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77
176
요정은 전형적으로 화려한 이목구비의 미인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뛰어넘어 주변을 압도하는 뭔가가 있었다.
온통 새하얀 와중에 유일하게 색을 지닌 노을빛 눈동자가 태양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보석처럼 반짝였다. 세상을 비추는 호수처럼 고요한 눈동자는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에녹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과 요정을 왜 못 엮어서 안달이냐며 질색을 했지만, 세라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눈처럼 새하얗고 신비로운 여자와 장미처럼 붉고 화려한 남자가 나란히 서 있으니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집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 놓고 두고두고 보고 싶은 그림이었다.
평소에 타인의 외모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세라가 보기에도 그랬다.
“…….”
요정은 세라에게 용건이 있는 것처럼 시선을 빤히 부딪쳐 왔다.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싶어 세라가 뭘 보냐는 표정으로 눈썹을 까딱였다.
그러자 요정이 싱거울 정도로 순순히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
뭐지. 날 본 게 아닌가.
머리를 긁적인 세라가 곁에 놓인 케이터링 테이블에서 차가운 포도 주스 한 잔을 들어 올렸다.
퍼버벙! 퍼벙! 그때까지도 한낮의 불꽃놀이는 끝나질 않았다. 누군가 저건 대체 언제까지 터지는 거냐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딴청을 피우던 세라가 다시 슬쩍 건너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에녹은 절망하고 있는 레니스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요정이 에녹의 옷자락을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에녹이 조금 성가시지만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주었다. 발뒤꿈치를 든 요정이 에녹의 귓가에 뭔가를 속닥거렸다. 제법 큰 소리로 묻고 있는 것 같은데, 뭐라고 하는지는 요란하게 터지는 폭죽 소리 때문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요정의 말을 귀담아듣던 에녹의 미간이 팩 찌푸려졌다. 허공을 바라보던 에녹의 시선이 건너편에 선 세라를 단번에 찾아냈다. 노려보다시피 그녀를 쳐다보던 에녹이 방향을 바꿔 요정의 귀에 짧게 속삭였다. 짤막한 대화를 나눈 둘은 잠시 서로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당사자들은 그저 별생각 없이 바라본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훌륭한 겉껍질에 감싸인 선남선녀가 그러고 있으니 지켜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입을 맞추기 직전의 전조 현상처럼 느껴졌다.
“어머, 눈빛 좀 봐.”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이미 요정의 정체가 에녹의 첫사랑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길드원들이 ‘어머, 어머’ 거리며 짓궂은 말들을 속닥거렸다.
온 길드 사람들 앞에서 눈빛 교환을 하던 두 사람의 주의를 돌린 건 마커스였다. 둘에게 다가간 마커스가 이만 이동하자는 듯한 몸짓을 보냈다. 요정과 에녹, 길드의 주요 인사들이 그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길드의 정식 초대를 받고 온 귀빈이니, 요정은 길드 회관의 가장 크고 좋은 방을 배정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귀빈을 환대하는 행사를 순조롭게 마무리 짓던 때였다.
미야옹.
온통 새하얀 인간이 돌아다니는 게 신기했는지, 사람들 틈에 있던 길고양이 하나가 요정의 앞에 끼어들었다. 공격적인 움직임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아주 작고 귀여운 아기 고양이었다.
“……!”
하지만 요정은 제 몸의 반의반도 안 되는 털 뭉치가 맹수라도 된다는 듯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펄쩍 뛰어오른 요정이 얼른 에녹의 뒤로 숨었다. 말이 숨었다지 거의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했다. 그러고는 사시나무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에녹은 이것조차 익숙한지 당황하지 않고 고양이와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명령했다.
“……발레리. 고양이 좀 데려가.”
발레리가 아기 고양이를 데리고 자리를 피하고 나서야 요정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일행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는 더 이상의 돌발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
“…….”
세라는 그들이 사라지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 우리도 이만 식사하러 가자고…!”
“저녁에는 바비큐 돌릴 거니까 벌써부터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주인공이 사라지자 길드원들은 광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상에 마지막 남은 요정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 하루 시그너스 길드는 모든 일을 멈추고 하루 종일 먹고 마시며 놀 예정이었다. 이곳에는 간단한 다과 정도만 가져다 두었지만, 광장에는 이미 길드의 대표 요리사인 에드워드가 만든 요리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을 것이다.
설렁설렁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좋은 자리를 맡으려는 몇몇이 속력을 냈다.
그중 하나가 가만히 서 있는 세라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아, 미안합니-.”
마음은 이미 광장에 가 있던 그는 건성으로 힐끗, 자신과 부딪힌 사람을 곁눈질하며 사과하다가.
“히이익?! 세라! 너, 너 손…!”
기겁을 하며 세라의 손을 가리켰다.
“손……?”
그때까지도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던 세라가 무심코 남자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제 손을 발견하고는 ‘어-.’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딱 한 모금 먹은 포도 주스가 담긴 유리잔이 그녀의 손안에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뾰족하게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세라의 여린 손을 파고들어 상처를 벌렸다. 제법 상처가 깊게 났는데도 꽉 쥐어진 주먹은 펴질 줄을 몰랐다.
“왜? 무슨 일이야?”
“허억, 세라. 다쳤어?”
소란이 일자 음식에 정신이 팔려 있던 길드원들이 하나둘 세라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대체 잔을 얼마나 세게 잡은 거야? 조심 좀 하지…….”
상처를 발견한 남자가 세라 대신 주먹을 펴 주며 잔이 이렇게 되도록 힘을 준 그녀를 걱정스레 타박했다. 남자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부상을 알아챈 길드원들도 유리를 다룰 땐 조심하라고 한마디씩 덧붙였다.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나 봐.”
세라는 얼떨결에 대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잔을 깨뜨렸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보는 사람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릴 정도로 심하게 상처가 났는데도, 놀란 듯이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있을 뿐,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이랄 게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유리 박힌 것 좀 봐라-.”
그사이 남자는 세라의 손을 펼쳐 눈에 띄는 커다란 유리 조각을 전부 빼냈다. 상처를 파고들었던 것들이 사라지자, 베인 곳에서 더 많은 피가 새어 나왔다. 누군가 지혈이라도 하라며 손수건을 건네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얗던 천이 온통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러고도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지혈이 안 되는데? 일단, 병원으로 가자.”
상태가 몹시 심각해 보였으므로, 길드원들이 서둘러 병원에 가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얼떨떨한 감정이 조금 걷히고 나자, 따끔거리는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픈 건 싫었던 세라가 그러자며 얼른 남자를 따라나섰다.
“불쌍해…….”
그 뒷모습을 유난히 아련하게 지켜보던 길드원 하나가 씁쓸하게 혼잣말을 지껄였다.
“뭔 소리야. 세라가 왜 불쌍해? 쟤가 요즘 제일 잘나가는데.”
그에, 곁에 선 친구가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불쌍하다는 표현에 딴지를 걸었다. 세라는 가시 공략대에 들어간 이후로 기드온마저 인정할 정도로 차근차근 활약을 쌓고 있는 유망주였다. 아직 공략대에 참여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자기들 중 한 명을 뽑아 중앙 가시에 들어가야 한다면 모두 입을 모아 세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시그너스의 가시 공략대원들에게 가장 큰 영예였다.
“으이그. 바보야. 넌 길드 일에 그렇게 관심이 없냐?”
친구가 너는 그것도 모르냐며 냉혈한 보듯 그를 훑었다.
“대장. 자기 첫사랑 온다고 애인들 다 정리했잖아.”
그러면서 착실하게 그가 묻는 말에 대답도 해 주었다. 에녹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은 단어에 질문했던 길드원이 펄쩍 튀어 올랐다.
“뭐?! 진짜?!”
그게 누군데! 하고 묻자 친구가 ‘아까 그 요정님.’하고 대답했다.
“세라만 불쌍하지. 기껏 자유민이 되어서도 길드에 돌아왔는데, 이렇게 금방 버림받다니…….”
설명을 마친 길드원이 다시 세라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아련하게 눈가를 좁혔다.
“나 같아도 열받아서 가만히 못 있지. 응. 가만히 못 있어.”
붉게 물든 유리 파편들을 내려다본 그는 세라의 마음을 십분 공감한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앞으로는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 어쩐지. 하아-. 난,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의 인과를 이해한 남자가 제 머리를 탁, 쳤다. 무심코 보고 넘겼던 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딱딱 아귀가 들어맞는다는 표정이다.
“바보야! 너 빼고 다 알아!”
남자는 주변에 관심 좀 가지고 살라며 제 친구의 등을 짝,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으나,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이젠 정말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렇구나. 세라도 대장한테….”
“어쩐지. 요즘 일을 열심히 하더라.”
“그렇게라도 해서 잊고 싶었던 게지….”
“뭐야. 대장 너무 잔인하다. 그럼 방금 세라 앞에서 자기 첫사랑이랑 그러고 있었던 거야?”
세라를 안타깝게 여기는 말과 에녹을 흉보는 말이 동시에 쏟아졌다. 설마 그런 가슴 아픈 이별을 한 줄 모르고 있던 길드원들은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이 버림받은 세라라도 되는 양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손이 이렇게 되도록 유리잔을 쥐면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 손을 찢어 먹은 세라는 응급 처치를 받는 내내 의사에게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째서인지 그녀를 데려온 길드원이 ‘화가 나서 유리잔을 깨트려 버렸다.’고 상황을 설명했기에, 나이 지긋한 의사는 세라를 분에 못 이겨 자해를 일삼는 문제 환자 취급했다.
“화가 나면 자해를 하지 말고 차라리 한 대 치세요. 그게 덜 다치니까.”
의사가 내놓은 해결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과격한 처방이었으나, 어쨌든 그 저변에는 세라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깔려 있었다.
“……화 나서 그런 거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열받아서 얼굴이 시뻘건데.”
졸지에 분노 조절 장애 환자가 된 세라가 뒤늦게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해 보지만 의사는 이미 세라보다 함께 온 길드원의 말을 더 신뢰하는 것 같았다. 세라를 병원에 데려다준 길드원은 의사와 합심하여 한 대만 치지 말고 여러 대 쳐도 괜찮지 않으냐며 떠들어댔다.
아무도 제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세라는 그냥 화나서 유리잔을 깬 박력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저들에게 그녀의 손이 작살이 난 이유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기야. 오늘도 예쁘네.’
사람들 몰래 교태를 부리는 애인을 보고 너무 놀라서 깨트려 버렸다고는. 절대로.
***
마커스의 주도 아래, 길드의 주요 시설들을 한 바퀴 돈 요정은 에녹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해 왔다. 어차피 에녹의 시간은 그곳에 있는 누구보다 한가했으므로 그 요구에 딴지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길드원들이 광장에 가 있겠다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제 요정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에녹뿐이었으므로, 그가 자연스럽게 앞장서 걸었다. 어디 분위기 좋은 곳에 들어가 회포를 풀리라는 예상을 깨고, 그가 요정을 데리고 간 곳은 길드 병원이었다.
그것도 정문이 아니라 뒷문.
자신이 직접 초대한 귀빈에게 할 만한 대우는 아니었으나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요정은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병원의 뒷문은 관계자들이 쓰는 통로와 이어져 있었다. 그 통로를 통해 가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에녹이 어떤 병실의 문을 열었다.
병원에서 가장 위중한 환자들만 모아 놓는 중환자실이었다.
“여기야?”
그곳이 목적지임을 알아챈 요정이 에녹보다 먼저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숨소리만 들리는 병실은 고요했다.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이라곤 에녹과 요정, 그리고 환자들의 상태를 기록하기 위해 잠시 들른 간호사 하나가 전부였다.
“오랜만에 대뜸 와 달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가장 가까운 병상에 다가간 요정이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환자의 이마 한가운데 자리 잡은 검은 낙인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상한 걸 보게 하네?”
요정의 시선이 병실을 한 차례 죽 훑는다. 모두 방금 살펴본 사람과 똑같이 이마 정 가운데에 검은 낙인을 달고 있었다. 대충 백여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눈으로 환자의 수를 헤아린 요정이 낙인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불쾌한 듯 고운 미간을 팩, 찡그렸다.
“정말 이상하네…. 이걸 대체 누가 여기에 박아 넣은 거지?”
놀랍게도 요정은 한눈에 그 사특한 저주의 정체를 알아차린 눈치였다.
“아는 마법이야?”
마침내 잡게 된 실마리에 에녹이 얼른 관심을 보였다.
낙인 위를 조심스럽게 더듬은 요정은 아무리 봐도 자신이 생각하는 그게 맞다며 확신에 찬 얼굴을 했다.
“이건, 아주 오래전에 지상에서 사라진 마법이야. 인간이 다루기엔 너무 위험한 마법이라, 우리가 직접 ‘지혜’에서 제외했지.”
요정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지혜’의 관리를 위해서였다. 그들은 ‘지혜’와의 문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이로운 진리는 널리 퍼뜨리고, 사악한 진리는 ‘지혜’에서 분리하여 파괴했다. ‘지혜’로부터의 분리는 개념 자체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게 파괴된 대상은 기록으로도 구전으로도, 누군가의 기억으로도 이어질 수 없어 영원히 잊히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시그너스의 길드원들을 잠재운 이 저주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 기가 찬 헛웃음을 내뱉은 요정이 적대적인 눈으로 낙인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떤 터무니없는 놈이 이런 짓을 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