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85)
085 고마운 사람
내 인생에서 가장 바빴던 한 해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막달만 무사히 보내면 더 바쁠 한 해가 다가올 것이다. 산 넘어 산!
12월에 접어들면서 찬물로 샤워하기 힘들 추위가 찾아왔지만, 공장은 여전히 열기가 뜨끈뜨끈하다. 대한전력이 물량을 쏟아 내고 있으니, 아주 뜨거운 연말이다.
발주가 확정된 대한전력 12월 납품분까지 출하를 끝내면, 관수 매출로 259억 원이 찍힌다. 연간 계약액이 802억 원이니, 석 달 만에 32퍼센트가 쏟아진 것이다.
내년 1분기까지는 계속 발주 물량이 쏟아질 것이다. 대한전력 놈들이 고맙긴 하지만, 발주 좀 균등하게 해 주지.
뜨끈뜨근한 현장은 공장장이 잘 관리하고 있으니, 괜히 순시한답시고 방해하지 말고 넘어가자.
발길을 설비 제작동으로 돌렸다. SPRD 제작 설비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궁금했다. 대한전력 님들께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으니, 양산 체제를 갖추는 것이 시급했다.
“부장님, 저 왔습니다.”
유재준 부장은 여전히 구리스 범벅이다. 구리스가 피부 탄력에 좋은가.
“사장님 오셨어? 조금만 더 있다 오지. 먼저 오니까 김새네.”
“SPRD 제작 설비 설계 나왔습니까? 연말이나 돼야 윤곽이 나올 줄 알았는데, 역시 부장님입니다.”
“뭐 설계를 내가 했나. 이사님이 진짜 만능맨이야. 모르는 것이 없더라고.”
“제가 여기 올 것이 아니라 이사님을 찾아갔어야 했네요.”
허허벌판 빈 공간으로 남았던 사무실 3층 연구실로 급히 올라갔다. 설계자 3명에 보조 인력 2명을 붙였더니, 넓디넓었던 공간에 제법 사람 냄새가 난다.
SPRD 대량 생산은 설비만 갖춘다면 식은 죽 먹기이다. 설비가 뜨거운 죽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금형 만들어서 다이캐스팅머신으로 찍어 낸 다음 가공해서 조립하면 된다. 말이 쉽지, 관건은 다이캐스팅머신이다. 설비 라인 하나당 5억 원은 깨질 각오를 했다.
유 부장이 직접 제작해 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변압기 공장 오기 전에 사출기 제작 공장에서 6년간 일했던 경험으로 헤딩해 보겠다는 것이다.
설계도 없이 가능할지 미심쩍었지만, 우리에겐 김신우 이사가 있었다.
김 이사가 재직했던 아모피스는 아몰퍼스 원단 제작하다 사업을 접었지만, 원래는 다이캐스팅머신과 사출기 제작으로 돈을 벌었던 회사였다.
머신 설계로 입사했다가 아몰퍼스 원단 쪽으로 넘어간 것이란다. 밥 먹다가 돌을 씹었는데, 꺼내 보니 금덩이였달까?
“이사님! 설계 다 됐다는 소식 듣고 왔습니다.”
“사장님, 어서 오세요. 간만에 하느라 고생 좀 하긴 했습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 줄 것 같은 사람 좋은 김 이사. 김 이사 하고 싶은 것 다 해.
“제가 설비 쪽을 전혀 몰라서 그러는데, 이렇게 빨리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전 못해도 연말이나 돼야 될 줄 알았는데요.”
“저 혼자서는 어림도 없죠. 형택이가 있었으니까 이렇게 속도를 냈지, 혼자였으면 천년만년 기약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하.”
김 이사가 데려온 설계자 최형택 부장. 아모피스가 구조 조정할 때 김 이사와 함께 보따리를 쌌던 사람이다. 설비 설계로는 손꼽을 실력자인데, 구부러지지 않고 부러져 버리는 강인한 성격 탓에 경영진에게 밉보인 것이 보따리를 싸게 만들었다.
최 부장이 우리 회사 오겠다고 했을 때, 요구 사항은 딱 하나였다. 성과를 확실하게 보여 줄 테니 중간에 끼어들어 간섭하지 말라는 것.
아모피스 나온 이후에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다 맘에 들지 않아 쳐다보지도 않았다면서 나온 말이었다.
나야 땡큐인 요구였다. 알아서 잘하겠다는데 내가 간섭할 이유가 뭐 있나?
그렇게 김 이사와 최 부장이 한 달 가까이 밤낮으로 끙끙거리더니, 결국 설계 완성이 눈앞이다.
둘만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자동권선기로 설비 제작의 신으로 등극한 유 부장이 온갖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 SPRD 제작 설비가 ‘으마으마’해졌다.
“최 부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설계 확실하죠?”
“다이캐스팅 머신은 오랜만이라 걱정이긴 한데, 예전에 한 것도 있으니까 아마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설계만 갖다 주면 유 부장님이 귀신같이 만들어 낼 테니까, 마무리만 잘해 주세요.”
“이건 다 끝났다고 봐도 됩니다. 바로 자재 발주 들어가서 이번 주부터 작업 들어갈 수 있게 준비해 놓겠습니다. 근데 사장님.”
최 부장이 의지에 찬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경험이 쌓여서 그런지, 직원들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찾으면 기대부터 된다.
“네, 말씀하세요.”
“여기가 변압기 회사라 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긴 합니다만, 제 주특기가 설비 쪽 설계라 그쪽으로 전념하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음. 그러면 김진욱 부장님이 좀 힘들지 않을까요?”
“김 부장님은 저랑 같이하는 것이 더 힘들 수도 있어요. 하하. 제가 현장 돌아다니면서 설비들 보니까 놀랍긴 한데, 개선할 부분이 많아 보입니다. 변압기보다 설비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솔직히 변압기 설계는 별게 없다. 이렇게 얘기하는 나야 쥐뿔도 모르지만.
물리 시간에 우리를 미치게 만든 여러 이름 붙은 공식들. 쿨롱이니, 옴이니, 줄이니 하는 법칙들과 공식들을 원하는 용량과 크기에 맞춰 계산하면 된다.
엑셀로 계산식 틀만 제대로 만들어 주면 결과치가 나온다. 공장장이야 엑셀을 할 줄 몰라서 매번 계산기 두들겨 가며 설계 뽑느라 고생했지, 설계자들은 엑셀과 캐드야 눈감고도 할 정도로 전문가 아닌가.
공장장이 데려온 설계자 김진욱 부장은 오자마자 틀부터 만들어 놨으니, 지금 하는 일은 키보드 숫자 자판 두들기는 일뿐이다.
최 부장의 발언은 무선 통신병 주특기 훈련하듯이 숫자 자판 두들기는 일이 싫다고 선언하는 꼴이다.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고 싶다라. 이 사람 일 욕심이 많다더니, 이거 무서울 정도네.
“변압기 설계 일이 많긴 한데,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이라면 제가 마다할 이유가 없죠.”
“감사합니다.”
“대신 부장님이 변압기 설계에서 빠지는 만큼 새로 사람을 채용해야 하니까 그 이상으로 뽑아낼 수 있는 결과는 내야 합니다.”
“그거야 당연하죠. 제가 설비 쪽에서 확실하게 성과를 낼 테니까, 믿고 맡겨 주시죠.”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조직에 맞춰 사람을 우겨넣어서 억지로 쥐어짜느니, 그 사람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는 것도 좋지 않겠나.
최 부장! 내가 안 고쳐 쓸 테니까 어디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실력 발휘해 보셔.
김신우 이사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춥긴 하지만, 담배 피우면서 얘기하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져 좋은 얘기들이 많이 나오니 말이다.
“담배 있으세요?”
“그럼요. 저는 담배 끊으라고 갈구는 회사는 많이 봤어도 담배 맘 놓고 피우라고 담배 주는 회사는 처음입니다. 하하.”
처음 회사 세울 때 담배 무한 제공하겠다는 공약을 괜히 한 것 같기도 하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일하라는 취지였지만, 직원들 건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담배 안 피우는 대부분의 직원들과 형평성도 생각해야 할 것 같고. 일단은 피고 보자.
“좋은 것 아니니까 너무 남용하지 마세요. 하하. 최 부장님은 다른 분들이랑 잘 어울립니까?”
“저도 그게 좀 걱정이긴 합니다. 형택이 그놈이 성격이 참 모나서. 좀 유들유들하면 좋겠는데, 한 번 아니라고 생각하면 죽어도 굽히질 않으니 원. 원래 엔지니어 들이 예민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저한테 설비 설계로 빼 달라는 얘기를 하는가 싶어서요. 이사님이 중간에서 잘 조율해 주세요.”
“저야 아몰퍼스 코아 제작기 만들어지면 거기에 전념해야 하니까 잘될까 걱정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분사할 때 형택이도 데리고 가면 어떨까 싶은데요.”
역시 담배 피우면 좋은 얘기가 나오는구나. 원래 분사를 생각한 것이 설비 제작 때문이었으니, 이 기회에 설비 제작 분사도 준비하면 되겠다 싶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이사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한테요?”
“네. 이번에 코아랑 SPRD 제작 쪽 분사하면서 이사님을 사장으로 생각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오신 지 얼마 안 돼서 이런저런 말이 나올까 염려한 부분이 많았거든요.”
“아이고, 사장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나이 먹고 이렇게 일하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무슨…….”
이 사람은 승진 욕심이 없는 것인지, 사장 앞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직장인이라면 욕심도 부릴 줄 알아야지 원.
“제가 황 대리님한테도 얘기해 둘 텐데, 분사하고 나면 후배들 잘 키워 주세요. 이사님 없이도 코아 제작이 문제없다고 한다면, 이사님께 설비 제작 부서 분사해서 맡길 생각입니다.”
“사장님, 저는 정말 일만 할 수 있으면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설비 제작이야 재준이가 지금껏 고생하면서 해 왔는데,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뺄 수 있습니까?”
“하하. 이사님은 욕심을 내실 필요가 있어요. 인류 문명이 발전한 것도 욕망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당장은 아니지만, 최 부장님하고 유 부장님 셋이서 회사 한번 크게 키워 보세요. 유 부장님은 조립하는 것만 좋아하는 분이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러고 보니 유 부장도 참 욕심이 없다.
이 사람들 덕분에 회사가 여기까지 왔지만, 우리 회사가가 더 크려면 기존 직원들이 욕망을 표출할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나 혼자서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장님, 제가 여기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까 진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직 뭐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저를 믿고 이리 신경 써 주시니 이거 참.”
그렇게 얘기하니까 당신을 믿는 것입니다. 수오지심을 아는 사람은 믿어도 됩니다.
“그럼 엄청난 성과를 보여 주시면 됩니다. 하하.”
“네, 사장님. 이 몸이 허락할 때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휴, 오글거려. 이 사람 격의 없이 까고 갈구는 회사 분위기에 익숙해지려면 아직 멀었군.
얼마 지나지 않아 SPRD 제작기 설비가 완성됐다. 다이캐스팅과 조립까지 세트로 구성된 설비.
유재준 부장을 필두로 한 설비 제작동 조립 귀신들이 달라붙어 2주 만에 제작을 끝냈다. 눈치 귀신만 많은 줄 알았더니 조립귀신도 한 가득이다. 신과 함께라도 한단 말인가.
“역시 가동은 문제없겠죠?”
“그럼. 내가 누구야! 이제 이 정도는 껌이야.”
누구긴 조립 귀신 유재준 부장이지.
“시간당 생산량은요?”
“100에서 120개 정도로 예상하는데, 일단 지켜봅시다. 예상대로만 나와 준다면, 검사 인원 하나랑 밀링 작업 한 명에 포장 인원 둘이면 될 것 같은데.”
“일단 찍어 봅시다. 자! 스타트!”
유압으로 돌아가는 설비 특유의 소리가 참 좋다. 어렸을 때 봤던 로봇 만화가 떠오르며 저 설비가 갑자기 변신해 걸어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설비 자체는 변신하지 않겠지만, 아연 합금 덩어리는 설비를 거쳐 제품으로 변신할 것이다.
설비가 가열되기 무섭게 SPRD 틀을 찍어 낸다.
“이 속도면 분당 2개나 3개 정도는 나오겠네요?”
“찍어 내는 건 금방인데, 잔챙이들 깎아 내는 건 수작업이라 딜레이가 좀 있을 것 같어. 그거 감안해서 시간당 120개 잡았는데, 지금 나오는 것 보니까 이 정도면 대성공 같은데?”
“고생하셨습니다. 못해도 월 3만 개는 나와야 하니까, 일단 이걸로 미리 만들어 놓고 공장 옮기면 설비 하나 추가해서 대량으로 찍어 냅시다. 이게 다 돈입니다.”
“사장님, 나는 처음에 자동권선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갈수록 만들 것이 많아지네. 근데 조립하는 것이 참 재밌어. 불평 안 하고 척척 만들어 낼 테니까 일거리 많이만 물어다 줘.”
조립귀신께서 일거리 물어만 달랜다. 원하는 대로 해 드리리다.
SPRD 양산 체제 구축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갈수록 쫀득해지는 팀워크가 변압기가 아닌 새로운 아이템에서도 쫄깃한 맛을 발휘한 결과다.
이 직원들은 전 회사에서 짜증도 내고 사장 욕도 하면서 퇴근 시간만 기다리던 월급쟁이였을 것이다. 우리 회사에 와서는 일은 많아졌을 테지만, 그래도 다들 즐겁게 일하고 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월급 많이 준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난 그저 저들이 최대한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해 주려고 했지만, 어떻게 해야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사람을 고쳐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해답이었을까?
답은 모르겠지만, 저들이 참 고마운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