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become my concept character RAW novel - Chapter 404
402화 한 사람이 (8)
잠깐. 근데 이게 바로 기억의 교차로 아닌가?
나는 세 개의 시점이 겹쳐진 현상을 두고 슬슬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양립되는 순간을 뜻하는 기억의 교차로. 또한 동 시간대에 존재할 수 없는 기억들이 한곳에 고정된 작금의 상황.
아무리 봐도 지금이 타이밍이었다.
“아니, 근데 그래서 틈새는 어떻게 생긴 건데?!”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짚는 도자기가 되어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모퉁이가 일그러진 채 세 개의 환영이 뒤섞인 세상은 점차 공간이 축소되기만 할 뿐, 균열이라 할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나가는 건지 모르겠다.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건가?”
나는 모퉁이부터 부서져 나가는 세상을 힐끔 보았다. 뭐라고 할까. 오롯이 감에 의지한 판단이지만 그건 영 정답일 것 같지가 않다.
도리어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이거 타임 어택 데드 씬 아니냐?’ 란 생각만 든다. 빌어먹을, 여긴 시공의 탑도 없고 오라시온 연주 기믹은 더더욱 없는데!
“아, 제발!”
탈출 좀 하게 해 줘!
[뭐 하는 것이오?]“……!”
어릿광대?
“광대 씨?”
어디 계신, 아.
나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보려다가, 그대로 정지했다. 목소리를 인지한 순간 산산조각 나던 세상이 사라지고, 돌로 이루어진 방이 나타난 까닭이었다.
[그대는 나가고 싶어 한 게 아니었소?]“아니, 틈새란 걸 도저히 못 찾겠어서…….”
그리고 그 방의 한가운데에는 심장을 치켜든 인간과 가슴이 갈린 악마가 있었으니.
죽은 줄만 알았던 악마가 고개만 살짝 기울여 나를 응시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인간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냥 아무 방향을 찾아 나가면 되는 거였소만.]“네?!”
아니, 틈새를 찾으라매! 찾아서 나가야 한다매!!
[부서진 자리가 바로 틈새잖소.]“틈이라기엔 너무 넓지 않았습니까!?”
모퉁이가 모조리 떨어져 나갔는데 그게 어떻게 틈새야!
[그럼 그걸 무어라 불러야 하오? 기억의 지평선이 무너지며 난 구멍을?]“그건……!”
균… 열? 아니, 이것도 틈이랑 크게 다를 것 없는데. 가장자리? 변방? 부서지는 자리?
[그렇군. 알았소. 다음부턴 그리 말하겠소.]라고 해 봤자 나는 이미 놓쳤잖아! 나는 광대의 말에 차마 화도 못 낸 채 앓는 소리만 흘렸다. 이렇게 쉬운 기믹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젠자아앙.
“이러면 기억 더 봐야 하는 거냐고…….”
난 얘 기억 보기 싫다고. 과거가 불쌍한 건 알겠는데 그래 봤자 한 짓 때문에 정도 안 가니까 그만 보여 달라고.
내 좌절에 광대가 손끝으로 본인의 두개골 끝을 쓸더니 곧 손가락을 퉁겼다.
[다행히 교차로가 될 만한 기억이 가까운 곳에 하나 더 남아 있소.]그나마 희소식이었다.
“정말요?”
[그렇소.]“언제죠? 어떤 상황인가요?”
[오, 미안하지만 나는 이이와 항상 함께한 존재가 아니오. 하므로 내가 없던 자리의 기억은 나도 알 수 없지. 오직 이이가 내가 알고 있을 거라 여긴 사실들만 알고 있을 뿐.]“…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그럼 이 사실은 어떻게 아신 건지 의문이 생기네요.”
밑장 빼기냐? 그런 거라면 용서하지 않겠다. 내 눈이 이글이글 광대를 노려보았다.
[이름의 동일성에서 오는 일치감이 약간의 흐름을 파악하게 해 줬을 뿐이오.]아, 이거 믿어도 되는 거야? 나는 그의 말을 흐린 눈으로 듣다가, 결국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않으면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거진 체념에 가까운 순응이었다.
“알았습니다.”
하, 그럼 또 강제 시청이네. 젠장, 가깝다고 해도 얼마나 가까울는지.
“대신 이건 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교차로가 만들어지는 원리나 발생 조건… 그런 것 말입니다.”
새로운 교차로가 아까처럼 선명하게 찾아올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그러니까 원리나 발생 조건 같은 걸 알아 두면 좀 더 수월하게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흐음. 그것은 기억 속에 묻어나는 강렬한 감정이 강제로 미래나 과거의 기억을 그 순간에 끌어다 붙일 때 탄생하오.]“강렬한 감정…….”
잠깐만. 이 자식, 다른 거 다 제치고 불쌍하단 말이 제일 싫었던 거냐? 그간의 고난과 역경에선 단 한 번도 교차로 안 나타났으면서……!
[그를 잘 이용하면 순행하고 역행하지 않는단 규칙을 무너트릴 수도 있지. 과거와 미래가 교차한 시점에서 이미 무너진 규칙이니.]“…그렇군요. 하면 제가 여기로 건너뛴 것도 비슷한 맥락일까요?”
됐고, 광대 배가 갈린 걸 보면 아마도 둘 사이의 계약이 종료된 시점이 바로 지금일 터. 하나 그 계약의 기간은 분명 50년 후에 결론이 난댔었다.
그리고 계약을 갱신한 시점부터 내가 목격한 몇 개의 기억은 고작해야 연 단위만 흐른 것처럼 보였지. 즉, 처음으로 몇십 년 단위를 스킵해 버린 거다, 나는.
[흐음. 마지막으로 본 것이 무슨 기억이기에?]“로브를 두른 악마가 너 불쌍하다고 하는 장면……?”
[아아. 뭔지 알겠소.]와중에 광대는 이 말을 또 알아들었다. 어떻게 알아듣는지 모르겠다. 전부 아는 건 아니라며?
“이 일을 알고 있다 상정할 만한 일이 있었나 보죠?”
“…소문이 엄청 퍼졌나 보네요.”
[아랫사람의 쑥덕거림으로 군단장의 귀에 들어갈 정도였다면, 이해하겠소?]“아, 그 정돈 예상했던지라.”
아스모데우스가 성내 모든 악마를 연인으로 삼는 것과 별개로, 관심을 기울이는 순서가 따로 있다. 거기에 당시 시점 기준으로 아스모데우스의 최고 관심사는 인간이 독차지하고 있었지.
한데 그런 마당에 관심을 독차지한 이가 ‘나 걔 안 좋아함’이라고 한다? 질투 때문이든 빡침 때문이든 간에 고발하는 놈이 하나쯤은 나오지 않을까. 악마들도 치정극만큼은 못 피할 것 같으니 말이야.
“그래도 아스모데우스의 반응이 궁금하긴 하네요. 그는 화냈나요?”
[군단장이? 그럴 리가 있나. 그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화내는 존재가 아니오. 그렇다고 단념하는 존재도 아니지만.]“…아.”
[오히려 그는 재밌어했소. 그의 정욕은 어려운 사랑일수록 더 부추겨지기에. 이이도 그걸 알고 그리 행동한 것일 거요. 그 어떠한 말도 군단장에게는 귀여운 앙탈로만 여겨질 뿐, 그의 분노를 이끌지는 못하리란 걸 말이오.]…어쩐지 고발될 가능성을 알고도 그런 위험한 말을 지껄이더라. 결국 그마저도 계산하에 내뱉은 말인 건가.
나는 그녀의 영악함과 치밀함에 여러 의미로 감탄하며 몸에서 힘을 뺐다. 궁금한 게 대부분 해결되자, 이걸 마저 봐야 한다는 허탈함이 다시금 차오른 탓이었다.
“…저, 이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못 뵙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소. 나는 이 시점으로 퇴장당할 인격에 불과하니.]아, 그건 좀 아쉽네. 이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대화 가능한 사람이다 보니 그래도 쬐끔 정들었었는데.
“…의미는 없겠지만, 귀하의 고통이 크질 않길 빕니다.”
가슴 갈린 시점에서 엄청 아프겠지만, 애초에 기억이니까 이런 말도 무소용이겠지만. 그래도.
[…그대가 이 기억에 흘러 들어온 이유도 알 법하구려.]“네?”
[이조차도 본인은 무용하다 생각하오만…….]“……?”
[친애하는 그대, 부디 갇히는 일 없이 돌아가기를.]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 광대가 안와의 빛을 꺼트렸다. 그러자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르며 인간이 죽은 광대의 심장을 씹어 삼켰다.
“구역질 나.”
누가 할 소리를…….
나는 심장 먹방을 보여 주는 이로부터 어떻게든 시선을 돌려 보다가, 그녀가 섭취를 끝마쳤을 때 다시 일별했다.
까만 크레파스로 덧칠된 얼굴이 혓바닥을 내민 게 보였다. 생으로 심장을 먹은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구역질 난다고.”
그렇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꼭 비위만을 고려하여 저리 말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하얀 손이 광대의 머리뼈를 들춰 냈다. 어둠을 형상화한 듯한 기체가 그 안쪽에서 둥그렇게 넘실거렸다. 콱. 놀랍게도, 그것은 손에 잡히는 것이었다.
“복수할 거야.”
[복수하시오.]“전부 불태울 거야.”
[불태우시오.]아니, 심장이 먹혔는데 아직도 살아 있어? 나는 성대 없이 답변을 내놓는 검은 기체에 순간적으로 경악을 표했다.
이러는 순간에도 인간은 본인이 움켜쥔 어둠을 입가로 가져다 대고 있다.
“전부…….”
[죽여 버리시오.]인간이 악마를 입안에 담았다. 배구공만 한 어둠이었지만, 꾸역꾸역 밀어 넣는 대로 전부 들어갔다. 전부 손에 잡히되 물질적인 부피를 차지하고 있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세계는 존속의 가치가 없으니.]그리고 그녀가 메피스토펠레스의 영혼이자 이름을 목구멍 너머로 넘겼을 때.
[하면, 자. 선언하시오.]쿵! 그녀의 몸이 흔들렸다. 쿵! 마치 자동 제세동기로 심장을 뒤흔들 때와 같았다. 쿵! 그녀의 상체가 퉁 튀어 올랐다가 다시 돌아갔다.
동시에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그늘을 한 번 더 껴입기 시작했다. 뚝, 뚝. 옷깃에서 피어오른 검은 불길은 마치 물방울처럼 아래로 흘러내린다.
[자, 친애하는 그대.]흐르는 화마를 따라 옷들이 재 가루가 되어 사멸했다. 대신 불꽃이 뭉쳐 만들어진 까만 가죽은 그녀의 온몸을 휘감은 채 그 안쪽의 육신을 보이지 않도록 가린다.
우드드드득.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무언가가 뒤틀리고 변형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 아프겠다. 내 눈썹이 반사적으로 찡그려졌다.
“흐.”
하나 그 고통스러운 변이도 오래 걸리진 않았다. 울룩불룩 튀어나오며 변화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던 검댕들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그녀가 삼켰던, 혹은 그녀를 삼켰던 어둠은 녹아내리듯 그림자로 숨어들며 그 생의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대의 이름은…….]“나는.”
죽어 가는 악마의 질문에 대답하듯, 어둠을 삼킨 존재가 고개를 슬 들었다. 그에 맞춰 축 늘어지는 것은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다.
“내 이름은─”
거미줄처럼 힘없고 가느다란 머리칼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보이지 않는 입술이 벌어졌다. 언어를 그리는 목소리는 아까와 썩 다르지 않으나 어딘가가 다르다.
아, 그래.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므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젠 내가 바로 메피스토펠레스야.]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내버린 악마가 한숨처럼 자신의 정체를 정의했다. 참 기이한 일이었다. 내기에서 이긴 것은 분명 인간이었는데 남겨진 것은 악마의 이름이라니.
[내가, 내가 바로…….]복수를 위해 모든 걸 내버린 자의 말로란 이다지도 공허한가 했다. 옛 인간이 양손으로 제 머리를 붙잡은 채 웃는 목소리로 흐느꼈다.
[…흐, 흐하하!]그리고 끝내, 그 흐느낌도 광소로 돌변했다. 아니다. 비명이었다. [으아아아아아!!] 텅 빈 자리를 메꾸는 격정이 포호가 되어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다, 죽여 버릴 거야!]나는 그쯤 되어 그녀가 왜 저러는지 깨달았다. 누군가에게는 하염없이 슬퍼질 그 공허는 그녀에게 있어선 분노의 시발점에 불과했다.
[죽여 버릴 거라고!!]설사 그것을 잃어버린 게 자신의 선택일지라도.
모든 걸 자신이 화낼 핑계로 삼는 자가 고함을 마구 내질렀다.
[전부… 전부……!]또한 그 마지막에서, 한껏 분노를 표출해 낸 자가 고개를 휙 들었다. [전부, 죽어 버려.] 그에 맞춰 사그라든 목소리는 지독하게 냉랭하고 또 음산하다.
발산하는 걸 멈춘 격노가 안으로, 안으로 수그러들며 밀도 높은 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더없이 시리게 불타는 불꽃이다.
[…….]그녀는 그 불꽃을 속에 품은 채, 바닥에 있던 광대의 잔재를 주워 들었다.
덩그러니 남아 버린, 산양의 두개골과 같은 뼛조각. 한때 어릿광대의 머리 역할을 하던 그것은, 영혼과 이름을 잃은 지금 한낱 사물에 불과하다.
유골을 거머쥔 악마가 그것을 치켜들어 본인의 안면에 얹었다.
[…군단장에게 설명부터 해야겠네.]가면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뼈다. 차라리 투구처럼 보일 지경으로.
[하지만 너는 나를 봐 줄 수밖에 없을 거야.]그러나 그 사실을 두고도 정작 쓴 이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내가 아는 모습으로 완전히 고정된 이가 까만 두루마리를 펄럭이며 한쪽 벽면으로 나아갔다.
[그게 너와 나의 사랑 방식이잖아, 그렇지?]그녀의 손이 벽면으로 향한다. 끼익. 벽과 분간 가지 않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빛을 등진 채 달려들었다.
[#$@%#@.] [나, 궁정광대를 먹었어. 이런 나도 사랑해 줄 거야?] [#$@%#@$$#.] [그건, 꽤 감동이야.]그리고 노이즈.
[당신을 죽일 수 있는 나는 안 돼? 그게 네가 말한 사랑이야?]다시 노이즈.
[착하지. 그래, 목을 보여 줘. 너의 사랑을 증명해.]또 한 번 노이즈.
[잘 자, 내 사랑.]마지막으로는…….
피 웅덩이와 화마.
나는 아까 흐릿하게 보았던 기억을 높은 해상도로 다시 감상하며 약하게 한숨을 뱉었다. 약하다는 이유로 숨겨 왔던 울분이 정말 화려하게도 타오르고 있었다.
“등신 새끼. 잘 죽었다.”
근데 솔직히 아스모데우스는 칼침 맞아도 억울할 수가 없는 악마인 듯.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살해에 붐 업을 보냈다. 물론, 이 이후 내 엄지를 계속 아래를 향할 예정이다.
“아, 기억 언제 끝나냐고.”
이러다 망할 꼬맹이 만나는 거까지 보겠다, 그지?
나는 속으로 온갖 욕을 다하며 성을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 이후 펼쳐질 기억이 어떤 것인지 상상도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