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07
206
“……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진이 저항 없이 쓰러져 있는 에녹을 발견하고는 눈을 끔뻑거렸다. 쓰러진 그의 몸에는 세계수와의 연결을 위해 새겨 놓은 요정의 언어가 말끔히 지워진 채였고, 어깨에 내려앉은 황금색의 빛무리도 안개처럼 흩어진 뒤였다.
파르르르-.
빛이 사그라듦과 동시에 세계수가 미친 듯이 나뭇가지를 떨어댔다. 그러자 풍성하게 달려 있던 나뭇가지들이 일시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뭐, 뭐야. 왜 저래? 힘인지 뭔지가 넘어가서 저러는 거야?”
세라가 물었다.
아무리 보아도 상황이 종료된 것 같은 광경이라, 그래야만 문제가 없을 상황이기는 했다.
“……어어?”
하지만 정작 답을 해 주어야 할 진은 그저 어리둥절해했다.
의식이 정상적으로 끝났다고 여기기엔 세계수가 너무나도 파릇파릇했던 것이다.
이상하다. 힘이 넘어갔으면 세계수가 시들어야 하는데……?
끔뻑. 끔뻑끔뻑. 끔뻑끔뻑끔뻑.
진이 쓰러진 에녹과 멀쩡한 세계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눈을 깜빡이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확신으로 단단하게 굳어져 있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에녹! 에녹! 야!”
그사이 쪼르르 달려간 세라가 에녹을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아무리 흔들고, 때리고, 꼬집고, 따귀를 쫙쫙 날려도 요지부동이었다.
“……얘가 눈을 안 뜨는데?”
이것도 의식의 여파야?
아무것도 모르는 세라가 순진한 눈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물에 물을 섞는 의식이라고 했으니 끝나고도 멀쩡해야 하는데, 쓰러진 에녹은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제대로 된 거 맞아? 확실해?”
진을 대하는 세라의 말투가 한층 험악해졌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지고 난 이후에야, 진이 비틀비틀 걸어와 에녹을 살폈다. 침착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손길로 쓰러진 몸 여기저기에 손을 대어 본 그는 마지막에서야 ‘지혜’의 존재를 떠올렸는지 허공을 바라보는 노을빛 눈동자가 일순 흐릿해졌다.
“……?”
그러고는 대체 ‘지혜’로부터 무슨 소리를 전해 들었는지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변해 갔다. 그의 표정만 보아도 뭔가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야, 뭔데. 뭐가 잘못됐는데? ‘지혜’가 뭐래. 의식 실패했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세라가 재차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그에 에녹이 쓰러진 뒤로 어어, 거리고만 있던 진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지혜’께서 말씀하시길…….”
진의 눈동자가 허공을 바쁘게 헤맸다. 희게 질린 입술을 더듬더듬 움직인 그는 세라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지혜’가 속삭여 주는 이야기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 주었다.
“세계수가 에녹을 거부했대.”
“세계수가? 갑자기? 왜……?”
“강력한 원한, 처음 보는, 저주, 의식 깊숙한 곳에 묻힌, 세계수, 두려움, 그 남자, 여기에…….”
우르르 쏟아지는 지식을 곧바로 번역하기 벅찼는지 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은 점점 파편화되어 갔다. 버벅대며 말을 잇던 진은 급기야 다시 입을 다물었다. 허공에 고정된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리더니 곧 힉, 힉,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야! 야! 정신 차려! 너는 또 왜 이러는데?!”
그대로 두었다가는 진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기에, 식겁한 세라가 요정의 멱살을 틀어쥔 채 핏기 잃은 뺨을 찰싹, 찰싹 후려쳤다. 도움이 되었는지, 발작 증세를 보이던 진이 헉, 하고 ‘지혜’로부터 빠져나왔다.
“뭔데.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래? 세계수가 거부해서 뭐? 잠들었대? 잠깐 기절했대? 쟤는 대체 언제 깨어나는데!”
답답함이 가중된 세라가 우르르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쿵, 쿵, 쿵, 쿵, 불길한 예감에 세라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그러면서 바짝 조여진 동공이 쓰러진 에녹의 옆얼굴을 훑었다. 그녀가 느끼는 위기감과는 정반대로 잠들어 있는 얼굴은 잠깐 낮잠이라도 든 것처럼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흔들어 깨우면 일어날 것 같다.
그와 동시에 어쩌면 영영 저 안에 감춰진 장난스러운 눈동자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재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세라를 빤히 바라보던 진이 본인이 말하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안 깨어나…….”
“……어?”
“안 깨어난다고. 세계수가 에녹의 의식을 밀쳐 내는 바람에 저 애 안에 잠들어 있던 저주가 발동해서…….”
절망적인 전망을 줄줄 읊어대던 진이 차마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말이나 지껄여댔다. ‘지혜’가 속삭여 주는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도무지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무책임한 말을 전해 들은 세라가 크게 역정을 내었다.
그녀는 지금 진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저주가 발동해…? 에녹에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저놈은 성검의 가호 덕분에 저주는커녕 ‘목소리’로 내리는 간단한 명령도 먹혀들지 않는 징그러운 놈이잖아!
뀨우우우…….
그때,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쿠구궁. 쿠궁. 웅크리고 있던 거인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듯 대지가 묵직하게 공명했다. 익숙한 울음소리에 세라가 설마설마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뀨우우. 뀨우우우…….
그리하여, 실로 오랜만에 비틀린 운명을 한가득 머금은 검은 덩어리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거인처럼 몸집을 불린 검은 덩어리가 단숨에 세라를 찾아내 뀨욱. 하고 울었다.
쩌적, 시야가 갈라졌다.
***
“으아아악! 씨발!”
욕설을 내지른 세라가 열심히 책을 휘둘렀다.
진이 하얀 숲에서 몰래 빌려 온 의식에 관한 책이었다.
뀨우웅-!
퍽, 퍽, 그녀가 휘두른 책에 맞은 검은 덩어리들이 하찮은 소리를 내며 동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한 무리를 털어 내니 곧 다음 무리가 동산 위로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세라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책을 휘둘러 그것들을 털어 냈다. 하지만 아무리 털어 내고, 또 털어 내도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검은 덩어리의 행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야! 아직이야?! 아직도 못 찾았냐고!!!”
헥헥대며 숨을 고른 세라가 제 등 뒤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손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책을 휘둘러 자신들을 노리는 비틀린 운명들을 후려쳤다. 쩌저적. 쩌적. 우글우글 모여든 검은 덩어리들이 멋대로 눈을 맞춰 오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에녹이 쓰러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덮쳐 온 운명은 하나같이 비참하고 끔찍한 결말이 대부분이었다. 그 속에서 세라는 불에 타서 죽고, 중독돼서 죽고, 미쳐서 죽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죽는 방법이야 다 제각각이지만 어쨌든 핵심은 모로 가도 죽음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은 그 광경이 자꾸만 눈앞을 가리는 바람에, 동산을 오르는 검은 덩어리들의 모습이 자꾸만 흐릿해졌다. 눈에 뵈는 게 없으니 그저 막무가내로 책을 휘두르는 것만이 답이었고, 그러다 보니 상황에 맞춰 힘을 조절하거나 영리하게 분배하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저질 같은 체력이 두 배로 더 빨리 소진되고 있었다.
망했어! 완전히 망해 버렸다고!
적당히 필요한 이득만 챙기다 길드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던 세라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이유를 찾아내곤 서슴없이 책임을 떠넘겼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원수야!”
“…….”
그녀의 서슬 퍼런 외침에도 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초점 없이 허공을 헤매는 노을빛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다시 ‘지혜’ 속으로 뛰어든 진은 아까부터 내내 저 상태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대꾸 정도는 해 줬는데, 지금은 완전히 무아지경이었다.
덕분에 영문도 모르고 혹사당할 뿐인 세라의 어깨만 빠질 듯이 아파 왔다.
쉬지 않고 책을 휘두르던 세라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야 귀퉁이에 걸리는 검은 짐승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까망아…!”
뀨우웃!
그녀의 부름에 충성스러운 아기 뱀이 용맹하게 대답했다가.
끄억, 토할 것 같다는 듯 트림을 하고는 옆으로 툭, 쓰러졌다. 뀨우우욱…. 침울한 울음을 내뱉은 까망이가 빙글 몸을 돌려 세라에게 배를 보였다. 항복의 의미로 드러내는 배는 이미 뱀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통통하게 부풀어 있었다. 세라가 막지 못하는 검은 덩어리들은 까망이가 잡아먹어서 막아 주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한계인 것 같았다.
뀨우우? 뀨웃, 뀨우우!
쓰러진 까망이의 몸 위로 세라가 미처 막지 못한 검은 덩어리들이 올라붙기 시작했다. 까망이의 몸을 완전히 뒤덮은 그것들은 적을 점령한 왕의 군대처럼 팔짝팔짝 뛰며 기뻐했다. 폴짝거리는 검은 덩어리에 밟힌 통통한 몸이 저항 없이 흔들리다, 이내 그것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까망아아아아!”
그에 세라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검은 덩어리에 뒤덮인 애완 뱀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고 싶었으나 제 코가 석 자였다. 후들거리는 팔 때문에 점점 책을 휘두르는 속도가 느려졌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그녀도 까망이의 곁으로 가게 될 것이다.
“흐억, 흑, 으어어, 이러다가는 내가 먼저 죽겠-.”
“찾았다.”
모든 게 절망적인 그 순간, 마침내 답을 얻은 진이 세라의 어깨를 낚아챘다.