과거는 꺼내지 말자고.”
“상무님. 일 얘기할까요?”
황 대리가 가소로웠던 그 시절을 기억하며 헛웃음을 짓는다.
“하하. 진짜 내가 사기당했지. 그때 저이가 과장이었어요. 전 회사 들어온 지 얼마 안 될 때라 과장이면 엄청 높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영업할 때 주눅 들지 말라고 그냥 과장 달아 준 거였더라구요.”
상무의 치부가 드러날 것 같은 기대감이 커진다. 이거 흥미진진하다.
“그래서요?”
“일 알려 준다고 툭하면 불러 대고 얼마나 귀찮게 했는지 몰라요. 깔깔깔. 내가 미쳤지.”
“얘들아. 이게 팔보채야. 아빠가 어렸을 때는 엄청 귀한 음식이었어. 귀 닫고 이거나 부지런히 먹자.”
오히려 역효과다. 애들 귀 저리 커진 것 좀 봐. 엘프도 아니고 어떻게 귀가 저리 커질 수 있나!
“사장님, 태양전기 사무실 알죠? 현장 옆에 붙어서 2층에 있잖아요. 철제 계단으로 올라가고.”
태양전기 사무실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니 갑자기 짜증이 확 올라와 버렸다. 고성방가의 산실인 그 사무실. 다신 기억하고 싶지 않다. 빨리 잊자.
“하루는 삐삐로 나오라고 하길래 계단 난간에서 무슨 일인가 쳐다보고 있는데, 어디서 들꽃 한 움큼 꺾고 왔는지, 1층에서 꽃을 받아 달라고 서 있는 거예요.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그 꽃 사 온 거야.”
“아휴. 듣는 제가 다 화끈거릴 정도네요. 그래서 어떻게 이어진 거예요?”
“몰라요.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들이대는데, 저라고 당해 낼 재간이 있었겠어요. 소연아, 이 엄마가 니 아빠 땜에 연애도 못해 보고 이러고 살고 있어. 너는 나중에 크면 연애 많이 해야 한다. 알았지?”
“지금은 연애하면 안 돼? 나 서울에서 왔다고 관심 보이는 애들 좀 있는데?”
“안 돼.”
주부 9단 여전사 탄생 설화가 이렇게 만들어졌군. 양념이나 쳐 주자.
“예전에야 그 방식이 통했지, 요즘은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열 번 찍다 보면 쇠고랑 차더라구요.”
“맞아요. 요즘 말로 치면 완전 스토커였어요.”
“사장님, 올해 민수 변압기 매출이 40억은 넘었지? 내년엔 최소한 60억까지 올려 볼게.”
상무의 줄행랑이 아름답다.
중국집 전통의 강호 탕수육과 신흥 강호 깐쇼새우가 한 번에 나왔다. 둘 다 옳다.
고추잡채에 식사로 짜장면까지 능숙한 드라이브로 처리하고 나니 포만감이 가득 밀려왔다. 열대 과일과 매실차로 포만감을 달래 주니 완벽한 한 끼가 완성됐다.
“사장님, 덕분에 아주 잘 먹었습니다.”
“아닙니다. 진즉에 직원들 가족 동반으로 맛있는 것 대접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내년에 돈 많이 벌면 해외여행 한 번씩 보내 드릴게요.”
줄행랑 쳤던 상무도 추억이 즐거웠던지, 아니면 음식이 좋았던지 기분 좋은 표정이다.
“사장님, 내가 영업 빡세게 해 올게. 다 같이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 잔씩 하자고.”
“몰디브랑 모히또랑 바뀐 것 아니에요?”
“내가 그래서 연애 좀 하라고 하잖아! 연애를 안 하니 영화도 안 보고 다니는 것 아녀! 최신 영화 유행어 정도는 꿰고 있어야지!”
얼마 전에 개봉해서 인기 좀 끌고 있다는 그 영화에서 뭐 나왔나 보네. 그래, 나도 문화생활 좀 하고 살자.
“자, 상우, 소연. 이건 삼촌이 주는 용돈이에요. 그냥 받으면 돼요.”
기분 좋게 신사임당 두 장씩 꺼내 용돈으로 건넸다. 돈 벌면 꼭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 아저씨들이 천 원짜리 한 장 주면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애들이 어정쩡한 자세로 신사임당을 손에 쥐고는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인다. 받지 말라는 엄마의 눈빛을 읽었을 것이다. 받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내 어찌 모를쏘냐.
“하하. 엄마 눈치 받지 말고 받아요. 너희들도 너희들 인생을 즐기며 살아야지요. 엄마한테 뺏기면 안 돼요.”
“감사합니다!”
기분 좋다. 그냥 좋다. 차에 타서 집에 돌아가는 화목한 가족을 바라보니 마냥 흐뭇하다. 나도 지금은 혼자 공장으로 돌아가지만, 머지않아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